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체제 1년과 한국 경제 앞날
  • 李哲鉉 기자 ()
  • 승인 1998.12.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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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체제 1년과 한국 경제/외국 신용평가기관들 “회복 기미”진단
98년 11월21일. 이른바 ‘국제통화기금(IMF) 시대’ 1주년. 경제 위기 이후 끊이지 않은 시위 행렬의 구호가 ‘I am Fired’에서 ‘I am Fighting’으로 바뀌어가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 경제는 지난 1년 동안 재활 의지를 보이며 고통스러운 수술과 물리 치료를 감내했다.

그렇다면 한국 경제는 얼마만큼 건강해졌나? IMF 체제 1년을 맞아 <시사저널>은 미국 신용평가기관과 월 스트리트의 경제 예측기관들의 견해를 들어보았다. 결론적으로 이들은 지금 한국 경제가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고 조심스럽게 진단한다. <편집자>

■한국은 제2 외환 위기를 비롯해 경제 위기에서 벗어났는가?

미국 신용평가기관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가 <시사저널>에 보낸 한국 경제 보고서에는, 경제 위기가 다소 누그러지고 있으나 단기적으로 불안 요인이 잠재해 있다고 지적했다. 가장 눈에 띄는 성과는 환율과 주식 시장의 안정. 달러당 1천8백원이 넘었던 환율은 최근 1천2백원을 기록하기도 했다. 지난 3개월 동안 달러당 원화는 1천3백∼1천4백 원을 오르내리고 있다. 종합 주가 지수는 지난 3개월 동안 33%나 올랐다. 올해 10월까지 무역 흑자 누적액은 3백20억 달러에 이르렀다.

외환 위기의 직접 원인이었던 가용 외환 보유고 부족도 말끔히 해결되었다. 가용 외환 보유고는 4백50억 달러를 넘었다. 지난해 말 국제통화기금에 4백50억 달러를 축적하겠다고 약속한 사항을 앞당겨서 이행한 것이다. 이자율도 크게 떨어졌다. 올해 1월 26%까지 치솟았던 3년 만기 회사채 금리는 11월 초 9.5%까지 떨어졌다.

미국 경제예측기관인 와튼계량경제연구소(WEFA)의 라하 애런 연구원은 “대외 신인도를 높이고 외국인 투자를 끌어들이려는 노력 덕분에, 외국인 투자가들이 한국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10월 외국인 직접 투자 승인액은 8억9천4백만 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해 147.6%나 증가했다. 투자 유형 별로 보면 국내 기업의 주식을 매입하는 방식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올해 들어 10월까지 승인된 외국인 투자 1백2건 (천억 달러) 가운데 주식 매입을 통한 외국인 투자는 10억3천 달러로 18.6%에 이른다.
■기업 구조 조정은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가?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 산하 연구기관인 DRI는 한국 정부가 기울이는 기업 구조 조정 노력을 높이 평가하지만, 그 성과가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신용이 경색된 뒤 중견 재벌들이 살아 남기 위해 구조 조정에 박차를 가하고 있지만, 덩지 큰 재벌들은 쉽게 돈을 빌릴 수 있게 되자 구조 조정을 등한히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한국 정부는 재벌이 시중 자금을 독식하는 것을 막기 위해, 부채가 많은 기업이 발행한 회사채를 금융기관이 일정량 이상 보유하는 것을 제한하는 규제안을 발표했다. 또 재벌들이 부채 비율을 줄이도록 압력을 가하고 있다.

와튼계량경제연구소 애런 연구원은 9월의 기업 부도율이 지난 19개월 동안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했다는 데 주목한다. 지난 2월 부도 기업은 3천3백77개였으나 9월에는 1천86개였다. 기업 부도율이 줄었다는 것은 경기 침체에 시달리는 한국 경제에 희소식이다.

■금융 개혁은 얼마나 진척했나?

애런 연구원은 한국 금융 개혁의 방향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한다. 금융감독위원회가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시중 은행 22개가 올해 상반기에 6조2천억원 손실을 보았으나, 외국 은행 한국 지점은 5천1백33억원 순이익을 냈다. 따라서 재무 구조가 부실한 은행을 합병한다고 해서 경쟁력 있는 우량 은행이 만들어진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 와튼계량경제연구소의 분석이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금융 개혁의 주요한 방안으로 은행간 합병을 강요하고 있다. 애런 연구원은 “한국 정부는 은행들이 독자적으로 건실한 경영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의 데비 오로라 연구원은 “한국 정부가 금융 개혁을 위해 벌이는 의지는 높이 사지만, 은행을 비롯해 일선 금융기관에서 정책 효과가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고 있다”라고 말했다.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가 유심히 관찰하는 것이 서울은행과 제일은행 처리이다. 한국 금융기관 실패의 대표 사례로 손꼽히는 이 두 은행 문제는 1년이 지나도록 가닥을 잡지 못한 채 시간만 끌고 있다.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는 기아자동차와 함께 이 두 은행의 처리 결과가 한국의 신용 등급을 결정짓는 관건이라고 지목했다.

