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점보기 납치 미수 사건 뒷 얘기
  • 도쿄/채명석 (cms@sisapress.com)
  • 승인 1999.08.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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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 시뮬레이션 게임 즐기다 “진짜 몰아보자” 범행
지난 7월23일 오전 11시25분께 승객 5백17명을 태우고 하네다 공항을 막 이륙하여 신치도세 공항을 향해 비행하던 젠니쿠(全日空) 소속 보잉 747-400 점보 여객기가 납치되었다. 일본 언론 보도와 경찰 발표를 종합하면 피랍에서 범인 체포까지 대강 다음과 같은 일이 드라마처럼 펼쳐졌다.

하네다 공항을 이륙한 점보 여객기 기체가 상승할 무렵 2층석에 앉아 있던 젊은 남자가 갑자기 큰 소리를 지르며 일어섰다. 바짝 마른 얼굴에 은색 안경을 걸치고 낡은 흰색 장갑을 낀 그는 19㎝ 길이 식칼을 여성 승무원에게 들이대고 “목숨이 아깝거든 조종실 문을 열라”고 명령했다.

젊은 남자는 여성 승무원에게 2층석 앞쪽에 있는 조종실 문을 노크하도록 집요하게 강요했다. 조종실에 달린 작은 창을 통해 이 광경을 목격한 나가시마 나오유키(長島直之·51) 기장이 승무원의 안전을 위해 조종실 문을 열어주자 젊은 남자는 조종실 안으로 뛰어들며 “내가 조종하겠다”라고 외쳤다.

범인은 정신병 앓았던 엘리트

그 남자는 저항하는 나가시마 기장에게 식칼을 휘두르며, 점보 여객기를 조종하던 부조종사를 문 밖으로 밀쳐내고 조종실 문을 닫았다. 이때가 오전 11시38분. 나가시마 기장과 단둘이 되자 젊은 남자가 다시 외쳤다. “오시마로 가자.” “요코다 기지로 향하라.”

젊은 남자는 행선지를 이곳저곳 지시하면서 자기가 조종하겠다고 집요하게 졸랐다. 승객 5백17명을 태운 점보 여객기의 조종을 하이재킹 범인에게 맡긴다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고 판단한 나가시마 기장이 좀처럼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젊은 남자는 식칼로 나가시마 기장의 목과 어깨를 수 차례 찔렀다.

하네다 관제탑에는 나가시마 기장과 범인의 대화가 계속 들려왔으나 11시55분께 “으악” 하는 비명과 함께 나가시마 기장의 음성이 끊겼다. 나가시마 기장이 쓰러진 이후에도 점보 여객기는 오시마로부터 요코다 기지를 향해 북상하고 있었다. 납치범이 부조종사 자리에 앉아 점보 여객기를 조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점보 여객기는 오른쪽 왼쪽으로 급선회하면서 고도가 300m까지 강하하는 곡예 비행을 하고 있었다. 요코다 기지 주변에서는 지상 충돌 위험을 알리는 경고음이 울렸다. 조종실 문 밖으로 쫓겨난 부조종사는 경고음을 듣고 더 주저할 수 없다고 결심했다. 마침 하이재킹된 여객기에 탑승한 같은 회사 소속 기장과 함께 온몸을 던져 조종실 문을 열고 안으로 돌입했다.

나가시마 기장은 이미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승객 일부가 가세해 납치범을 조종실 밖으로 끌어냈다. 오후 12시2분께 동승한 기장이 조종간을 잡고 하네다 공항으로 회항해 대낮의 납치극은 51분 만에 막을 내렸다.

그러나 부조종사가 조종실에 조금만 늦게 돌입했더라도 승객 5백17명뿐 아니라 주택가 주민까지 희생되는 대참극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일본에서는 85년 8월 니혼고쿠(JAL) 점보 여객기가 추락해 5백20명이 사망한 대형 사고가 일어났다. 만약 납치된 여객기를 범인이 조금만 더 조종했더라면 14년 전에 버금가는 대참극이 재연될 수도 있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이다.

