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 계약에 멍든 북한 영화 수입
  • 이병철 기자 (naviger@sisapress.com)
  • 승인 2000.03.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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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업체 IMS·SN21 모두 소유권 주장…북한, 이중 계약해 혼란 불러
김대중 정부가 추진한‘햇볕 정책’덕택에 북한 영화가 국내에 들어올 길이 열렸으나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혀 햇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국내 업체들이 1998년부터 앞다투어 북한 영화를 수입하고 있으나 저작권 소재를 둘러싸고 아귀다툼을 벌이다 보니, 국내에 반입한 북한 영화는 세관에 묶여 있고 판권 계약을 맺은 영화들도 국내에 들여올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북한 영화 수입 업체인 IMS가 판권 계약을 맺은 북한 영화는 100여 편. SN21도 재일 동포가 운영하는 일본 업체로부터 북한 영화 판권을 확보하고 있다. PD연합회 등이 비영리 목적으로 반입한 영화도 10편 가량 된다. 하지만 국내에 방영된 북한 영화는 몇 편 되지 않는다. <임꺽정> <온달전> <도라지꽃> <사랑 사랑 내 사랑> 정도가 방영되는 데 그쳤다. 북한 영화 시청률이 의외로 낮아 최대 수요자인 국내 방송사들이 방영을 꺼리는 것이 원인이기도 하지만, 국내 수입 업체들이 저마다 판권을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소송을 벌이고 있는 것이 북한 영화 국내 상영을 가로 막는 주범이다.

북한 영화 판권을 둘러싸고 법정 소송을 벌이는 업체는 영상물 제작 업체인 IMS와 SN21. 광고·영상물 제작업체인 IMS는 방송사 PD 출신 양경숙씨가 대표이고, SN21은 조현길씨가 대표이사로 되어 있으나 사실상 소유주는 전 영화배우 김보애씨이다. 양씨는 김대중 대통령 주변 인사와 친분이 두텁다고 알려져 있다. 미국 시민권을 갖고 있는 김보애씨는 오랫동안 권력자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영화 분야에서 영향력을 키워온 인사이다.

이 두 회사는 북한 영화 판권을 자기가 갖고 있다고 주장하며, 상대편이 국내 방송사와 방영 계약을 맺는 것을 저지하려 하거나 방송사가 방영하면 저작권 침해 소송을 벌이고 있다. 판권을 둘러싸고 법정 공방이 가장 치열한 영화는 <온달전>. MBC는 1998년 10월1일 SN21과 <온달전> 독점 방송 계약을 체결하고 지난해 1월3일 방영했다. SN21은 그 대가로 9천만원을 받았다. 그에 앞서 IMS는 1998년 5월28일 북한 조선영화수출입사로부터 <온달전>을 비롯해 북한영화 11편을 한국에서 복제·배포할 권한을 사들였다고 주장하며, 1998년 말 두 차례에 걸쳐 SN21과 MBC에 <온달전>을 방송하지 말라고 통고했다. 하지만 MBC가 <온달전>을 방영하자 IMS는 SN21과 MBC를 상대로 손해 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SN21은 IMS의 주장이 터무니없다고 일축했다. 이 업체는 1998년 9월 초순 북한 영화의 동북아시아 판권을 가진 일본 서해무역으로부터 <온달전>의 국내 판권을 인수했다고 주장한다. 서해무역을 경영하는 이는 북한통인 재일 동포 임창수씨이다. 임씨는 1998년 8월16일 북한 조선영화수출입사로부터 북한의 모든 영화들의 동북아시아 지역 판권을 사들였기 때문에 자기 회사로부터 북한 영화의 한국내 판권을 인수한 SN21이 MBC에 독점 방송권을 되판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두 업체는 자기 주장을 입증할 증거 자료를 재판부에 제출하는가 하면 통일부·문화관광부 같은 관계 기관에 진정서를 제출하며 상호 비방전에 들어갔다. 선수를 친 곳은 SN21. SN21은 재판 흐름을 결정지을 증거 서류를 제출했다. 조선영화수출입사 백철웅과 장원준이 서명한 확인서였다. 조선영화수출입사 인감이 찍힌 이 서류에는 ‘(조선영화수출입사는) 양경숙에게 그 어떤 영화의 판권도 넘겨주지 않았고…(중략)…양경숙이라는 사람을 모른다’라고 씌어 있다.
“북한에 농락당했다”지적도

이 증거는 재판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 듯하다. 사실 관계를 알고 있는 북한 인사를 증인으로 채택하지 못하다 보니 재판부는 1년여 판결을 유보하다가 지난해 11월5일 ‘IMS가 <온달전>의 복제·배포권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국내 저작권법이 규정한 등록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며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IMS가 영화 수입 계약을 맺었다고 주장한 조선영화수출입사가 자기 존재를 부인하는 데다 재판에서도 패소하자 양경숙 사장은 사기꾼으로 몰리게 되었다.

양경숙 사장은, 북한 인사와 접촉한 이는 중국 선양에 거주하고 있는 IMS 대리인이어서 조선영화수출입사가 자기 이름을 몰라서 이 같은 서류를 써주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IMS가 사기 집단이라면 SN21이 갖고 있지 못한 북한 영화의 극장 상영용 원본 필름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었겠느냐고 반문했다. 이름을 밝히지 말라는 한 북한 전문가는 “(북한에서) 영화 필름을 반출하는 일은 까다롭기 그지없다. 정식 판매 계약이 체결되고 대금 일부가 납부되어야 필름이 인계될 수 있다. 따라서 IMS가 사기 업체는 아니라고 판단된다”라고 말했다.

IMS는 조선영화수출입사가 작성한 이 증거 서류를 갖고 항소심을 준비하고 있다. 조선영화수출입사 인감이 찍힌 이 서류에는 ‘조선영화수출입사는…(중략)…조선예술영화 <온달전>의 판권을 중국 선양시 고려민족문화연구원에만 유일하게 위임하였음을 확인한다. 조선영화수출입사는 <온달전>의 판권 문제와 관련해 본 확인서 외에는 다른 문건은 일체 인정하지 않는다’라고 씌어 있다.

사건이 이처럼 복잡하게 꼬인 것은 조선영화수출입사의 책임이 크다. 고의 여부는 알 길이 없지만 두 업체의 대리인과 이중 계약을 체결한 것이다. 조선영화수출입사는 1998년 5월 고려민족문화연구원을 통해 IMS 대리인에게 <온달전>을 비롯해 북한 영화 판권을 넘기고 비슷한 시기에 일본 서해무역과 해외 판권 계약을 맺었다.

조선영화수출입사가 영화 판매를 위임한 곳은 한두 곳이 아니다. 동유럽 국가·프랑스·중국·일본에 판매 위임 업체를 두고 동시에 여러 곳과 판권 계약을 진행하고 있다. 더욱이 자본주의 계약에 익숙하지 않은 조선영화수출입사 관계자들이 평소 친분이 두터운 국내 인사나 해외 동포에게 자의로 계약서나 확인서를 남발하고 있다.

북한 영화를 국내에 반입해 한몫 챙겨보려 했던 국내 업체들이 조선영화수출입사 관계자들에게 농락당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누구 탓이든 햇볕 정책의 부산물로 국내에 들어온 북한 영화는 지금껏 햇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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