미국 신용평가기관 무디스는 오히려 부실 은행을 인수한 우량 은행의 신용 등급을 하향 조정할 뜻을 밝혔다. 무디스는 부실 은행을 인수한 신한·한미·주택·국민·하나 은행을‘안정’에서‘부정적’으로 내려 감시 대상에 올려놓았다.
■국가 신용 등급, ‘투자 부적격’에서 ‘투자 적격’으로 언제 바뀌나?

국가 신용 등급은 한 나라가 짊어진 빚을 갚을 수 있느냐, 또 빚을 갚을 의지가 있느냐를 등급으로 나타낸 것이다. 외국 투자가들은 투자 여부를 결정할 때 신용 평가 기관이 내린 평가에 절대적으로 의존한다. 한국 정부가 국가 신용 등급을 대표하는 외국환평형기금 채권과 한국산업은행 채권의 신용 등급을 높이려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자면 한국 경제의 앞날은 밝다.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는 멀지 않아 한국의 국가 신용 등급을 투자 부적격인 BB+에서 투자 적격인 BBB-로 올리려 하고 있다. 제일·서울 은행 매각 협상이 원만하게 진행되어 성과가 나타나면 곧 신용 등급을 상향 조정할 태세이다.

외국 신용평가기관이 한국 경제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보고서를 잇달아 발표하자, 외국인 투자가들이 국내 기업의 주식을 대거 매입해 최근 주식 시장이 활기를 띠고 있다. 외국인 투자가들은 한국의 국가 신용 등급이 곧 높아질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한 예로 홍콩 상하이 은행은 한국의 국가 신용 등급이 6∼9개월 이내에 상향 조정될 것이라고 내다본다. 월 스트리트 투자자들은 이미 그 조짐을 알아채고 미리 국내 기업 주식을 사두려는 움직임을 보여 최근의 주가 상승을 주도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의 신용평가기관인 무디스는 한국 경제에 대한 장밋빛 전망을 경계한다. 지난 11월 3일 무디스가 한국에 파견한 조사단은 재경부·한국은행·금융감독위원회를 둘러보고 외환 사정과 금융·기업 구조 조정 추진 상황을 집중 점검한 바 있다.

무디스는 한국 경제가 나아진 것은 분명하지만, 국가 신용 등급을 높이기에는 시기 상조라고 평가했다. 한국의 경제 여건은 외부 요인, 즉 일본 엔화와 중국 위안화의 변동에 따라 크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일본과 중국의 경제 여건이 불안하기 그지없다는 것이다.

■경기 침체, 얼마나 오래갈 것인가?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의 오로라 연구원은 “주요 경제 지표가 뚜렷하게 회복되고 있지만 한국 경제가 아직 경제 위기의 숲을 빠져나오지는 않았다”라고 평가했다. 그는 한국의 주요 산업이 경기 침체에 타격을 많이 받고 있다고 덧붙였다.

올해 3/4분기까지 한국의 월 평균 산업 생산률은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해 9% 포인트 줄었다. 수출 물량이 눈에 띄게 늘었다고 하지만 수출 금액은 오히려 줄었다. 1∼10월 달러화 수출액은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해 2.7%나 떨어졌다.

내수도 침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실업률이 지난 9월 8.4%까지 치솟은 데다 임금이 크게 깎여 소비 수요가 줄어든 것이 직접 원인이다.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는 이 추세가 내년까지 계속될 것이며, 2000년에 들어서야 성장세를 회복하리라고 평가했다.

와튼계량경제연구소 애런 연구원은, 경기 침체의 구름이 서서히 걷히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이자율이 지속적으로 떨어져 투자와 소비 수요의 위축세가 멈출 것이라고 평가한다. 사실 실업률은 9월 이후 조금씩 떨어지고 있다. 사회 간접 자본 투자가 늘어난 데다 가을 추수기를 맞아 임시직 노동자 고용이 늘면서 실업자 수가 다소 줄어든 것이다. 9월 실업자 수는 1백57만2천 명이었다. 애런 연구원은 올해 초 46만9천명이었던 것과는 큰 차이를 보이지만, 그나마 실업자가 느는 기세를 누그러뜨렸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와튼계량경제연구소는 한국 통계청 발표를 인용하면서 산업 생산이 올해 9월 들어 처음으로 증가했다고 지적했다. 9월 산업 생산률은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해 0.3% 포인트 늘었다. 경제 위기 이후 산업 생산이 처음으로 늘어난 것이다. 하지만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해서는 9.2% 포인트 가량 떨어졌다. 와튼계량경제연구소는 한국 경제가 빠른 시일 안에 경기 침체 늪에서 벗어나, 경제 위기 전 수준까지는 회복되기는 힘들겠지만, 침체에서 벗어날 가닥을 잡았다고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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