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DI, 개혁 산실로 거듭나는가
  • 張榮熙 기자 ()
  • 승인 1998.04.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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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말 ‘국가 청사진’ 제시 기관으로 변할 듯… 제 목소리 강해 재경부와 갈등도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정기 이사회가 열린 3월10일 충격에 휩싸였다. 자신들과 성향이 너무 다른 원장이 취임한다는 ‘비보’ 를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새 원장은 첫 호남 출신에다 숭실대 교수로 일해 온 40대 젊은 원장이었다. 50대 선임연구위원급 고참 박사들은 옷을 벗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장감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한 연구위원은 “새 원장은 한마디로 우리와 다른 세상에 살던 사람이다. 정권이 바뀌지 않았다면 상상할 수 없는 일 아니냐. 비제도권 개혁파라는 그의 입지와 성향이 일파만파를 일으킬 것이라고 걱정하는 동료가 많았다”라고 털어놓았다.

이진순 원장(48)이 취임하고 나서 한 달이 지난 요즘 한국개발연구원은 바깥 사람들에게 상당히 변화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한국개발연구원이 과거 어느 때 보다 큰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정부를 정면 공격하는 듯한 연구 보고서도 적지 않다. 가령 구조 개혁이 실패하면 남미형 장기 불황에 빠질 것이라고 강력히 경고하며 개혁을 촉구하는 것이 좋은 예이다. 구조 개혁만이 살길이라고 외치던 여권과 정부가 3월 들어 정책 우선 순위를 금융 개혁이 아닌 실업 문제로 급선회한 것을 비판한 것이다. 한 연구위원은 “3월 들어 나온 일련의 연구 보고서들은 올해 초부터 준비한 것이다. 연구원들 사이에서는 우리가 제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위기 의식이 높고, 원장도 이를 적극 지원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이원장, 새로운 연구 과제로 연구원들 몰아쳐

이원장과 연구원 박사들은 지난 한달 동안 같은 배에 타기 위해 적잖이 부딪친 것으로 알려졌다. 이원장이 27년 역사와 전통을 가진 이 연구원의 조직 문화나 ‘정책 연구’ 라는 일 성격에 걸맞는 인식이나 경험이 없다 보니 다소 갈등이 불가피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엄봉성 부원장은 “시장 경제를 지향하고, 개혁에 대한 강한 열정을 갖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면서 차이를 느끼지 못하게 됐다” 라며, 현재 갈등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원장이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연구 과제를 주며 연구원들을 몰아치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다소 다른 시각이 있다. 한 연구위원은 “원장이 의욕적인 것은 연구 결과를 핵심 정책 결정자에게 제대로 전달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것이어서 좋은 일이다’라고 보았다. 반면 현실 감각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을 경우 이원장의 의욕 자체가 위험할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이에 대해 한 연구위원은 원장이 개혁에 대한 마스터 플랜과 실행 계획을 2주일 만에 만들어 보자고 주문한 것을 예로 들었다. 이 연구위원은, 개혁은 매우 치밀하고 체계적인 시스템을 구축해야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이 작업에는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다며,

개혁은 개혁 마인드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어느 정부보다 개혁 마인드가 높았던 문민 정부의 개혁이 왜 실패로 끝났겠느냐고 반문했다.

이윈장은 취임 후 한 달도 되기 전에 소속 부처인 재정경제부와도 미묘한 신경전을 벌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원장이 취임사에서 제 목소리를 내 정책 형성 과정에서 능동적이고 주도적인 역할을 하겠다고 밝힌 대목들이, 연구기관을 수족쯤으로 생각하는 관료들에게 껄끄럽게 느껴진 것이다. 이 싸움은 대리전 양상으로 나타났다. 4월3일 연구원이 낸 올해 경제 전망 보고서에 대해 한 신문이 엉터리 내용이 수두룩하다고 질타한 것이다. 이에 대해 연구원측은 경제 상황이 워낙 불투명해 전망 작업이 계속 지연되는 바람에 마지막까지 챙기지 못해 일부 숫자 등에서 실수가 있었다는 점을 시인하면서도, 기사 내용이 언론 스스로 발견할 수 있는 수준을 넘는다며 재경부가 보복을 위해 사주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정부의 시녀’ 오명 벗을까

한 연구위원은 “연구원이 그동안 소속 부처인 재경부 중심으로 일을 해오다가, 원장이 고객의 범위를 모든 경제 관련 부처로 넓히고 자기 목소리를 강조하다 보니 이런 미묘한 갈등이 빚어진 것으로 안다”라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또 관료들이 비제도권 개혁파 학자인 이원장이 자기네를 수구 세력으로 보는 데 대한 경계 심리도 작용한 것 같다고 분석 했다.

연구원 박사들은 대체로 앞으로 이원장의 역할에 대해 강한 기대감을 드러냈다. 우선 연구 결과가 정책 결정 과정에 많이 반영되도록 해야 한다는 주문이 많았다. 이런 주문이 나오는 배경에는, 그동안 정부를 비판하고 정책 방향을 유도하는 보고서를 많이 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은 데에 대한 무력감이 깔려 있다. 원장의 정치력이 결국 최고 통치자와의 거리에서 나온다는 점에서 DJ 정권의 실세 가운데 하나인 이원장에게 기대가 큰 것이다.

나아가 한 연구위원은 이 기회에 연구원의 역할과 정부와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자리매김이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연구원이 최종 고객인 국민을 위해 어떤 기능을 해야 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정부의 논리를 앵무새처럼 대변하는 관변단체이자, 정부의 시녀라는 일각의 부정적 인식을 염두에 둔 주장이기도 하다.

이 기대는 4월 말에 뚜껑이 열릴 정부 출연 연구소 정리 작업에서, 한국개발연구원이 어떻게 정리되는가 하는 문제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앞으로 한국개발연구원은 소속 부처가 청와대나 기획예산위원회 등으로 바뀌고, 기능도 경제 정책 연구기관에서 국가 운영 청사진과 비전을 제시하는 기관으로 전환될 공산이 크다. 다른 연구 기관과 겹치는 경제 관련 분야는 일부 떼어내는 등 이 과정에서 기관 자체가 구조 조정될 것으로 관측된다.

현재 한국개발연구원은 연구 인력이 1백31명(현인원 1백84명)이며, 박사 학위를 가진 고급 두뇌가 48명이나 되는 국내 최대의 국책 연구기관이다. 종합적 경제 연구 기관으로 세계적으로도 이름이 나 있다. 올해 예산 1백6억원(본원 기준) 가운데 국민이 낸 세금(정부 출연금)이 93%(98억원)나 된다. 한국의 대표적 국책 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이 개혁의 산실이 될 수 있을까. 앞으로 기관의 역할과 위상이 어떻게 변화할지 사회적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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