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사들 반란 “힘들어 못 날겠소”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1999.12.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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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 합법화 위해 법정 투쟁… 혹사·외국인 조종사와 차별 대우가 화 돋워
조종사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한국민간항공조종사협회(ALPA-K)는 창립 1년 만인 지난 12월2일 건설교통부로부터 정식으로 사단법인 설립 인가를 받았다. 협회에는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조종사 2천여 명 가운데 7백여 명이 가입했다.

대한항공 조종사들은 노동조합(대한항공승무원노조) 합법화를 위해 법정 싸움을 벌이고 있다. 지난 8월31일 노조 설립 신고서를 냈던 이들은 ‘조종사는 청원 경찰 신분이므로 노조를 결성할 수 없다’며 노동부가 이를 반려하자 다시 행정 소송을 제기했다. ‘조종사가 승객에 대한 감시나 경비 따위 청원 경찰 업무를 실질적으로 수행하고 있지 않을 뿐더러, 청원 경찰 신분을 내세워 헌법에 보장된 노동3권을 제약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것이 노조의 주장이다.

회사의 안전 운항 프로젝트는 ‘그들만의 쇼’

왜 집단 행동인가. 군 출신이 많고, 엘리트 의식이 강하며, 조직 문화가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조종사들이 집단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과거 같으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 상황은 급변했다.

97년 8월 발생한 괌 항공기 추락 참사가 분기점이었다. “당시 조사에 참여해 조종사 과실이 사고 원인이었음을 파악하고 돌아온 한 회사 간부가 조종사들을 모아 놓고 ‘너희들은 밥벌레’라고 질책하는데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조종사가 왜 그런 실수를 하게 되었는지, 근무 환경에 문제가 있지는 않은지 살피기는커녕 조종사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려는 회사측 행태에 분노가 일었다”라는 것이 10년차 부기장의 말이다.

조종사 노조의 한 간부는, 이같은 분노가 노조를 만드는 촉발제가 되었다고 말했다. 불법 노조인데도 노조를 띄운 지 한 달 만에 대한항공 소속 내국인 조종사 1천5백여 명 가운데 1천2백여 명이 노조에 가입한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는 것이다. 조종사 노조는 임금 인상이나 처우 개선에 앞서 ‘안전 운항 여건 확보’를 최우선 목표로 내세우고 있다.

이는 항공사의 목표와도 일치한다. 특히 올해 들어서만도 3월 포항항공 활주로 이탈 사고, 4월 중국 상하이 상공 화물기 폭발 사고를 잇달아 겪은 대한항공은 ‘한 번만 더 사고가 나면 끝장’이라는 위기 의식을 갖고 있다. △외국 유명 항공사에 컨설팅 의뢰 △조종사 위탁 교육 실시 △첨단 장비 장착 △노후 항공기 교체 및 첨단 항공기 지속 도입 등 안전 운항을 위해 2천억 원을 투자하고 있다는 것이 대한항공의 설명이다.

문제는 조종사 상당수가 이같은 회사의 노력을 ‘그들만의 쇼’로 치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안전 운항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조종사가 평상심을 잃지 않고 조종 업무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해 주는 것’이라고 한국민간항공조종사협회 이중희 회장(전 아시아나항공 기장)은 말한다. 그런데 회사의 개혁 조처는 조종사의 신체적·정신적 부담을 전혀 덜어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장 두드러진 쟁점이 비행 시간이다. 국내 항공사가 악명 높았던 것은 비행 시간을 계산하는 방식 때문이었다. 한 예로 서울-로스앤젤레스를 왕복할 때는 조종사 4명이 항공기에 탄다. 2개 조로 나뉜 이들이 교대로 조종을 맡게 되는데, 이때 휴식을 취하는 시간은 비행 시간에 포함하지 않는 것이 관행이었다. 다시 말해 서울-로스앤젤레스를 오가는 데 24시간이 걸렸다면, 이 중 12시간만 비행 시간으로 인정한 것이다.

이같은 계산 방식이 자칫 과도한 비행 근무로 이어져 피로를 누적시키는 요인이 되어 왔다는 점을 항공사측은 부인하지 않는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대한항공은 지난 10월1일부터 이른바 미국 연방항공규정(FAR)에 따른 비행 시간 기준을 도입했다고 밝혔다. 새 기준에 따르면, 조종간을 잡고 있었든 뒤에서 쉬었든 비행에 참여한 시간은 모두 비행 시간으로 인정된다.

이러한 계산 방식이 10월 이전에 비해 진일보한 것임은 조종사들도 인정한다. 문제는 새 기준을 도입한 뒤 오히려 피로가 가중되었다는 불평이 제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조종사 노조는 편승 시간이 늘어난 데서 주된 이유를 찾고 있다. 편승이란 임무를 수행할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조종사가 승객 또는 여분의 승무원 자격으로 객실에 앉아 가는 것을 말한다. 편승 시간은 비행 시간에 포함되지 않는다.

편승 증가는 1차적으로 새 기준을 도입한 데 따른 것이다. 예를 들어 서울에서 로스앤젤레스에 갈 때는 11시간이 걸리지만, 돌아올 때는 기류 영향으로 13시간 가량 걸린다. 예전 같으면 이 구간에는 승무원 4명을 투입했다(보통 비행 거리가 4시간 이상이면 2명, 8시간 이상이면 3명, 12시간 이상이면 4명을 배치한다). 4명이 2개 조로 24시간 동안 다녀와도 비행 시간은 12시간밖에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새 기준을 도입한 뒤 이렇게 했다가는 월간 총비행 시간이 급증해 승무원 수급에 차질이 생긴다(월간 총비행 시간은 100∼120 시간으로 제한되어 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서울-로스앤젤레스 구간의 경우 갈 때는 3명, 올 때는 4명으로 조를 이루는 방식이다. 이렇게 되면 일반적으로 여분의 조종사를 편승시켜 돌아올 때 이들을 조종석에 합류시키게 된다.

