[해외 경제]미국 금리 인하, 만병 통치약인가
  • 成耆英 기자 ()
  • 승인 1998.10.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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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경제가 지금 거품이 꺼지면서 곤두박질치는 것이냐, 아니면 미세한 조정 국면 과정을 거치고 있는 것이냐에 따라 세계 공황 발생 여부가 드러날 것이다.”
미국의 경제 대통령이라는 칭호를 가진 앨런 그린스펀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87년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에 취임한 뒤 바로 미국에 ‘블랙 먼데이’가 닥치자 전격적으로 금리 인하를 단행한 적이 있다. 지금도 87년과 비슷한 상황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현재의 금융 위기가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아시아에서 발생해 러시아를 타고 넘어 미국 코앞인 중남미와 캐나다에까지 번지면서 세계 경제 대란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경제 전망치가 어둡게 나올수록 그의 발언 한마디 한마디에는 세계인의 관심이 집중된다. 워싱턴이 피리를 불면 뉴욕은 춤을 춘다고 했던가. 그린스펀의 말 한마디에 뉴욕의 월 스트리트는 마구 출렁거린다. 그것은 미국 경제뿐만이 아니다. 이미 그린스펀의 입은 세계 증시를 들었다 놓을 수 있는 위력을 가지고 있다.

그린스펀은 금리 인하 신중론자

한 예로 9월 초 그린스펀이 버클리 대학 강연에서 지극히 추상적인 표현으로 미국의 금리 인하를 시사했다고 보도되자 전세계 주가는 하루 상승 폭으로는 사상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그린스펀은 미국 경제에서 중요한 것은 아시아를 비롯한 다른 나라들의 금융 위기가 아니라 국내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라며 금리 인하에 반대하고 기존 통화 정책을 고수해 왔다.
그렇다면 미국이 금리를 인하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아니 그보다는 미국이 연방 기준 금리를 인하했을 때 과연 그것이 침체에 빠져 있는 미국 증시를 되살리고 더 나아가 국제 금융 위기를 진정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인가.

미국 다우존스 공업지수가 9000 포인트를 돌파해 10000 포인트를 향해 질주하면서 미국 경제가 태평가를 부르고 있던 지난 4월 영국의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미국 경제에서 거품이 꺼질지도 모른다는 징후를 이미 읽어낸 바 있다. 이 잡지는 미국 증시가 활황을 누리는 가장 큰 원인을 통화량 급증에서 찾았다. 따라서 금리를 인상해 과열된 증시를 진정시켜야 한다는 해법을 제시했다.

국내총생산(GDP)의 10%를 넘는 규모를 기록한 기업 합병 열풍도 그동안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감탄하고 있을 것만은 아니었다. 29년 대공황 때를 비롯해 20세기 들어 서너 차례 불어닥쳤던 기업 합병·매수 열풍이 결국 증시 붕괴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거품 경제가 단번에 무너지게 되면 금융 시스템이 불안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급작스런 경기 불황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주식 시장이 과열 기미를 보일 때 금융 당국이 개입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금융 당국으로서도 부담이 따른다. 주식 시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금리 인상을 단행해 불황을 초래하면 그에 따르는 정치적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시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섣불리 개입하기를 꺼렸던 것도 이런 배경을 깔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지난 4월 금리를 손대지 않은 그린스펀 의장이 이번에도 쉽게 금리를 손대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그는 10년이 넘는 재임 기간 내내 대단히 신중한 자세를 보여주었다. 또 설령 미국이 금리를 내린다 하더라도 그 폭과 효과에 대해서는 확신하기 힘든 형편이다. 현재 연방 기준 금리는 5.5% 수준. 97년 3월 이후 1년 6개월 동안 한번도 바뀐 적이 없다. 만약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금리 인하를 단행할 경우 하락 폭은 0.25% 포인트 수준이 될 것 같다. 얼마전 루빈 미국 재무장관과 세계 불황의 원인을 놓고 지루한 입씨름을 하다가 금리를 인하했던 일본의 인하 폭도 0.25% 포인트에 불과했다.

