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도 ''개방'' 놓고 부처간 잿밥싸움
  • 정리·南文熙 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1995.10.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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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LA국제경영연구원 북한 동향 보고서 요약/외교부와 대외경제위 갈등 심해
북한이 변하고 있다. 특히 대외 개방이 본격 논의되기 시작하면서 북한 내부에서는 그 방법론과 성과를 둘러싸고 당·정·군 간에 격렬한 대립 양상도 나타난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활동하고 있는 북한 투자 자문회사인 ‘LA국제경영연구원(대표 제임스 유)’은 최근 대외 전략을 둘러싸고 북한 내부에서 전개되고 있는 움직임을 심층적으로 분석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보고서를 단독 입수해 주요 내용을 발췌했다. <편집자>

북한은 김주석 사망 1주년이 지난 이후, 약간은 스타일을 달리해 대외 접근을 해 나가고 있다. 나진·선봉 자유무역지대의 효율성에 대해서는 북한 내부에서도 논쟁이 있다. 즉, 이 지역 개발 계획이 산업 발전을 순차적으로 파급시키기에는 기간이 너무 짧다는 우려 때문이다. 이 지역 투자를 준비하는 외국 기업도 이같은 걱정을 하기는 마찬가지다. 정비되지 않은 사회 기반 시설 위에 공장이나 그밖의 시설을 건설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지난 7월 이후, 북한은 나진·선봉에 대한 외자 유치 공세를 적극 펴고 있다. 8월 초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북한 투자 전략 세미나 이후 지난 9월22일 북경에서 2차 세미나가 열렸고, 이어 연길(10월), 워싱턴(11월) 등 미국 각지에서 세미나를 준비하고 있다. 북한의 처지에서 나진·선봉 개발은 단순한 지역 개발 이전에 ‘개방’을 시도한다는 의미가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외적으로 나타난 것이 나진·선봉 개발이지만 이에 대한 북한 내부의 평가와 접근 방법은 그 성격이 각기 다르다.

북한 정책 당국자들은 북한 개방에 대체로 다음과 같은 조건이 따라야 한다고 보고 있다. 첫째, 나진·선봉의 개발이 촉진되어야 한다. 둘째, 나진·선봉 개발 결과가 일정 수준(애매한 말이기는 하지만 중국 개방 초기의 2~3년, 즉 82~83년께의 수준을 염두에 두면 된다)에 도달할 경우, 2차 개방 계획을 본격 시행한다. 셋째, 전면적인 개방은 역시 첫째와 둘째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가능하다.

그간 북한이 개방 지역이라고 주장해온 지역에는 얼마간 복선이 깔려 있다. ‘개방’이라는 단어가 주는 미묘한 어감, 그리고 내부 평가의 엇갈림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이다. 단기적인 개방 지역은 ‘공화국 내의 또 다른 공화국’인 나진·선봉과 이미 김주석 시대에 발표한 금강산과 남포 지역이다. 이 중에서 나진·선봉은 개방의 흐름을 좌우할 열쇠이다.

주중 북한대사관 직원 물갈이가 대표적 사례

북한 내부에도 엄연히 갈등이 존재한다. 한국 정부의 각 부처가 대북정책을 둘러싸고 끊임없이 반목하고 갈등하고 있는 것처럼 북한도 비슷한 일을 겪고 있다. 개방이나 대외 정책에 대한 갈등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현저하다. 이로 인해 구심점이 흐트러진 북한 내부의 자멸론도 대두된다. 특히 올해 들어서 내부 갈등은 그들의 정책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심각하다.

1차적인 갈등은 당·정·군이라는 큰 관계 속에서 나타날 것이지만 ‘경제 개발’이라는 주제에 한정해 보면 정무원 내의 갈등이 주목된다. 대미관계를 보면 외교부가 정치·경제 분야 실권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형식적으로 타당한 형태라 할 수 있다. 미국과는 미수교 상태이므로 경제 당국자의 움직임에 한계가 있으나, 이미 유엔에 북한 대표부가 나가 있는 상황에서 외교부가 미국 정부와 기업을 상대하는 데는 무리가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에 반해 아시아 정책(동남아 제외)은 90년대 이후 줄곧 경제 당국이 주도해 왔다. 무역부와 대외경제사업부, 현재의 대외경제위원회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활동은 상당히 적극적이었던 측면도 있다. 이들은 명분상 정책적인 접근 이상으로 경제 우선주의를 강조해 왔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해 내부 문책을 당할지도 모르는 처지이다. 실제 당 조직에서 대외경제위로 편입돼 활동해온 고려민족산업발전협회 등의 혼선 현상은 외국 기업뿐 아니라 내부적인 업무 정리에도 전혀 기여하지 못했음이 분명해졌다. 그로 인해 이미 고려민족산업발전협회는 대외경제위로 흡수 통합된 바 있다.