범인이 일류 대학을 나온 엘리트 청년으로서 비행기 취미에 몰두해 점보 여객기를 납치했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하네다 공항에서 하이재크 방지법 위반 등으로 체포된 범인은 올해 28세인 니시자와 유지(西澤裕司)로 밝혀졌다. 일본 언론 중에는 그가 한때 정신병을 앓은 적이 있어 책임 능력이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신원을 밝히지 않은 곳도 있으나, 니시자와는 유명한 중·고등학교를 나와 국립 히도쓰바시(一橋) 대학 상학부를 졸업한 것으로 드러났다. 부친이 은행원인 중류 가정 출신으로, 어렸을 때부터 수재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니시자와의 엘리트 인생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 것은 대학 재학중 니혼고쿠(JAL)·젠니쿠(ANA)·니혼 에어시스템(JAS) 3개 항공사 입사 시험에 응시했으나 모두 낙방하면서부터이다. 니시자와는 히도쓰바시 대학 재학 때 파일럿이 되고 싶다는 평소 꿈을 실현하기 위해 교통경제학을 다루는 세미나에 참석하고, 비행기를 연구하는 동아리에도 가입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항공 3사 시험에 낙방하고, 마음에도 없던 JR 화물이라는 회사에 취직하면서 니시자와의 인생 항로는 크게 변해 갔다. JR 화물에는 94년에 입사해 히로시마 지방에 배속되었으나 2년 반 만에 퇴직했다. 그후 교토의 경영 컨설팅 회사에도 입사했으나 연수를 시작한 지 5일 만에 자진 퇴사하고 말았다. 니시자와는 집으로 돌아간 뒤 정신병으로 한때 입원하기도 했다. 그가 칩거중 가장 골몰한 것은 비행기 조정 시뮬레이션 게임이었다고 한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요즘 유행하는 비행기 조종 시뮬레이션 게임 중에는 도쿄 만에 걸려 있는 레인보 브리지 밑을 통과하는 장면이 있다. 니시자와도 이같은 시뮬레이션 게임을 즐겼던 것으로 추정된다. 체포된 후 니시자와는 “레인보 브리지 밑을 비행하고 싶어 젠니쿠기를 납치했다”라고 털어놓았다. 니시자와는 또 “게임에 나오는 기체 회전이나 이착륙을 실제로 경험하고 싶었다”라고 밝혔다.

니시자와는 공항 경비 사정에 정통했음이 밝혀졌다. 그는 지난 6월 중순 젠니쿠 등 항공회사와 하네다 공항을 관리하는 회사, 운수성, 일부 매스컴에 공항 경비 체제의 결함을 지적하는 편지와 전자 메일을 보냈음이 밝혀졌다.

<마이니치 신분>과 <산케이 신분>에 보낸 전자 메일에는 ‘하네다 공항에서는 1층 도착 수하물 로비와 2층 출발 로비를 연결하는 계단에 경비원이 배치되지 않아 자유롭게 이동이 가능하다. 이 때문에 지방 공항에서 하네다 공항을 경유하여 다른 지방 공항으로 갈 경우 최초에 맡긴 수하물 속에 예리한 흉기를 집어넣고 이를 하네다 공항에서 건네받으면 얼마든지 기체에 반입할 수 있다’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운수성과 항공회사들은 니시자와로부터 경비 체제 결함을 지적받고 대책을 검토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경비원을 추가 배치하는 데 경비가 들고, 승객이 출발 로비로 들어가는 예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대책 마련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취미에만 몰두하는 ‘오타쿠 족’ 문제 심각

니시자와는 범행 직전 운수성 하네다공항사무소에 전화를 걸어 경비 체제 시정 여부를 직접 확인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니시자와는 체포된 뒤 “경고했는데도 경비 체제 결함을 고치지 않는 데 화가 나 비행기를 납치했다”라고 주장했다. 비행기광인 한 젊은이가 자신의 지적이 정당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식칼을 기내에 반입하고, 시뮬레이션 게임에서 즐기던 조종술을 실제로 시험해 보기 위해 점보 여객기를 납치했다는 어처구니없는 얘기이다.

일본에서는 10년 전에 비디오 수집광인 젊은 청년이 어린 소녀 4명을 유괴해 살인한 사건이 있었다. 체포된 청년의 집에서는 비디오 테이프 5천여 개가 발견되었고, 거기에는 어린 소녀를 살해하는 장면을 촬영한 테이프도 들어 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에서는 자신의 취미에만 몰두하는 ‘오타쿠 족’의 존재가 많은 관심을 끌었는데, 젠니쿠 기를 납치한 니시자와도 타인과의 접촉을 꺼리고 자신의 비행기 취미에만 몰두했었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오타쿠 족이라고 말할 수 있다.

범인의 요구를 거부하다 사망한 나가시마 기장은 파일럿의 귀감으로 칭송을 받고 일본 정부로부터 총리대신상을 추서받았다. 그러나 이륙 직후 기체 안정에 주력해야 할 기장이 조종석을 떠나 조종실 문을 범인에게 간단히 열어주었다는 비판도 높다. 정부와 항공회사는 나가시마 기장의 죽음을 미담으로 돌리기 전에 승객의 안전책을 먼저 확보하라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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