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 뺨치는 교육감 선거 혼탁 열전
  • 나권일 광주 주재기자 ()
  • 승인 2000.08.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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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교육감 직선 앞두고 인맥 동원 등 혼탁·과열…시민단체 감시운동 나서
교육계의 수장을 뽑는 시·도 교육감 선거 열풍이 7월 한 달 동안 학원가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올해 선거에서는 시·도 교육위원들만이 교육감을 선출했던 과거와 달리 교사와 학부모·지역 인사로 구성된 초·중·고 학교운영위원회 위원 전원이 투표권을 갖는다. 1991년 지방교육자치제 실시 이후 교사와 학부모 대표들이 직접 내손으로 한 표 권리를 행사해 교육감을 뽑는 첫 직선제 선거인 셈이다. 교육감 임기가 만료되어 올해 선거를 치르고 있는 시·도의 경우 투표권을 갖는 학교운영위원이 최소 7천명에서 최대 1만3천명에 이를 정도로 급증했다. 그리고 후보도 서울 9명, 전북은 무려 11명이 난립해 어느 때보다 과열 양상을 빚고 있다. 충청남도와 전라북도 교육감 선거는 1차 투표에서 당선자를 가리지 못해 결선 투표까지 가는 접전을 벌였고, 26일과 31일로 예정된 서울시 교육감 선거와 전라남도교육감 보궐 선거도 2차 결선 투표까지 갈 것으로 예상된다.

이 와중에서 특정 후보에게 유리한 홍보물을 학교운영위원들에게 무차별 배포하거나 모임을 주선하고 음식물을 제공하는 탈법 선거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급기야 YMCA·흥사단·‘참교육을 위한 전국 학부모회’ 등 시민단체까지 나서 ‘교육감 공명 선거와 올바른 교육감 선출을 위한 시민연대’를 결성하고 감시 활동에 뛰어들었을 정도이다(39쪽 상자 기사 참조).


소신 투표 힘든 제도

현재 치러지고 있는 교육감 선거의 내밀한 현장을 들여다보자. 지난 7월18일 교육감 후보들의 소견발표회가 열린 전북 정읍 실내체육관에는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5백명이 넘는 학교운영위원이 몰려들었다. 무려 11명의 후보가 소견을 발표하는 데 3시간 40분이나 소요되었다. 현직 교육감의 정책을 비난한 후보, 정책은 아랑곳없이 자신의 교육 경력만 늘어놓은 후보, 특정 학교 출신 인사들이 지원한 단일 후보라고 주장한 후보…. 소견발표장은 정치 선거 유세장을 방불케 했다. 행사장에 들어선 학교운영위원들이 공명 선거를 다짐하는 서명용지에 서명하는 한편에서는 후보들이 학교운영위원들에게 “기호 ○번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라며 깍듯하게 인사를 하고 다니거나, 후보의 부인이 안면 있는 지지자들에게 부채나 음료수를 나누어 주고 있었다.

학교운영위원으로 보이지 않는 할머니 할아버지 등 동원된 박수부대는 특정 후보의 연설이 끝나자마자 썰물처럼 빠져나가 마치 정치 선거의 축소판을 보는 듯했다. 교사와 학부모, 지역 인사가 유권자로 참여한다는 첫 직선제 선거의 의미는 퇴색한 지 오래이다. 더구나 현직 교육감이 출마한 탓에 소견발표회장에는 학부모 운영위원들만 넘쳐날 뿐 유권자의 다른 한 축인 평교사의 모습은 찾아 보기가 어려웠다. 후보자의 연설을 경청하던 한 학교운영위원은 “지금 교육감 선거는 비밀 투표가 아니라 공개 투표나 마찬가지이다. 현직 교육감이 당선될 가능성이 높은 편인데, 투표를 시·군 투표소에서 하기 때문에 지역별 지지율이 다 공개된다. 학부모 처지에서는 자식들이 다니는 학교에 불이익이 있지 않을까 우려해 현직 교육감에게 기울 수밖에 없다”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교육장이나 교장의 입김을 무시할 수 없는 교사나 학부모 위원들의 처지를 감안할 때 소신 투표를 하기에는 아직 분위기가 무르익지 않았다는 분석인 셈이다.

실제 교육감 선거는 소견발표회나 후보자 초청 토론회 형태의 정책 대결보다는 정치판과 마찬가지로 물밑 선거전이 당선 여부를 좌우한다는 비판이 만만치 않다. 정치권 줄대기·편가르기도

특히 학맥을 동원한 학교운영위원 길들이기나 초·중등 출신을 따지는 편가르기가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후보자가 교육대 출신인지 명문 사범대 출신인지에 따라 줄서기가 이루어진다. 전북도교육감 선거의 경우 현직 교육감의 출신 학교인 군산교육대와 전주교대 동문 간의 대결 구도를 보이고 있다.

서울시와 전남도 역시 특정 사범대와 교육대 출신이 치열하게 각축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과거 광주·전남 교육감 선거의 경우 이른바 광고·일고 등 특정 고교 출신들끼리 이미 교통 정리를 했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나돌았다. 정치권 인사를 좇는 이른바 줄대기도 극성이다. 국회의원이나 시·도 의원들과의 친분을 주장하며 영향력을 과시하는 후보가 허다하다. 전남도교육감 선거에서는 한 후보가 특정 단체장을 찾아가 선거운동 비법을 전수해 달라고 졸랐다는 얘기가 파다하다. 연고지에 따라 투표하는 구태도 여전하다. 지난 20일 1차 투표가 치러진 전북도교육감 선거의 경우 현 교육감이 자기 출신지인 군산에서 70%가 넘는 압도적 득표율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같은 과열과 혼탁 양상은 선거법 위반 후보자 양산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미 선거가 끝난 충남도교육감 선거의 경우 충남도선관위가 검찰에 고발하거나 수사 의뢰, 자체 경고 조처한 사례가 12건이나 된다. 음식물을 제공하거나 후보자의 이력이 담긴 우편물을 발송하고, 명함을 배부하거나 특정 후보자를 비방하기가 예사이다. 교육감 선거가 불법 선거로 치닫자 시민단체가 대책위를 결성하고 감시운동에 나섰다. 서울과 전북에 이어 전남 지역에서도 지난 7월13일 전라남도교육감 보궐선거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해 활동에 들어갔다. 이 대책위 김전승 사무국장은 “4·13 총선 때 정치 개혁 시민연대 활동을 벌인 연장선에서 교육감 선거 감시운동을 벌이고 있다. 학교운영위원의 주축인 학부형들이 자녀에게 선거의 모범을 보여주어야 한다”라고 일침을 놓았다. 교육의 질을 높일 수 있는 진지한 토론장이 되어야 할 교육감 선거가 대다수 국민의 무관심 속에 교육계만의 혼탁한 잔치로 끝나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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