그러나 미국의 금리 인하 여부만을 목 빼고 기다리는 금융 위기 국가들에 이 정도 인하 폭이 얼마나 큰 효과를 가져올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일고 있다. LG경제연구원 심재웅 연구원은 미국의 금리 인하 폭보다 중요한 것은 아시아 금융 시장의 건전성이라고 지적한다. “미국이 금리를 내리면 국제 금리는 내려가겠지만 신흥 시장의 금리는 여전히 높을 수밖에 없다. 이들 시장에 위험성이 상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이 금리를 내렸다고 해서 미국내 자본이 다른 나라로 이동하리라고 보기는 아직 이르다.”

물론 미국 경제의 향방이 금리 인하 여부라는 단기적인 조처에만 좌우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각종 거시 지표이다. 미국 경제가 지금 거품이 꺼지면서 곤두박질치고 있는 것이냐, 아니면 미세한 조정 국면, 이른바 파인 튜닝(fine tuning) 과정을 거치고 있는 것이냐에 따라 세계 공황 발생 여부가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뉴스 위크>와 인터뷰한 골드먼 삭스의 시장 전략가 애비 조셉 코언은 미국 경제의 장래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을 거두어들이지 않았다. 그는 8월 말까지 이어졌던 폭락 장세가 주춤하고는 있지만 아직도 8000대 이하에 머무르고 있는 다우지수의 연말 예상치를 9300으로 잡아놓은 채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있다. 외채 지급 유예(모라토리엄)를 선언한 러시아와의 교역 규모가 1% 미만인데다 실업률이 낮고 인플레이션 수준도 걱정할 단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지적대로 미국 경제를 낙관하는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실업률이 아주 낮다는 사실을 긍정적인 신호로 받아들이고 있다. 현재 미국 실업률은 4.5% 수준으로 실질적인 완전 고용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는 24년 이래 최저 수준을 나타내는 수치이다. 소비자 물가 상승률 역시 올해 들어 더욱 떨어져 1%대에 머물러 있다. 달러화 강세로 인해 수입가가 떨어진 것이 원인이지만 그동안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인플레이션 징조가 보이기만 하면 금융 긴축 정책을 펴 ‘예방적인’ 물가 관리를 해 왔다는 점이 주효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 미국 경제가 비관적이라고 전망하는 분석가들은 주변 국가의 경제 위기에 주목한다. 러시아 정치가 과도기적이기는 하지만 다소 안정을 찾아 가면서 세계 경제의 초점은 오히려 중남미·캐나다로 옮아가고 있다. 러시아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했을 때만 해도 과잉 반응을 자제하던 미국도 경제 위기의 불똥이 대서양을 건너 캐나다·브라질 등 안방과 건넌방으로 튀자 위기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나라의 위기는 교역 규모로 보나 경제적 상관 관계로 보나 러시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상무부 발표를 보더라도 미국 기업들의 2/4분기 수익률이 10년 만에 처음으로 전년 대비 1.5% 포인트 가량 감소한 것으로 드러났다. 화폐 가치가 급격히 떨어지고 있는 아시아 국가들로부터 들어온 수입품과 가격 경쟁을 벌여야 하기 때문이다.

G7 공조해 세계 대공황은 막을 듯

미국 경제의 거시적 추이는 한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특히 금리 인하 문제는 더욱 그렇다. 주변국의 눈치를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영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 금리 인하라는 공통 분모로 미국과 정책 공조를 벌이는 것에 아직 회의적인 것도 미국의 금리 인하 가능성을 낙관하기 힘들게 하는 변수이다. 유럽연합(EU) 내에서 가장 큰 목소리를 내는 프랑스와 독일은 금리 인하에 난색을 표시했다.

그러나 한 가지 가능성은 남아 있다. 일부의 우려대로 브라질 등 중남미 일부 국가가 채무불이행(디폴트)을 선언하는 등 대공황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화할 기미가 보이면 선진국들이 무릎을 맞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철로 위에서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달려 오는 기차 앞에서 손을 맞잡은 두 사람 중 누가 먼저 손을 놓느냐 배짱을 겨루는 치킨 게임처럼 공멸의 시나리오 앞에서는 늘 막판 타협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대공황 시나리오를 번번이 잠재워 온 것도 따지고 보면 이런 정책 공조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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