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경제난 이용해 정권 강화
  • 피터 헤이즈(노틸러스 연구소 소장) (sisa@sisapress.com)
  • 승인 1996.07.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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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량·경제난 ‘정권 공고화’에 활용…외국 원조 얻어내 지도력 과시 가능
 
근래 미·북한 관계와 관련해 두 가지 문제가 주류를 이루어 왔다. 과연 북한에 한국전 당시의 미군 포로가 생존해 있느냐 하는 점과, 지난해 7월 홍수 피해와 극심한 경제난으로 북한의 정치 체제가 곧 붕괴하지 않겠느냐 하는 점이다.

이 두 가지 문제를 살펴보면, 미국 정부가 현재 북한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같은 어려움은 부분적으로 북한에 대한 미국의 무지와 빈약한 정보에 기인한다. 또 미국 당국자들이 과거 중국이나 동유럽에서 체득한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북한을 분석해 보려는 잘못된 분석 기법에도 원인이 있다. 중국과 동유럽은 자세한 속사정이 알려져 있지 않은 북한과는 사뭇 다른 지역이기 때문이다.

미군 포로 생존 ‘물증’ 없어

우선 미군 포로 문제부터 따져 보자. 미국 국방부 자료를 인용한 보도에 따르면, 현재 북한의 수용소와 일부 도시에 ‘코카서스인’이 살고 있다. 논리적으로 미군 포로가 아직 북한에 생존해 있을 수는 있다. 한국도 과거 40년 동안 수감해온 한 늙은 북한군 포로(이인모씨)를 북한에 돌려보냈으니 말이다. 그러나 한국전 종전 40년이 지난 지금 60~70대인 미군 죄수가 북한의 수용소에서 징역살이할 가능성은 대단히 적다.

설령 미군 포로가 생존해 있더라도 이들은 극도로 고립되어 있을 것이다. 선전 효과를 위해 지금까지 북한이 이들을 붙잡아 두었을 리도 만무다. 또 문제의 코카서스인을 미국인이라고 단정하는 것도 우습다. 아다시피 코카서스 피를 가진 외국인들이 북한에 살거나 북한을 방문하고 있지 않은가. 그중 많은 사람이 미국인임이 분명하나, 이들이 미군 포로라는 증거는 없다.

개인적으로 서너 차례 북한을 방문한 경험이 있는 필자는 한 영국 시민이 몇년째 북한에서 통역관으로 일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또 제네바에 근거지를 둔 젊은 미국인 부부가 연회 장소에 필요한 조명 시설을 설치하기 위해 북한에 머무르고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 이런 류의 방문객들은 보통 입국사증 없이 북한을 방문한다. 이들은 북한 당국이 발행한 사업 허가증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아무런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한다. 그 때문에 종종 법을 어겨 북한의 수용소로 보내지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이들이 문제의 코카서스인으로 오인될 소지는 충분히 있다. 그럴 경우에도 감옥에 있는 사람이 반드시 미국인이라는 보장이 없으며, 설령 미국인이라 하더라도 미군 포로라는 물증은 없다.

두 번째로, 극심한 경제난에 따른 북한 붕괴설에 관한 것이다. 지난해 홍수는 저지대 농작지를 포함해 상당량의 농토를 황폐하게 만들었다. 북한은 세계식량계획(WFP) 등 여러 국제 기구의 도움과 내핍 생활로 근근히 식량난을 버텨내고는 있으나, 올해도 수확 감소가 불가피한 실정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같은 식량 위기가 김정일에게는 정권을 공고히 할 좋은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군부 지도자로서 김정일은 다리·댐·운하 등 파괴된 각종 시설과 도로를 복구함으로써 영웅적 위치를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외국으로부터 막대한 원조를 얻어냄으로써 주민들에게 자신의 지도력을 한껏 과시할 수 있게 되었다. 북한은 일본과 한국으로부터 식량 지원을 받은 것을 정치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간주한다. 또 미국에 대해서는 94년 제네바 핵합의 실천을 하나의 무기로 활용하고 있다.

북한이 외부 세계에 식량 지원을 요청한다고 해서 이를 북한 내부 붕괴로 연결하는 것은 곤란하다. 북한 주민은 극심한 식량난을 자연 재해나 북한에 대한 금수 조처 같은 외부 요인 탓으로 돌리면서 현재의 식량난을 버틸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현재의 위기는 북한 정권을 강화시켜 줄 것이다.

북한은 현재 전환기적 혼란에 빠져 있는 듯하다. 일부 경제 전문 관료들은 정치나 이념에 관계없이 외국인 투자를 끌어들이려 하는 것 같으나 이를 뒷받침할 사회간접자본이나 재정 기반이 전혀 없다. 어쩌면 개방에 필요한 제도 미비야말로 북한 지도부가 당면한 주된 어려움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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