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공작원 ‘은하수’의 정체는?
  • 金芳熙 기자 ()
  • 승인 1995.06.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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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안기부 차장 ‘존재’ 공개 후 정체 새로 드러나…이선실 사건 등 첩보 제공
92년 8월 중순께 태국 주재 한국대사관에 북한 여인 1명이 귀순했다. 50줄에 들어선 이 여인은 당초 ‘북한대사관 직원의 아내’로만 알려졌다. 귀순자 처리 절차에 따라 국가안전기획부의 해당 지역 정보담당자가 본부의 협조를 얻어 그를 신문하게 됐다. 이는 귀순자를 일반에 공개하기 전에 반드시 거치는 절차이다.

이 과정에서 놀라운 사실들이 밝혀졌다. 우선 이 귀순자는 단순한 주부 신분이 아니었다. 그는 북한의 조선노동당 사회문화부 소속 고급 공작원이었고, 그의 남편 역시 고급 공작원이었다. 김정일의 이복 여동생인 김경진과 친하다는 이유로 4년간 정치범 수용소에 갇히기도 했던 인물. 특히 그는 북한이 한국 내에 구축하려고 시도했던 다양한 간첩망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자세한 정보를 갖고 있었다.

당초 이 여인의 `‘정보 가치’를 높게 평가하지 않았던 안기부는 생각을 바꿔, 그를 당분간 일반에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그가 제보한 정보를 활용해 벌여야 할 대공 수사의 범위도 만만치 않았지만, 북한이 그의 한국행을 확신하지 못하는 한 역공작도 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안기부, 첩보전 전략상 실체 공개 않을 예정

이상이, 안기부 대공 수사국장과 1차장을 역임한 鄭亨根씨가 최근 <월간조선>과의 인터뷰(5·6월호)에서 그 존재를 공개한 코드네임(암호명) ‘은하수’의 숨겨진 정체다. 은하수의 귀순은, 뒤이은 간첩단 사건으로 현대사에 한 획을 긋는 계기가 된 한편, 남북한 간의 첩보전 양상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큰 관심을 끈다.

안기부 해외 파트 직원들이 그로부터 입수한 정보 가운데에는 후에 李仙實 사건으로 비화하는 계기가 된 金洛中씨에 대한 제보도 들어 있었다. `‘90년 10월께 북한공작원들이 서해안을 통해 남파돼 김낙중씨와 접선한 후 91년 3월께 돌아갔고, 그 한달 뒤 김낙중씨가 보낸 심금섭씨(66·당시 청해물산 사장)를 제3국에서 포섭했다’는 요지였다.

이 제보 내용은 대공 수사국으로 전달됐는데, 당시 수사국 담당자들은 반신반의하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김낙중씨라는 인물의 성향 때문이었다. 통일 전문가로 통했던 김씨는 젊은 시절 단신으로 임진강을 건너 월북한 경력을 갖고 있었다. 그 일로 한국에 돌아온 후 정보기관에서 철저한 조사를 받았는데, 그 결과 특별히 혐의를 받을 만한 내용이 없었다는 판정을 받은 바 있다. 즉 그의 월북은 `‘우국충정에서 우러나온 한 열혈 청년의 우발적인 돌출 행동’ 정도로 이해가 됐다. 그런 그가 북한에 포섭된 간첩이라는 제보를 쉽사리 수긍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은하수의 제보를 무시해 버리기에는 그 내용이 지나치게 구체적이었다. 또 제보 내용 가운데 비교적 단순한 내용의 사실 여부를 확인해본 결과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 이후 수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됐고, 결과는 대부분 당시 언론에 공개됐다. 당초 안기부는 제보 내용을 확인하면서 김낙중씨와 심금섭씨를 체포하는 데는 신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을 체포할 경우 파장이 적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와 함께, 사건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경우 더 많은 간첩망을 적발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이 작용했다. 그러나 심금섭씨가 자신이 수사 대상이 됐다는 것을 눈치채고 월북할 가능성도 있다고 판단한 안기부는 두 사람을 체포했다.

안기부가 ‘조선노동당 중부지역’ 총책으로 거명한 黃仁五씨는 김씨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인물이다. 또 후에 조작 여부가 논란이 된 이선실은 황씨를 수사하다가 안기부 수사국이 포착했다고 주장하는 전설적인 여간첩이다.

언론에 의해 광복 이후 최대의 간첩사건으로 묘사된 이선실 사건은 당시 대통령 선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 안기부는 일부 야당 국회의원들이 이 여간첩과 접촉했다는 혐의를 잡고 내사를 벌였는데, 이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정형근씨는 인터뷰에서 이선실 사건에 대한 수사는 계속되고 있다고 밝혔다.

‘은하수’는 안기부 수사국이 중심이 돼 진행한 간첩단 사건의 단서만을 제공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밖에도 여러 고급 정보를 제공했는데, 안기부는 이를 토대로 북한에 대한 역공작을 시도하기도 했다. 해외 파트의 한 관계자는 역공작의 자세한 내용을 밝히지 않으면서도, 은하수 때문에 대북 첩보전에서 엄청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북한이 최근까지도 은하수의 남행을 확신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면서, 은하수의 존재를 공개한 정씨의 발언이 국익에 도움이 될지는 의심스럽다는 입장을 토로했다(오른쪽 기사 참조). 정형근씨는 안기부가 곧 그를 공개할 것이라는 전제 아래 그의 존재를 밝혔지만, 안기부는 당분간 그의 얼굴이나 이름을 공개하지 않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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