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북한, 첫 합작품은 소프트웨어 공동 개발
  • 남문희 기자 (bulgot@sisapress.com)
  • 승인 1999.12.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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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1월 베이징에 ‘개발 연구소’ 개설 합의
‘현대가 불도저로 길을 뚫어 놓으면 삼성은 세단을 몰고 들어간다.’지난해 6월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소몰이 방북’으로 남북 경협의 길을 뚫었을 때 삼성경제연구소의 한 대북 실무자가 의미 심장한 말을 했다. 그의 말에는 현대와 다른 ‘삼성 스타일’이 함축되어 있다.

수면 아래에서 장고를 거듭하던 ‘삼성식 대북 경협 스타일’이 최근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 2일 삼성전자는 11월27일 베이징에서 북한 아태평화위와 합의한 대북 경협 사업안을 언론에 발표했다(아래 표 참조).

삼성 대북 경협안은 우선 내용 면에서 몇 가지 신선한 측면이 있다. 최초로 첨단 분야라 할 소프트웨어 공동 개발에 합의했다는 점이 그렇고, 주로 섬유산업 위주였던 임가공 분야를 전자산업에까지 확대했다는 점도 평가할 만하다.

삼성은 개발비 내고, 북한은 인력 공급

그러나 무엇보다도 삼성이 이번 협상 과정에서 보여준 ‘삼성식 경협 스타일’이 현대와는 또 다른 방식이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먼저 소프트웨어 공동 개발이다. 삼성은 언론 발표에서 5개 분야 공동 개발 품목만을 발표했다. 다시 말해 공동 개발을 실행하기 위한 ‘핵심 복안’은 발표하지 않았다. 그 핵심 복안이란 바로 남북 최초로 ‘소프트웨어 공동 개발 연구소’를 내년 1월 말께 베이징에 개설할 예정이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삼성전자 관계자는 “지난번 베이징 협의에서 아태평화위와 공동 연구소 명칭 및 운영 방안에 합의했다”라고 밝혔다. 이 관계자가 밝힌 삼성과 북한의 남북 공동연구소 명칭은 ‘베이징 소프트웨어 센터’. 남북경협 사상 최초의 공동 연구소, 그것도 첨단 분야 공동연구소 개설이라는 빅 뉴스를 지난번 언론에 발표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이 관계자는 “내년 1월 연구소 개설 시기에 임박해 발표함으로써 홍보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였다 ”라고 털어놓았다.삼성과 북한 간에 물밑 합의가 이루어진 ‘베이징 소프트웨어 센터’구상이야말로 이번에 삼성이 북한과 합의한 5개 분야 소프트웨어 개발 사업을 뒷받침할 회심의 복안이다. 앞으로 통일부의 협력 사업 승인 절차가 남았지만, 이같은 첨단 산업 공동 연구소가 남북 최초로 세워질 경우 그 의미는 심장하다.

삼성과 북한은 이미 공동 연구소 운영 방안에도 개략적으로 합의했다. 삼성은 지난번 베이징 협상에서 소프트웨어 분야를 담당했던 삼성전자 소프트웨어 개발팀이 공동 연구소의 한 축으로 참여한다. 당분간은 현지 체류 비용을 감안해 본사 출장 형식으로 개발 과제 등을 점검하고, 본격화할 경우 현지 체류도 고려하고 있다. 삼성은 연구소 개소 및 소프트웨어 개발 비용으로 약 백만 달러를 지불한다. 삼성 연구진이 합류하기 전까지 실제로 베이징에 체류하면서 소프트웨어를 개발할 인력은 북한이 공급한다.

즉 지난번 협상에서 북측 파트너로 참석한 ‘조선콤퓨터센터’는 이를 위해 기존 베이징 지사 인원을 2명에서 12명으로 확대할 예정이다. 추가로 보충되는 10명은 평양 본사에서 파견되는 전문 프로그래머들로 이루어진다. 북측 파트너가 될 조선콤퓨터센터는 90년 일본 조총련의 지원으로 설립된 북한의 대표적인 소프트웨어 개발 업체. 평양 만경대 구역 약 2만3천㎡에 약 8백명의 연구진을 거느린 이곳은 북한 컴퓨터산업의 총본산이다. 북한의 컴퓨터 분야 영재 우선 선발권을 가지고 있는 이곳의 기술력은 분야에 따라서는 세계적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게임 소프트웨어의 경우 바둑 프로그램인 <은별>이 지난해 세계대회에서 1등을 할 정도로 수준이 높다.

베이징 소프트웨어 센터가 주축이 될 남북 공동 소프트웨어 개발 사업 중 최대 역점 품목은 ‘남북 단일 워드 프로세서 개발’이다. 이 분야에서도 삼성 특유의 치밀함과 실리주의가 엿보인다. 삼성은 삼성이 자체 개발해 그동안 내부 문서 작성용으로 사용해온 한글 워드 프로세서 ‘훈민정음’을 이 사업의 모체로 할 계획이다. 훈민정음을 북한의 기존 워드 프로세서인 ‘창덕’등과 호환 가능하도록 개조하거나 아예 둘을 합쳐 단일 워드 프로세서를 개발하는 것이 목표다. 이런 과정을 통해 ‘통일 한국의 워드 프로세서 초안’이 나오게 되면 국내 워드 프로세서 시장에도 대단한 파문이 일 것으로 보인다.

