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면초가 CNN “아, 옛날이여”
  • 워싱턴/변창섭 (cspyon@sisapress.com)
  • 승인 2000.09.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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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률 급락… 신생 경쟁사들 도전에 ‘20년 아성’ 흔들
올해로 창사 20주년을 맞이한 세계적인 케이블 뉴스 채널 CNN이 요즘 생존 전략을 마련하느라 분주하다. 갈수록 시청률이 떨어지는 데다 CNBC·MSNBC·Fox 뉴스 채널 등 신생 경쟁사들이 시장을 잠식해 CNN의 앞날에 빨간불이 켜졌기 때문이다.

1980년 6월 터너 방송사 소유주이던 테드 터너가 설립한 CNN은 ‘24시간 뉴스 방송’이라는 전혀 색다른 뉴스 전달 방식을 도입해 방송가에 지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설립 초기만 해도 뉴스 같은 딱딱한 프로를, 그것도 24시간 계속 내보내는 방송을 시청자들이 즐겨 보겠느냐는 회의론도 거셌다. 그러나 굵직굵직한 초대형 사건들이 터지면서 속보성과 생중계를 생명으로 삼는 CNN은 진가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1986년의 우주 탐사선 챌린저 호 공중 폭발 때나 1991년 걸프전 때 CNN은 생중계의 위력을 한껏 발휘했다. 하지만 걸프전 같은 초대형 사건이 자주 터질 수 없는 상황에서 CNN은 유사시가 아닌 ‘평화시’의 시청자 확보라는 부담을 늘 느껴야 했다.

바로 그런 부담을 CNN이 요즘 피부로 절감하고 있다. 특히 올해 들어 9년 만에 최저 시청률을 기록해 위기감은 극도에 달했다. 급기야 CNN 모회사인 타임워너 최고 경영진은 최근 리처드 캐플란 미주 담당 사장을 전격 교체하고 필립 켄트 CNN 국제 담당 사장을 CNN 뉴스그룹 사장으로 임명하는 등 최고위급 간부들에 대한 인사를 단행했다. 물론 이번 인사의 최대 핵심은 캐플란 사장 교체이다. 캐플란 사장은 17년 동안 ABC 방송에 몸 담으면서 이 방송의 간판 뉴스 프로인 <나이트 라인> <프라임타임 라이브> <월드뉴스 투나잇>을 제작한 주인공. 최고의 방송인에게 주는 에미 상을 서른네 번이나 탄 그는 방송가에서는 뉴스 제작의 ‘귀재’로 통한다. CNN은 캐플란을 1997년 8월 연봉 1백50만 달러에 전격 스카우트해 화제를 모았다. CNN측이 그를 영입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당시 CNN에 도전장을 낸 Fox 뉴스 채널·MSNBC·CNBC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평상시 시청률을 높일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CNN의 야심 찬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캐플란을 영입한 이후에도 CNN의 시청률은 올라가기는커녕 오히려 하락세를 거듭했다. 특히 캐플란이 지난해 여름 세계적 시사 주간지 <타임>과 공동으로 심혈을 기울여 시도한 1시간짜리 시사 기획 프로 도 기대했던 시청률을 확보하지 못했다. 이 프로는 지난해 가을 첫회분에서 베트남전 때 미군이 독가스를 사용했다고 보도했으나 결과적으로 오보로 판명되어 캐플란의 평판과 CNN의 명성에 먹칠을 했다. 그러나 천하의 캐플란을 중도 탈락시킨 요인은 무엇보다 급격한 시청률 하락이다. 그가 CNN으로 옮겨 일을 시작한 1997년 3/4분기 때 미국내 평균 시청자는 46만3천명이었다. 그런데 올해 들어 지난 2/4분기 시청자 수는 무려 46%나 떨어진 28만8천명에 불과했다. 지난 7월 말과 8월 초 각각 치러진 공화당과 민주당 전당대회 행사 때 CNN은 방송 요원을 5백여 명이나 현장에 파견해 대대적인 중계에 나섰지만 시청률은 기대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이같은 시청률 하락에 대해 캐플란은 최근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CNN이 경쟁사인 MSNBC나 Fox 뉴스만큼 홍보에 적극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CNN은 이미 지난해 1천5백만 달러를 광고비에 투입한 상태여서 이런 지적은 설득력이 약하다.
그렇다면 CNN의 시청률이 급격하게 떨어진 까닭은 무엇일까. 우선 시청자의 눈을 고정시킬 만한 초대형 뉴스감이 종전에 비해 훨씬 줄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1991년 걸프전 이틀째인 1월17일에는 무려 5백40만 가구가 CNN을 통해 전쟁 상황을 지켜보았다. CNN은 또 1995년 자신의 백인 처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전설적인 풋볼 선수 O.J. 심슨에 대한 재판 과정을 생중계해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나아가 1997년 내내 미국 정가를 뒤숭숭하게 만든 빌 클린턴 대통령과 모니카 르윈스키의 성 추문 사건 때는 의회의 탄핵 과정을 생중계해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걸프전이나 르윈스키 사건처럼 시청자의 호기심을 크게 자극하는 뉴스는 가뭄에 콩 나듯 하는 법이다.

