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러운 땅’에 몰리는 추잡한 손들
  • 정희상 기자 (hschung@sisapress.com)
  • 승인 2005.01.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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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송병준 등 친일파 후손 토지 반환 소송 31건…브로커 낀 사기극도 빈번
이완용 후손의 땅 찾기 실태를 세상에 처음 알린 <시사저널>의 탐사 보도(1992년 8월29일자, 제148호)가 나온 지 13년 만에 친일파 재산 처리를 둘러싼 해법이 적극 모색되고 있다. 국회 일각에서는 친일파 땅 문제를 광복 60주년이 되도록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부끄러운 역사로 간주하고 이번 기회에 과거사 청산 과제에 포함할 방침이다. 이에 따라 뜻을 같이하는 여야 의원들이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환수 특별법’(가칭)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박정희에게 헌납했다는 이완용 땅은 어디로?

대표적인 친일파 송병준의 후손이 토지 반환 소송을 낸 인천시 부평구 출신인 열린우리당 최용규 의원이 이 법 제정에 앞장섰다. 최의원은 최근 국회 법사위 차원에서 지난해 10월 민족문제연구소에 연구 용역을 의뢰해 두 달 동안 친일반민족행위자 토지 보유 실태를 조사했다고 밝혔다. 그 결과 대표적인 친일 민족반역자로 규정된 이완용·송병준 두 사람 명의로 된 경기도 일대 토지만도 95만여 평에 이른다고 공개했다. 송병준의 경우 인천시 부평구 산곡동 일대에 13만3천여 평과 경기도 고양시에 80만 평을 일제 때 사정받았고, 이완용은 경기도 광주시와 여주군 일대에 14만5천여 평을 소유한 것으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이번에 민족문제연구소가 조사해 공개한 경기도 일대의 이완용과 송병준 토지 목록은 빙산의 일각이다. 이미 1992년과 1996년 <시사저널>은 이들 두 친일파의 전국 토지 소유 실태와 그 후손들의 땅찾기를 집중 보도한 바 있다.

이완용과 송병준은 대표적 친일파로서 1910년 한일합병 이후 일제로부터 귀족 작위와 일왕의 은사금, 은사 토지 등을 수여받아 막대한 부를 거머쥐었다. 1910년 6월24일자 대한매일신보는 ‘총리대신 이완용씨의 재산을 모처에서 조사한 바 4백여만원이라 하더라’고 보도했다. 요즘 돈으로 치면 1천5백억원에 달한다. 토지 반환 소송을 벌여온 이완용의 증손 이윤형씨는 기자에게 “정확한 재산 내역은 모르지만 우봉 이씨 종친회에 알아보니 전국 각지에 수천만 평은 되는 것으로 나온다. 증조부가 조선 왕조 다음으로 많은 땅을 가졌다고 한다”라고 말했다. 이 중 논밭은 소작인 손으로 넘어갔지만, 대지와 임야는 아직도 찾을 수 있는 곳이 많을 것이라고 했다.

이윤형씨는 또 “1970년 3월 내가 대한사격연맹 사무국장으로 있을 때 대검 중수부에서 나를 끌고가 증조부 명의로 된 서울 연희동 땅 30만평을 박대통령에게 헌납한다는 문서에 사인하라고 해서 두말 않고 사인했다”라고 밝혔다. 문서의 맨 위에는 박대통령 이름과 사인, 그리고 그 아래 이후락씨 이름과 도장이 찍혀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땅의 정체와 이후 소유권 향방에 대해서도 정밀 조사를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일진회 총재로서 대표적 친일파인 송병준 역시 일제로부터 백작 작위와 은사금, 은사 토지 등을 하사받았다. 송병준은 한일합병 당시 그 대가로 일본에 1억5천만 엔을 요구했다는 사실이 최근 일본 정부 문서를 통해 공개되기도 했다. 당시 친일단체 일진회 총재로서 ‘조선 황실 및 국유재산조사국 운영위원장’ 자리에 있었던 송병준은 1910년대 중반 토지조사사업 때 막대한 땅을 자기 소유로 만들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특히 송병준은 1905년 굴욕적인 을사조약에 울분을 품고 자결한 충정공 민영환 열사를 한때 후원자로 두고 있었다. 황 현이 쓴 <매천야록>에는 ‘송병준은 민영환이 자결하자 그의 재산 5백석지기도 갈취했다’라고 나온다. 이 땅이 바로 현재 인천시 산곡동 미군기지 캠프 마켓이 들어선 자리다. 오는 2008년 기지 이전을 앞두고 송병준의 후손 송돈호씨는 현재 이곳을 반환해 달라고 국방부와 산림청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최근에는 이 땅에 대해 을사조약 때 자결한 애국열사 민영환의 후손 민병기씨가 소송을 냈다. 본래 민영환 열사가 운영하던 근대 농업회사인 목양사 땅이었는데 송병준이 강탈했다는 것이 소송을 제기한 이유다. 민씨 후손은 이 땅을 친일파 후손에게 넘겨서는 안된다는 생각으로 지난해 5월 독립 당사자로 재판에 참여하고 있다.

국회 특별 입법이 ‘묘책’

이완용 후손이 땅을 찾는다는 보도로 여론이 악화하고 재판부의 기류도 부정적으로 변하자 토지 브로커들은 기증이라는 편법을 동원하고 있다. 이 친일파 땅찾기가 온갖 사기와 범죄, 심지어 살인 사건까지 빚어지는 사회 문제로 드러나기도 했다. 1997년에는 송병준 땅찾기 소송을 대행하던 김영모 변호사가 토지 브로커들에게 살해되었는가 하면, 최근 들어서는 친일파 땅문서를 들고 다니던 토지사기단이 건설업체 등을 상대로 사기극을 벌이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다.

현재 친일파 후손들이 선대의 재산을 찾겠다고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낸 경우는 모두 31건이다. 을사오적이자 한일합병 공신인 이완용 후손이 20여 건, 일진회 총재 송병준 후손이 4건, 역시 을사오적으로서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은 이재극 후손 1건, 을사오적 이근택의 후손 5건이다. 그러나 토지사기단과 결탁해 후손들은 드러나지 않은 채 진행되는 민사 소송도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국민적 공분이 확산되면서 친일파 땅찾기 소송에 대해 재판부는 신중하게 대처하고 있다. 2001년 친일파 이재극 후손이 파주시 문산의 도로 부지에 대해 낸 소송에서 재판부는 ‘3·1 정신과 임시정부 법통을 계승하는 헌법 정신’을 들어 이재극 후손에게 패소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법적인 뒷받침이 없기 때문에 이런 판결은 극히 드문 사례이다. 대를 이어 진행되는 민족의 수치에 무리 없이 종지부를 찍으려면 현재로서는 국회가 특별 입법을 하는 방법밖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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