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계장 아들의 존속 살해 사건 진상
  • 부산. 주진우 ()
  • 승인 2003.09.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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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찌른 ‘반듯한 청년’
“통닭 한 마리 사온나. 둘이서 맥주나 한잔 하자. 아부이는 당직이다.” 9월15일 밤 9시45분. 동네 독서실에서 공부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던 박승철씨(26)는 어머니 김 아무개씨(46)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잠시 후 거실에서 조촐한 통닭 파티가 벌어졌다. 어머니는 맥주를 마시고, 아들은 백세주 두 병을 소주와 섞어 ‘오십세주’를 만들어 마셨다.

두 모자는 오랜만에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공부하느라 힘들제. 시험은 잘 쳤나?”어머니는 며칠 전 박씨가 본 공무원 시험에 대해 물었다. 현직 형사계장 아버지(53)와 뒤를 이어 경찰의 길을 걷기 시작한 동생 등 가족 이야기로 박씨와 어머니는 시간 가는 줄 몰랐다. 10시30분에 시작된 술자리는 12시30분이 되어서야 끝났다.

술자리가 끝난 뒤, 어머니는 평소와 달리 아들이 쓰던 작은방에 이부자리를 폈다. 텔레비전을 보겠다며 박씨가 안방을 먼저 차지했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을 보던 박씨는 친하게 지내던 독서실 후배 정재석씨(25)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전 1시30분이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 “술 한잔 먹게 나온나.” 박씨의 목소리가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아 후배는 박씨가 술을 먹은지도 몰랐다고 한다.

전화를 끊은 박씨는 갑자기 복숭아 생각이 간절했다. 부엌으로 간 박씨는 과도는 찾았지만 복숭아는 찾지 못했다. 안방으로 돌아온 박씨는 이불 위에 누워 과도로 다리를 긁적이며 텔레비전을 보았다. 그리고는 잠이 들었다.

“정신 차려보니 내가 칼을 들고 있었다”

박씨가 정신을 차려보니 어머니가 피를 흘리고 있었다. 자신의 손에는 칼이 들려 있었고 옷에도 피가 흥건하게 묻어 있었다. 경황이 없었지만 박씨는 증거를 없애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박씨는 화장실로 가 샤워를 했다. 그리고 작은방과 안방 등에 라이터로 불을 지르고 뛰쳐나왔다.

박씨는 공중 전화에서 수신자 부담으로 정재석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기 전화기를 미처 챙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 사고쳤다. 엄마 죽였다. 불도 질렀다.” 이번에는 박씨의 목소리가 심각했다. 재석씨가 “뭔 소린교”라며 물었지만 전화는 이내 끊겼다. 재석씨가 걸려온 번호로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고, 박씨의 전화도 연결되지 않았다. 그때가 오전 2시40분이었다. 재석씨는 “당시에는 술에 취해 괜한 소리를 한다고 생각해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이후 박씨는 동네 PC방에 갔다. 박씨는 애인 박 아무개씨(25)에게 ‘미안하다. 너에게 해결해 줘야 될 거 한두 가지도 아닌데 이렇게 마지막 메일을 보내는 게…’라고 시작하는 e메일을 보냈다. 또 아버지와 동생에게 은밀하게 전해 달라며 e메일 한 통을 더 썼다. 그리고는 자리에 엎드려 잠에 빠져들었다. 당시 PC방에서 카운터를 보았던 배의성씨(29)는 “약 4시간 가량 PC방에서 있으면서 박씨에게서 눈에 띄는 점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박씨는 과도로 어머니를 무려 마흔일곱 번이나 찔러 숨지게 했다. 부검에 참여한 한 관계자는 “피의자가 휘두른 첫 번째 칼날이 정확히 심장을 관통했다. 숨을 거둔 이후에 피의자는 피해자의 가슴 부위를 10여 차례 찔렀고, 오른쪽 옆구리 주변을 30여 번 더 찌른 흔적이 보인다”라고 말했다. 또 범행을 은폐하기 위해 지른 불로 인해 시체 일부가 훼손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사건 초기 정신병자의 소행에 무게를 두었다.

그러면 박씨는 왜 이토록 잔인하게 어머니를 살해한 것일까. 부산대 법학과를 휴학하고 행정고시를 준비하던 박씨는 성실한 청년이었다. 그는 집안 사정이 넉넉한 편이었지만 독서실 총무로 일하며 열심히 공부했다. 성적도 좋았다고 한다. 시간이 나면 절을 찾는 독실한 불교 신자이기도 한 그는 대인 관계도 원만했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사귀어온 애인과의 사이도 좋았다. 지난 9월2일 박씨의 생일날 애인은 선물과 편지를 준비하고 핸드폰에 자신의 스티커 사진을 붙여주었다. 후배 재석씨는 “형은 사람이 착해 손해를 잘 보는 편이었다. 친구들에게 인기도 좋고 문제도 없었다”라고 말했다. 박씨네 아래층에 사는 정희남씨(65)는 “인사 잘 하고 공부 잘 하고, 뭐 하나 지적할 것이 없는 반듯한 청년이었다”라고 말했다.

술 마시면 기억 자주 잊어버려

가정 불화도 없었고 어머니와의 갈등은 더더욱 없었다. 박씨의 한 친구는 “아버지에게 말하기 어려워했고, 취직을 못해 눈치를 보는 편이었다. 하지만 심한 강박 관념은 없었다”라고 말했다.

경찰은 박씨가 평소 술을 마시면 자신이 한 행위를 기억하지 못하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박씨는 경찰에서 “평소 술을 먹으면 영화에서처럼 칼로 사람을 찌르거나 총을 쏘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했다. 그 날은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라고 진술했다. 그렇다면 술이 사람을 잡은 것일까. 하지만 박씨의 친구들은 박씨가 그날 주량을 넘겨 마신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박씨의 주량은 소주 서너 병이다. 또 박씨가 술을 마시면 간혹 기억을 못할 때가 있지만, 술을 먹고 사고를 내거나 큰 실수를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했다.

사건의 윤곽은 어느 정도 드러났지만 사건이 왜 발생했는지는 아직 미궁에 빠져 있다. 담당 경찰도 “이유 없는 무덤이 생겼다”라며 답답해 하고 있다. 경찰은 앞으로 박씨의 살해 동기를 밝히는 데 수사력을 집중하면서 박씨에 대한 정신 감정을 실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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