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휘장’ 들추니 낯익은 얼굴
  • 고제규 기자 (unjusa@sisapress.com)
  • 승인 2003.05.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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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정·관계 인사 줄소환 ‘초읽기’…기념품 사업 등 ‘비리 커넥션’ 밝혀내
서울지방검찰청 특수 1부 검사들은 지난 5월9일 가장 긴 하루를 보냈다. 다섯 달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을 들인 수사의 성패가 결정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이 날 오후 2시, 서울지방법원 강형주 영장전담판사는 특수1부가 청구한 월드컵 조직위원회 김용집(65) 전 사업국장에 대한 영장 실질 심사를 벌였다. 법원은 밤늦게 구속 영장을 발부했다. 검찰은 김씨가 월드컵 휘장사업과 관련해 CPP코리아 김 아무개(37) 전 대표로부터 8천만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했다.

이에 앞서 검찰은 지난 4월25일 김국장에 대해 구속 영장을 청구했지만 기각당했다. 당시 검찰 관계자는 “첫발이 헛발질이 되었다. 수사가 난항을 겪고 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김국장이 구속되면서 검찰 수사가 속도를 내고 있다. 월드컵 휘장 사업에 관련된 정·관계 인사들 줄소환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서울지검 특수1부는 소속 검사 4명 전원을 투입해 월드컵 휘장 사업에 얽힌 비리 커넥션을 파헤칠 작정이다. 월드컵 휘장 사업 비리는 캐면 캘수록 줄줄이 따라 나오는 고구마 줄기와 같다는 것이 검찰쪽 분위기다.

비리의 뿌리는 3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CPP는 국제축구연맹(FIFA)의 공식 마케팅사인 ISL의 자회사인 영국의 CPLG(51%)와 홍콩의 PPW(49%)가 합작한 회사다.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 49개국을 대상으로 한 판권을 소유했다. 휘장 사업권은 의류나 열쇠고리 등 기념품에 월드컵 엠블럼과 마스코트를 사용할 수 있는 권리다. 공식 파트너(오피셜 파트너)·공식 공급업체(로컬 서플라이어)와 함께 국제축구연맹의 3대 마케팅 사업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월드컵 휘장 사업권을 가지면 국제축구연맹을 대신해 라이선스 모집을 대행하고, 주문제작 방식(OEM)으로 월드컵 관련 상품을 생산 유통시킨다. 조직위원회나 개최 도시·관공서를 상대로 기념품과 홍보물을 공급하는 프리미엄 영업권을 가지며, 경기장으로부터 반경 2km 이내에서 판매권까지 독차지한다. 그래서 업계에서는 휘장 사업권을 5천억원대 수익이 보장되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불렀다.

하지만 황금알을 낳는 거위는 첫걸음부터 비틀댔다. 휘장 사업권을 가진 CPP 코리아의 김 아무개 대표이사가 사업권을 미끼로 사기 행각을 벌인 것이다. 김씨는 디즈니 캐릭터를 생산하는 홍콩 PPW 사의 한국 대리인이었다. PPW 아이반 찬 사장은 ISL사와 공식 계약을 맺는 2000년 12월까지 월드컵 휘장 사업과 관련한 계약을 일절 맺지 말라고 김씨에게 경고했다. 하지만 김씨는 이를 무시하고 계약을 남발했다.

2001년 9월7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있는 CPP 사무실을 조직폭력배들이 덮쳤다. 겉으로는 CPP코리아와 한 의류업체가 맺은 대금 3억원을 받는다는 명목이었지만, 실은 사업권을 포기하라는 무력 시위나 다름없었다. 서울 총판 G&B의 서 아무개 전무가 알렉스 로마의 뺨을 때렸고, 군산 출신 조폭 ㅇ씨는 가위로 자신의 목을 그으며 자해했다. 9월 말 알렉스 로마는 ‘한국은 갱스터가 판쳐서 사업을 추진할 수 없다’며 홍콩으로 출국했다. 그는 국제축구연맹에 정식으로 항의하겠다고 엄포를 놓아 외교 문제로까지 비화했다. 폭력 사태가 터지자, 영국 CPLG사는 홍콩의 PPW 사에 지분을 모두 넘겼다. 홍콩의 PPW 사도 한국에서 손을 떼려 했다. 폭력 사태를 일으킨 장본인들은 이같은 사태 전개에 대해 외국인으로부터 국내 휘장 사업권을 되찾은 애국 행위라며 떠벌리고 다녔다.

폭력 사태로 월드컵 휘장 사업은 공중에 붕 떠버렸다. 이때부터 휘장권 쟁탈전이 본격화했다. 홍콩의 PPW 아이반 찬 사장은 엔터테인먼트 회사인 ㄷ사에 경영권을 넘길 작정이었다. 그러나 월드컵조직위원회가 이 과정에 제동을 걸었다. 조직위원회는 ‘코오롱TNS+G&B’를 강력하게 밀었다. 결국 2002년 1월, 월드컵 휘장 사업권은 CPP코리아에서 코오롱TNS로 넘어갔다. 이 과정에서 100억원대 자금이 코오롱TNS에서 CPP로 건네졌다는 소문이 업계에 파다하게 나돌았다.

2차 사업권자로 선정된 코오롱TNS는 관광회사다. 이 회사 이동보 회장은 코오롱그룹 이동찬 명예회장의 이복 동생이다. 1988년 코오롱에서 분가해 코오롱고속관광을 차렸고, 회사 이름을 코오롱TNS로 바꾸었다. 이 회사는 코오롱그룹과는 무관한데도 월드컵조직위원회는 2001년 12월12일자 국제축구연맹에 보낸 공문에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코오롱TNS는 코오롱그룹의 자회사로 88년 서울올림픽과 93년 대전엑스포 행사시 라이선스 경험이 있다.’ 이는 명백한 거짓이다. 나중에 이 사실이 문제가 되자 월드컵조직위원회는 “코오롱TNS가 보낸 공문을 검토하지 않고 그대로 국제축구연맹에 전달했다”라고 해명했다.

2002년 1월, 월드컵을 코앞에 두고 코오롱TNS가 휘장사업 새 사업권자로 나섰다. 그러나 이때부터 코오롱TNS는 기업어음(CP)을 남발했고, ‘6천억원 매출과 8백억원의 순이익’이 예상된다며 과장 홍보했다. 코롱TNS는 지난해 8월 월드컵이 끝나자마자 부도 났다. 코오롱TNS가 부도 나면서 주문 생산 수주를 했던 영세 기업들이 연달아 부도를 맞았다. 당시 업계에서는 코오롱TNS가 고의로 부도를 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았다. 그만큼 월드컵 휘장사업은 복마전이었던 셈이다. 2차 사업권자인 코오롱TNS 이동보 회장은 분식회계 혐의로 지난 3월 구속되었다. 1차와 2차 사업권자가 모두 쇠고랑을 찬 것이다.

검찰은 두 번에 걸친 월드컵 휘장 사업권 선정 과정에서 정·관계에 광범위한 로비가 진행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제 검찰의 칼날은 정·관계 인사를 겨냥하고 있다. 김용집씨 구속은 그 신호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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