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교류 재개, 쌀로 첫 술 떴다
  • 朴在權 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1995.06.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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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회담 합의 따라 5만t 곧 제공…북측이 의미 축소해 관계개선 낙관은 일러
한국 쌀 5만t이 북한에 곧 제공된다. 지난 6월17~18일 남북한 양측은 북경에서 차관급 비밀회담을 갖고, 북한에 가능한 한 빠른 시일 안에 1차분 5만t을 제공한다는 데 합의했다. 대금은 앞으로 15~20년에 광물 등 현물로 상환하는 구상 무역 방식으로 하기로 했다.

당초 북한은 예비 접촉 과정에서 30만t을 한국 정부에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북경의 차관급 회담에서 남북한 양측은 추가로 15만t 이상의 쌀을 민간 차원에서 장기 대여 형식으로 제공한다는 데 잠정 합의했다.

정부는 이번에 1차로 5만t을 북한에 제공하고, 나중에 경수로 협상과 남북 대화가 진전하는 상황을 보아 추가로 쌀을 제공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남북한간 합의문에도 ‘앞으로 쌀을 추가 제공할 수 있다’는 포괄적인 규정을 삽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이 북한에 제공하는 쌀은 선박으로 수송해 원산과 남포항에 하역하게 된다. 쌀 15만t은 80㎏ 가마로 1백87만5천가마에 달해, 최근 시중 가격으로 계산할 경우 그 금액은 2천2백50억원에 이른다.

일본 쌀 제공은 늦어질 듯

한국 정부는 이전에도 여러 차례 북한에 쌀을 제공하겠다고 제의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지난 3월과 5월에 대북 곡물 지원 용의를 표명했고, 나웅배 부총리도 조건 없는 쌀 지원을 제의한 바 있다. 번번이 이를 거부해온 북한이 이번에 한국의 제의를 수용한 것은 김일성 사망 1주기인 7월8일과 8·15 광복 50주년 기념식, 10월10일 당창건 50주 기념식 등을 앞두고 식량 문제를 해결해야 할 긴급한 필요성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북경에서 남북한 간에 ‘쌀 회담’이 타결되자 일본도 빠른 시일 안에 북한과의 쌀 협상에 나설 방침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쌀 제공 문제가 해결되면 김용순 북한 노동당 비서가 일본을 방문해 북·일 간의 수교 문제를 논의할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북한에 대한 일본의 쌀 제공은 처음에 예상했던 시기보다 다소 늦어질 것으로 알려졌다. 한·일 양국 정부는 지난 6월16~17일 이틀간 도쿄에서 국장급 비밀 회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일본측은 북경에서 남북한간 쌀 원조 회담이 타결되더라도 일본의 쌀 지원에는 시일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의 한 고위 당국자는 19일 “일본이 이 달 안으로 1차분 30만t을 북한에 보내기로 결정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일본은 북한과 미수교 상태이기 때문에 거래선 및 상환 조건이 훨씬 복잡한 상태라고 밝혔다.

남북한 간의 이번 쌀 협상에 대한 평가는 남북 대화에 어느 정도 기여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번 회담에서 쌀 제공 문제를 합의한 후 한국측 대한무역진흥공사(KOTRA)와 북한측 삼천리총회사는 인도 방법 및 절차를 놓고 몇 차례 더 접촉할 것으로 보인다. 비록 민간 차원의 대화 형식이기는 하지만 이번 쌀 제공으로 1년 가까이 단절됐던 남북 대화의 가느다란 끈은 다시 이어지게 되었다.

한국 정부로서는 이번 합의를 발판으로 삼아 점차 대화 채널을 격상하면서 남북 관계를 정상화해 보겠다는 자세다. 그러나 쌀 지원이 곧 전반적인 남북관계 개선을 보장하게 되리라는 전망은 시기상조이다. 우선 이번 협상에 임하는 북한측의 자세와 합의문이 식량 지원 문제에만 국한해 이같은 낙관적인 견해를 갖기 힘들게 한다. 북한이 이번 접촉에서 김용순이 서명한 아·태평화위원회 명의의 식량 요청 문서만을 제시한 데 유의할 필요가 있다.

아·태평화위원회는 평양축전을 준비하면서 지난해 11월 처음 모습을 드러낸 형식상 민간 단체다. 북한측은 이번 북경회담의 공식적인 성격을 가능한 한 평가절하하려는 자세를 유지해 왔다.

정부는 당초 이번 협상을 통해 이산가족문제 등 여타 남북한 간의 현안을 논의할 수 있기를 기대했으나, 타결 시기를 앞당겨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논의를 쌀문제에 국한하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이번 남북 접촉이 일본 쌀을 받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자세를 당분간 견지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미·북한 경수로 협상이 타결된 데 이어 쌀 문제로 남북한이 일단 교류를 트게 됐다는 점은 북한의 대남 정책 변화와 관련해 크게 주목할 만한 것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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