북한 외교부와 대외경제위 두 부처는 여러 면에서 갈등을 빚을 요인을 안고 있다. 대미관계에서 외교부가 주도한 접근이 성공적인 결과를 보임에 따라 앞으로 2~3년 간은 다른 부처가 개입하기 어렵다. 아울러 다른 부처의 무분별한 접근은 아시아 지역에서 빚어낸 혼선을 재현할 가능성도 다분히 있다. 이에 대한 북한 내부의 판단도 사실상 외교부를 통한 접근이 효과적이라는 쪽으로 쏠리고 있다. 관건은 경제 문제이나, 대미관계 개선에서 경제 부문은 현 시점에서는 외교 부문에 처져 있기 때문에 결정권이 경제 부처에 있지 않다.

아시아 지역 문제에서도 외교부와 대외경제위와의 갈등은 심하다. 북경을 예로 들어 보자. 지난 6월 주중 북한대사관 인원 중 거의 절반 이상의 이동이 있었다. 그간 대외 경제 업무를 담당하던 인물 상당수가 경질되었다. ‘성과’가 없다는 것은 결과우선주의 시각에서 보면 변화를 재촉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결국 경제 부문을 담당하던 인사 중 상당수가 교체됨으로 말미암아 과거 북경을 중심으로 대북 인맥을 구성했던 외국 기업들은 지금까지 ‘헛발질’을 한 셈이 되었다.
아시아 지역에서의 대외경제위 역할도 중국과 일본에 국한하고 있다. 일본의 경우도 대남비서인 김용순이 주도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당이 직접 개입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하고, 쌀 문제와 관련해 오랫동안 일본의 파트너 노릇을 해온 조선국제무역촉진위원회만 활동하고 있을 뿐이다. 대만의 경우도 완전히 대외경제위가 총괄한다고 보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머지 않아 대외경제위의 위상은 대폭 개편 과정을 거쳐 재조정될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 4월 경제협조총국 신설 이야기가 나온 이후, 과연 대외경제위가 확실한 주도권을 쥐고 개발을 주도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심각히 대두되었지만, 아직까지 지지부진하다. 단지 나진·선봉 개발과 관련하여 새로운 전담 부서가 북경과 연길 등에 포진하게 될 것이라는 설이 나오고 있는 정도다.

나진·선봉 전담 대외경협위는 비판대에

경제협조총국이 신설되면 총국 조직 중 나진·선봉지도국이 기존 대외경제협력추진위(대외경협위)를 대체하는 조직이 될 수 있다는 예측도 조심스럽게 나온다. 남북한 쌀회담에서도 전금철이 대외경협위 고문이라는 직함을 사용했지만, 나진·선봉을 전담해온 조직인 대외경협위는 그 역할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어, 내부적으로 비판을 면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현재 대외경협위 위원장 김정우는 지난 수년 간의 활동 성과에도 불구하고 수세에 몰려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더 이상 이 기구의 ‘무성과’를 방치하기 어렵다고 보는 견해가 내부적으로 팽배하다. 그러나 앞으로 대외 경협 활동이 다른 기관에 의해 주도된다기보다는 대외경제위원회라는 틀 속에서 재정비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갈등의 핵은 ‘성과’이다. 비록 대외경제위원회를 교체하지 않는다 해도 아시아 지역 담당 주체에 변화가 없이는 현재의 혼선 국면을 제대로 수습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기 어렵다.

‘북한 정책 당국자들은 이런 점을 모르고 있는가’. 이 질문은 어리석다. 그들이라고 이런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할 리 없다. 단지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손을 대기에는 부처 간의 갈등이 워낙 깊어 조정할 묘수를 찾을 능력이 모자랄 뿐이다.

남북한 경제 협력은 정치와 연계된다. 경제 부문만을 중심으로 본다면, 한국 정책 당국자나 기업들 모두가 ‘어드밴티지 사우스’, 즉 한국우위론을 펴고 있다. ‘돈을 댈 수 있는 곳은 한국뿐이다’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미국이 아무리 북한과 친해지고, 일본이 북한과 협의를 계속해도 그들은 돈을 댈 수 있는 주체가 아니다. 경수로 문제에서도 볼 수 있듯이 대북경협에서 한국의 역할은 거의 절대적이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유의할 점이 있다. 이미 60여 외국 기업들이 나진·선봉에 상주하며 투자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고, 평양에도 고려호텔과 초대소에 상주하다시피 하는 외국 기업인이 꽤 많다. 그러나 한국의 대북관계는 인적 교류는 물론 정책 협의마저 거의 단절된 상태이다. 겨우 쌀회담을 계기로 고위급회담만이 열리고 있을 뿐인데, 이 또한 쌍방의 견해 차이가 커 성과를 기대하기가 쉽지 않다. 한국의 경우, 현재와 같은 비정상적 회담 채널에 심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타개책을 찾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남북 관계를 미·북한 관계와 연계시키는 것도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하기 힘들다. 미국은 이미 연락사무소 개설과 남북 대화 재개를 연계하려 들지 않고 있다. 언제까지나 ‘어드밴티지 사우스’만 외치면서 발걸음을 늦출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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