때로는 조종사 4명을 ‘들러리’로 태우고 갔다가, 귀환할 때 조종팀 전원을 교체하기도 한다. 이로써 항공사가 얻을 손익은 아래 <표>에 정리되어 있다. 편승 시간이 비행 시간에 포함되지 않는 현행 방식대로라면, 조종사 7명이 서울-로스엔젤레스를 왕복했을 때 비행 시간은 85시간이다. 그런데 만약 편승 시간을 비행 시간에 포함한다면 비행 시간은 무려 1백68시간으로, 2배 가까이 늘어난다.3명이 조종하는 비행기에 ‘들러리’가 6명

‘뜨는 횟수=돈’이라는 항공기. 따라서 총비행 시간을 어떻게든 줄여 보려는 회사측의 얄팍한 수로 인해 편승이 급증하고 있다는 것이 부기장 ㅈ씨의 지적이다. 이에 대해 회사측은 편승이 일부 구간에서 극히 제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편승 수당 또한 조종사에게 지급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특정 구간에서 편승은 상당히 만연해 있는 현상으로 나타났다. 새 기준이 도입된 지난 10월 첫째 주 서울발 로스앤젤레스행(직항 노선) 보잉 747-400기 승무원 일정표를 보면, 전체 승무원 가운데 38%가 편승 승무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상황은 11월에도 개선되지 않아 총운항 횟수 81회 중 승무원을 편승시킨 횟수가 60회에 이르렀다. 편승 승무원은 한 기당 3~4명이 보통으로, 때로는 3명이 조종하는 비행기에 편승 인원만 6명이 따라간 경우도 있었다(11월5일 오후 7시7분발, 11월16일 오후 7시발).

편승이 문제가 되는 것은 피로를 누적시키기 때문이라고 조종사들은 입을 모은다. ‘객실에 편히 앉아 가는데 무슨 피로냐’고 반박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피로는 조종석이냐 객실이냐에 따라서가 아니라 시차에 적응해야 하는 데서 극심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편승 시간을 비행 시간에 포함해 엄격하게 규제해야 한다는 것이 민간항공조종사협회의 주장이다.

이에 대해 항공사측은, 편승 시간을 비행 시간에 포함하지 않는 것은 미국도 마찬가지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미국은 땅덩어리가 넓은 만큼 자기 거주지에서 근무지까지 1∼4시간 이동하는 것을 편승 개념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조종사 노조의 반박이다. 이에 반해 편승 한 번이면 대륙을 건너 10시간 이상을 이동해야 하는 한국 조종사에게는 다른 기준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비행 시간 다음으로 문제가 되는 것이 불합리한 비행 일정이다. 서울-뉴욕을 다녀온 지 이틀 만에 또다시 서울-뉴욕-앵커리지-서울(4박5일) 비행을 떠나야 했던 20년차 기장의 일정표는 ‘사람 잡는’ 일정의 전형을 보여준다. 잦은 일정 변경 때문에 밤 늦게까지 통음한 다음날 아침 대타로 술이 덜 깬 채 비행기를 타는 일도 있다는 것이 부기장 ㄱ씨의 증언이다. 괌 추락 사고를 낸 기장은 비행 하루 전날 일정이 바뀐 사실을 통보받았다.

초과 수당, 외국인 기장의 7분의 1 수준

외국인 기장과 한국인 기장 사이의 임금 격차도 안전 운항을 가로막는 요소이다.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을 합쳐 외국인 기장의 월 평균 급여는 1천5백60만 원 수준으로 한국인 기장 평균(4백40만 원)의 4배 가깝다. 급여보다 문제가 되는 것이 초과 비행 수당이다. 외국인 기장의 초과 비행 수당은 시간당 15만6천 원으로 한국인 기장(2만3천 원)보다 7배 가량 많다.

급여 차등에 따른 사기 저하도 문제지만, 초과 비행 수당에 이처럼 큰 차이가 있다 보니, 초과 근무가 한국인에 집중되어 조종사를 혹사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이 민간항공조종사협회의 주장이다. 이에 대해 회사측은 외국인 기장을 채용할 때는 상대 나라 기준에 맞추어 급여를 높게 산정할 수밖에 없으며, 계약에 따라 이들에게 매달 10∼11일 쉬게 해 주어야 하므로 초과 근무를 시키기 어렵다고 밝혔다.

지난 11월3일 미국 교통안전위원회(NTSB)는 97년 8월 발생한 대한항공 801편 괌 추락 사고의 주된 원인이 ‘조종사의 실수 및 피로’였다고 결론지었다(43쪽 기사 참조). 사고 원인에 이례적으로 피로가 언급되었는데도, 조종사들의 근무 여건은 사고 때나 지금이나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는 것이 이중희 회장의 지적이다.

조종사들의 잇단 ‘반란’이 관심을 끄는 이유는 자명하다. 무엇보다 이들은 안전 운항을 최일선에서 책임지는 주체일 수밖에 없다. 피로와 사기 저하를 호소하는 이들의 목소리에 정면으로 화답하지 않는 이상 항공사는 ‘눈가림식 개혁’에 치중한다는 의혹을 비켜가기 어려울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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