공동 개발 소프트웨어로 중국 등 제3국 시장 공략

소프트웨어 공동 개발 사업의 실질 내용은 사실상 삼성이 비용을 지불해, 북한의 우수 인력 및 개발 노하우를 활용하는 일종의 용역 개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 처지에서도 삼성의 자금과 상용화 기술을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익이 된다고 하겠다. 더군다나 이렇게 개발한 소프트웨어를 가지고 중국 시장 등 제3국 시장에 공동 진출할 경우 이익이 극대화된다. 5개 분야 중 중국어 문자 인식 소프트웨어 개발 사업은 북한의 노하우를 활용해 중국 시장을 공략하기 위한 대표적 사례이다. 한국보다 중국·러시아와 교류 역사가 긴 북한의 풍부한 언어 인력 및 문자 데이터 베이스를 활용해, 중국 시장 등에 수출할 단말기 소프트 웨어를 개발하겠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삼성과 북한이 이번에 구체적인 사업안에 합의하기까지는 약 6개월여 실무 검토 기간이 있었다고 한다. 지난 6월 윤종용 삼성전자 사장을 대표로 한 경협단이 방북한 이후, 삼성은 나름의 경협 원칙에 입각해 적절한 사업 분야를 모색해 왔다. 삼성경제연구소 관계자에 따르면, 이 기간에 삼성은 △철저하게 비즈니스 원칙에 입각할 것 △북한에도 도움이 될 것 △남북 관계 개선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 세 가지 원칙을 사업 아이템 선정 기준으로 삼았다고 한다.이 중 첫번째 기준인 ‘비즈니스 원칙’은 삼성의 대북 실무자가 남북 경협 전반에서 그동안 발생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견지해온 입장이기도 하다. 텔레비전 만대 연불 수출 합의에서도 이 원칙을 지키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보인다. 그동안 북한은 국내 대기업에 컬러 텔레비전 무상 지원을 요구해 왔는데, 이번 합의안을 뜯어보면 ‘무상 지원이야말로 경협 질서를 어지럽히는 요인’이라는 삼성 실무자의 고려가 나름으로 반영되었다. 합의안의 또 다른 사업 내용인 삼성 브랜드 대형 텔레비전을 평양에 설치함으로써 발생한 광고비 대가로 텔레비전을 지원한다는 명분을 세운 것이다. 즉 삼성의 29인치 텔레비전 90대와 52인치 프로젝션 텔레비전 10대를 ‘ATEA-SAMSUNG’이라는 영문 브랜드로 평양 고려호텔과 양각도호텔 로비·VIP 룸 등에 설치키로 합의했는데, 이로 인해 발생하는 광고 효과에 대한 대가라는 것이다.

삼성 대북 사업의 핵심은 북한에 ‘복합전자단지’를 조성해 삼성전자 등의 단순 조립 공장 등을 이곳에 이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목표는 이처럼 멀리 잡되 출발은 눈앞의 현실에서 한다는 것이 삼성 스타일의 또 하나 특징이다. 바로 이번에 합의한 컬러 텔레비전·라디오 카세트·유선 전화기 임가공 사업이 바로 그것이다. 일단 3개 분야 시범 사업을 통해 북한의 임가공 기술력을 점검하면서 분야를 점차 확대해 전자 단지에까지 도달하겠다는 것이다.

대북 경협에서 삼성 스타일의 가장 큰 특징은 다른 대기업과 달리 실무자 중심의 사업 방식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소프트웨어 공동 개발이라는 ‘기발한 착상’ 역시 실무자의 아이디어를 채택한 것이다. 지난 11월23∼26일 베이징 장성호텔에서 있었던 북측과의 협상 과정에도 삼성측은 과장급과 부장급 실무자 위주로 이루어진 협상 대표단을 파견했다. 당시 삼성 협상단은 ‘경협 사상 처음’으로 변호사 1인과 법무담당관 1인 등 법률 전문가까지 포함해 북한측을 ‘까무라치게’했다. 북측 역시 아태평화위가 주관해 조선콤퓨터센터 및 개선무역총회사 등 분야별 실무자로 협상단을 조직해 3박4일간 격돌했다.

이 과정에서 북측은 향후 분쟁 해결 방식으로 92년 9월27일 발효된 ‘교류 협력에 관한 남북기본합의서 부속 합의서’를 준거법으로 하자는 의외의 선물을 내놓기도 했다. 북측이 그동안 기피해온 기본합의서 방식을 먼저 제안했다는 점은 남북 관계에 긍정적 신호로 해석되기도 한다. 삼성경제연구소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북한측이 내년 초면 남북 간에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얘기해온 점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며, 내년 상반기 당국간 회담에 대한 기대감을 표시했다.

장고를 거듭하던 삼성이 비로소 출사표를 던짐으로써 남북 경협은 현대의 ‘불도저형’에 삼성의 ‘세단형 모델’이 더해져 복선화 길을 걷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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