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동포 참정권 또 물거품 되나
  • 도쿄/채명석 (cms@sisapress.com)
  • 승인 2000.10.19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일본 의회 ‘지방참정권 부여 법안’ 심의에 자민당 우파 제동… ‘정상회담 약속’ 물거품 될 듯
김대중 대통령은 지난 9월에 열린 아타미 한·일 정상회담에서 모리 요시로(森喜朗) 총리에게 재일 동포에게 ‘지방자치제 참정권’(지방참정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연내에 해결해 달라고 촉구했다. 이에 대해 모리 총리는 국회에 제출된 지방참정권 법안 심의를 재촉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자민당 보수 우파의 반대로 이 약속은 불발로 끝날 가능성이 높아졌다.

현재 일본 국회에 제출된 이른바 ‘영주 외국인에게 지방참정권을 부여하는 법안’은 2개이다. 하나는 연립 여당 구성 멤버인 공명당과 보수당이 연립 여당 3당 합의에 따라 제출한 법안으로, 20세 이상의 영주 외국인에게 각종 지방 선거 때 투표권을 부여하도록 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제1 야당 민주당이 제출한 법안인데 내용은 대동 소이하다.

그밖에 사회민주당·공산당도 외국인에게 지방참정권을 부여하는 문제에 적극성을 보이고 있어, 만약 지방참정권 법안이 표결에 부쳐지면 당장이라도 국회를 통과할 수 있다. 자타가 인정하는 보수 우파 정치인인 자유당의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 당수도 한국측이 일왕에서 천황으로 호칭을 변경하고 일본의 대중 문화에 시장을 전면 개방했다는 점을 들어 한국측 성의에 대한 대가로 재일 한국인에게 지방참정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이다.
그러나 자민당 보수 우파가 외국인에게 지방참정권을 부여하는 것이 헌법 위반이라고 주장하며 법안 심의를 극력 저지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연내 통과는커녕 국회가 언제 법안 심의에 들어가게 될지도 매우 불투명한 상황이다.

지난 9월29일 열린 자민당 선거제도조사회 모임은 법안 심의를 반대하는 자민당 보수 우파가 종횡무진으로 활개를 친 무대였다. 먼저 지방참정권 법안을 지지하는 노나카 히로무(野中廣務) 간사장이 법안 통과의 당위성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노나카 간사장에 따르면, 이 법안은 올 봄 타계한 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 전 총리가 일·한 의원연맹 회장 시절 공명당의 한 의원에게 부탁해 초안이 작성되었다. 그 결과 지난해 10월 자민·자유·공명당의 연립 여당 3당 정책 합의에서 영주 외국인에게 지방참정권을 부여한다는 조항이 삽입되었다. 또 지난 4월 자유당 대신 보수당이 3당 연립 정권에 참가했을 때도 지방참정권 부여 문제가 3당 정책 합의 문서에 명기되었다.

노나카 간사장은 이런 경위를 자세히 설명하면서, 다케시타 전 총리의 유지를 존중하고 연립 여당 3당 간의 신의를 다지기 위해서 법안 통과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노나카 간사장은 또 지방참정권 부여 대상을 영주 외국인 중에서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따라 일본 국적을 상실한 사람과 그 자손 등 이른바 ‘특별 영주자’에 한정하자고 제안했다.

‘특별 영주자’는 일제 식민지 시절 일본 국적을 갖고 일본에 거주하다가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함에 따라 자동으로 일본 국적을 상실한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일본에 거주할 수 있도록 특별히 부여된 영주 자격이다. 일반 영주자와 달리 그 자손도 자동으로 특별 영주 자격을 갖게 된다. 법무성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말 현재 54만6천여 명에 이르는 재일 한국인·조선인 중 95%에 상당하는 51만8천여 명이 특별 영주 자격을 갖고 있다.

노나카 간사장은 끝으로 1995년 최고재판소(대법원)가 외국인에게 지방참정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국회에서 제정하는 것이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법안 통과에 협력을 부탁했다.

그러나 노나카 간사장의 설명이 끝나기 무섭게 모리파의 한 여성 의원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일본의 주변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주변사태법에 따라 해당 지방자치단체에 협력을 요청하게 되어 있는데, 외국인이 투표권을 갖게 되면 협력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겠느냐”라고 반문하면서 “외국인에게 지방참정권을 인정하게 되면 일본 안보의 근간이 위협받게 된다”라고 주장했다.

노나카 간사장의 설명처럼 일본 최고재판소는 1995년 2월 재일 동포가 제기한 지방참정권 요구 소송에서 외국인에게 지방참정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국회가 제정하는 것은 헌법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그러나 최고재판소는 이 판결에서 ‘참정권은 국민의 고유한 권리’라고 규정하고 있는 헌법 15조의 ‘국민’이라는 것은 ‘일본 국민, 즉 일본 국적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고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최고재판소는 또 ‘도도후켄(都道府縣)과 시초무라(市町村)의 수장과 의원을 뽑는 것은 주민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는 헌법 93조의 ‘주민’도 ‘일본 국민을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시했다.

이 때문에 법안 찬성파는 1995년의 최고재판소 판결로 헌법상의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반면, 법안 반대파는 최고재판소 판결의 본론 부분은 외국인에 대한 지방참정권 부여를 금지하는 해석이라고 엇갈린 주장을 펴고 있다. 그밖에도 에토가메이(江藤龜井)파 의원은 “한국 헌법은 재일 한국인에게도 병역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 일본 영주권을 갖고 있어도 그들은 한국 헌법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들인데 어떻게 일본의 지방참정권을 부여하느냐”라고 반문했다.
재일 동포 사회를 자극하는 발언도 거침없이 튀어나왔다. 가토파의 한 의원은 “재일 한국인의 80%가 일본인과 결혼하고 있다. 그 자손은 자동으로 일본 국적을 취득할 수 있으니, 이 문제는 가만히 내버려둬도 30∼40년만 지나면 해결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물론 재일 동포 사회 내부도 민단이 적극 추진하고 있는 지방참정권 획득 운동에 대해 상당한 의견차를 보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재일 동포 2세인 도쿄 도립대학 정대균 교수는 최근 <산케이 신분>에 기고한 ‘한국계 일본인으로서 공생을’이라는 글에서 재일 동포 사회의 주역이 3세와 4세로 바뀌고 있는 지금 재일 한국인들은 지방참정권 획득보다는 일본 국적을 취득하는 데 노력해 한국계 일본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더 현명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재일 동포 3세 치과의사 류시열씨는 “일본 법무성의 귀화 심사가 나치의 민족 정화를 연상케 하리만큼 까다롭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라고 반문하면서, 귀화 촉진은 재일 한국인들의 민족 주체성을 말살하려는 시대착오적인 발상에서 나온 발언이라고 주장했다.

북한과 조총련의 반대도 법안 심의조차 거부하고 있는 자민당 보수 우파에게 좋은 빌미를 던져주고 있다. <로동신문>은 10월3일자 논평에서 다시 이 문제를 들고 나와 ‘동포 사회의 분열과 대립을 조장하려는 불순한 악법’이라고 공격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지방참정권 법안 연내 처리는 물 건너간 것이 확실하며, 한·일 간에 또 다른 부담만 안겨줄 것 같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