캐플란의 몰락, 나아가 CNN의 침체를 가져온 또 다른 요인으로는 경쟁사들의 무서운 약진을 꼽을 수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사의 빌 게이츠 회장이 5억 달러를 투자해 NBC 방송과 공동으로 설립한 MSNBC, 경제 전문 뉴스 채널인 CNBC, CNN처럼 24시간 뉴스를 표방한 Fox 뉴스 채널이 바로 CNN의 강력한 도전 세력이다. 사실 이들 3대 채널이 CNN에 도전장을 냈을 때만 해도 대부분의 미디어 분석가들은 일찌감치 독보적인 뉴스 채널을 구축한 CNN이 끄떡도 하지 않을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근래 각종 방송 매체는 물론이고 웬만한 인쇄 매체들조차 자체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뉴스를 24시간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상황이 되자 한때 CNN의 상징과도 같았던 ‘24시간 뉴스’라는 구호는 더 이상 먹혀들지 않았다.

CNN이 이처럼 고전하는 동안 신생 경쟁사들은 약진을 거듭했다. 정치 뉴스를 즐겨 보던 시청자들은 Fox 뉴스 채널로 하나둘씩 옮겨갔고, 젊은 시청자들은 MSNBC로 채널을 돌렸으며, 경제 뉴스를 즐겨 보던 시청자들은 CNBC로 채널을 바꾸기 시작했다. 특히 Fox는 ‘공정성’을 핵심으로 한 CNN 식의 정통 뉴스 편집 기법에서 벗어나 진행자의 의견을 대폭 가미토록 한 파격적인 방식을 채택해 시청자를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CNN 최고의 광고 수입원이던 경제 뉴스 전문 채널 CNNfn은 35년 방송 경력을 자랑하는 빌 볼스터를 회장으로 영입해 대대적인 공략에 나선 CNBC의 맹추격을 견디지 못하고 지난 7월부터 시청률에서 밀리기 시작했다. 이처럼 파죽지세로 경쟁사들이 CNN의 아성을 공략하는 마당에 그나마 CNN의 체면을 유지하며 고정 시청자를 확보한 프로는 평일 저녁 9시에 방송되는 시사 대담 프로 정도다.
문제는 새 경영진을 영입한 CNN의 앞날이다. 국내 뉴스 총사령탑인 캐플란을 교체함으로써 CNN이 예전의 영화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냐 하는 점인데, 누구도 확답하지 못한다. 다만 CNN이 케이블 TV와 인터넷을 결합해 지금보다 더 많은 시청자를 끌어들일 수 있을지가 최대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이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것은 CNN 모회사인 타임워너가 2천2백만 가입자를 자랑하는 미국 최고의 인터넷 온라인 사인 아메리카 온라인(AOL)과 지난 1월 합병 계획을 발표한 뒤 연방 정부의 최종 승인을 기다리고 있다는 점이다. 예상대로 승인될 경우 CNN은 디지털 세계의 총아로 인터넷 온라인 업계의 최강자인 아메리카 온라인의 가입자들을 흡수할 절호의 기회를 맞이할 수 있다. CNN은 앞으로 모든 보잉 여객기에 CNN 시청 장치를 비치하고, 무선 전화기와 호출기를 통해서도 CNN을 청취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그러나 아무리 잠재적인 시청자층이 넓다 해도 이들을 끌어들일 만한 컨텐츠를 확보하지 못할 경우, CNN의 앞날은 크게 나아질 것이 없다는 지적이다.

한때 ABC 방송의 심야 시사 뉴스 프로인 <나이트 라인>에서 활약하다가 캐플란과 함께 CNN으로 옮긴 제프 그린필드(CNN 선임 정치평론가)는 최근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CNN의 고민을 이렇게 토로했다. 전쟁이나 비행기 추락과 같은 돌변 상황이 벌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CNN이 고정 시청자를 확보하기란 극히 힘들며, 더군다나 오늘날처럼 딱딱한 뉴스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지 못하는 시대에 CNN 같은 뉴스 전문 방송이 고정 시청자를 확보하기란 어렵다는 것이다. 때문에 CNN 일부 중역진은 국내보다 해외로 눈길을 돌려 에 대한 투자를 늘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부쩍 높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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