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성의 대타협, 미·북한 고위급 회담
  • 워싱턴·卞昌燮 편집위원 ()
  • 승인 1998.09.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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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의회 북한 제재·일본 반발로 ‘낙관’ 금물
9월이 시작되기 무섭게 미국 의회는 전 백악관 인턴 직원 모니카 르윈스키 양과의 성 추문에 연루된 클린턴 대통령을 탄핵할 것이냐 여부를 놓고 비상이 걸렸다. 그런 ‘비상 시국’에서도 미국 의회는 북한을 겨냥한 제재 법안을 2건이나 통과시켰다.

하나는 상원 본회의가 지난 9월2일 존 메케인 의원의 이름으로 통과시킨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원 세출위원회가 10일 봅 리빙스턴 위원장 이름으로 통과시킨 것이다. 두 법안의 골자는 북한이 앞으로 핵개발 의혹을 완전히 해소하고 미사일 수출 활동을 중단했다는 사실을 행정부가 입증하지 않으면, 당장 내년부터 3천5백만 달러에 이르는 중유 지원 예산을 내줄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문제의 법안들은 이 달 안에 상·하원의 절충 작업을 거치게 되므로 문구가 다소 완화될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현재 상·하원 모두 북한에 강경한 입장을 고수해 온 공화당이 장악하고 있는데다, 최근 민주당도 북한의 핵 의혹에 대해 공화당 못지않게 목소리를 높이는 분위기여서 법안이 통과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워싱턴에 있는 한반도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의회 산하 연구기관인 의회조사국(CRS) 래리 닉시 북한 담당관은 기자와 가진 전화 통화에서 “의회의 강경 움직임으로 보아 9월은 미·북한 제네바 합의문의 생사를 판가름할 중요한 달이다”라고 평가했다.

이처럼 미국 의회 분위기가 강경으로 돌아선 가운데 미국과 북한은 9월10일 최근 뉴욕에서 끝낸 고위급 회담 결과를 발표했다. 미국 국무부 제임스 루빈 대변인이 발표한 합의 사항에 따르면, 두 나라는 이번 뉴욕 회담에서 서너 가지 현안을 일괄 타결하는 방식으로 합의했다. 우선 미국은 북한에 대해 현재 차질을 빚고 있는 중유 공급과 관련해 당초 10월 말에서 일정을 다소 늦추되 연말까지는 잔여분 28만4천t을 인도하겠다고 약속했다. 또 경수로 본공사도 11월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아울러 미국은 북한을 테러국 명단에서 빼는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회담도 이 달 안에 열기로 했다. 게다가 다음달 중 지난 3월 이래 중단되어 온 한반도 4자 회담도 재개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번 합의 사항의 핵심은 무어니 무어니 해도 미국으로서는 ‘핵문제’였고, 북한으로서는 ‘식량’ 문제였다. 미국은 사용후 핵연료봉 8천여 개 가운데 아직 봉인하지 않은 2백여 개를 연말까지 봉인하겠다는 약속을 북한으로부터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또 현재 최대 현안으로 떠오른 북한의 미사일 문제와 관련해 다음달 1일 회담을 열기로 북한과 합의했다. 특히 영변 부근 지하 시설의 성격을 규명하기 위해 미국이 북한과 이 달 안에 회담을 열기로 한 것도 미국으로서는 수확이 아닐 수 없다.

두 말할 필요도 없이, 핵확산 금지와 대량 살상 무기 확산 금지 등은 21세기 미국의 최우선 안보 정책이다. 북한 문제가 미국의 최우선 안보 현안에 포함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캘리포니아 소재 동북아 안보 연구기관인 노틸러스 연구소 피터 헤이즈 박사는 기자와 가진 전화 통화에서 “동북아에서 미국의 그같은 안보 정책이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는 전적으로 북한에 달려 있다”라고 말했다. 뉴욕 회담의 미국 대표단이 무엇보다 북한의 핵 의혹을 해소하는 데 전력 투구한 것도 그같은 맥락에서였다.
북한, 원칙 고수하며 얻을 것 모두 얻어

물론 북한은 이번에도 원칙을 고수하며 얻을 것은 모두 얻었다는 평가다. 실제로 북한이 봉인을 약속한 사용후 핵연료봉 2백여 개는 원래가 제네바 합의에 따라 북한이 당연히 봉인 작업을 끝냈어야 할 것들이다. 그런데 미국이 금년 들어 당초 약속한 중유 공급을 머뭇거리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북한이 이를 빌미로 봉인 작업을 중단했던 것이다. 따라서 북한으로서는 제네바 합의에 따라 원칙대로 일은 처리하면서도 미국에게서 큰 선물을 받은 셈이다. 그 선물은 미국이 연말까지 중유 잔여분 28만4천t을 모두 제공하고 여기에 더해 식량까지 추가로 지원하겠다고 한 약속이다.

특히 식량 지원과 관련해 미국은 이번 회담에서 잉여 밀과 기타 곡물 30만t을 곧 북한에 제공하기로 약속했다고 알려졌다. 물론 미국의 이같은 선물은 앞서 말한 대로 북한이 일부 사용후 핵연료봉 봉인 작업을 완료하고 영변 지하 시설 사찰 문제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태도를 보인 데 대한 ‘보상’이다.

미국 정부는 북한에 대한 식량 지원은 어디까지나 별도의 ‘인도적인 조처’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이번 뉴욕 협상은 대북 식량 지원이 실은 협상의 유용한 ‘지렛대’로 활용되고 있음을 잘 드러냈다. 이와 관련해 9월10일자 <뉴욕 타임스>는 외교 소식통의 말을 인용해 뉴욕 회담에서 미국은 식량 원조의 주요 조건으로 핵연료봉 봉인 작업을 내세웠다고 보도했다.

한국도 이번 회담 결과에 흡족해 한 것으로 알려진다. 4자 회담 개최나, 미국의 대북 추가 식량 지원, 나아가 영변 지하 시설에 대한 사찰 등 모두가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 정책과 부합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지난 10일 워싱턴에 온 홍순영 외교통상부장관의 ‘외교 발걸음’도 한결 가벼웠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북한의 탄도 미사일(인공 위성) 발사 실험으로 충격에 휩싸인 일본은 불만이 대단한 것으로 전해진다. 미국이 지난 10일 루빈 미국 국무부 대변인의 합의문 발표 때 북한과 합의한 식량 지원 규모를 공개하지 못한 것도 실은 일본측의 불만을 감안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워싱턴 외교 소식통들의 말이다. 일본은 특히 일본 열도가 북한의 미사일 공포에 휩싸여 있는 상황에서 미국이 너무 쉽게 북한의 요구를 들어준 데 대해 강력히 항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 제재 법안 최종 통과되면 제네바 합의 파국”

일본은 8월31일 북한의 미사일(인공 위성) 발사 실험 사건이 터진 뒤 일련의 대북 제재 조처를 취했다. 특히 일본은 이 사건이 터지자 즉각 경수로 분담액 합의에 관한 협정 서명을 유보했다. 워싱턴의 외교 소식통들에 따르면 현재 미국과 한국은 일본이 11월 경수로 본공사 착공 이전에 이 협정에 서명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일본은 그러나 북한이 사전 통고 없이 미사일(인공 위성) 발사 실험을 한 것을 사과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또 다음달 초 열릴 미·북한 미사일 회담에서 미국이 북한의 미사일 개발·수출 중지와 관련해 합의를 끌어내야 한다는 점을 미국측에 강력히 주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번 미·북한 고위급 회담이 그나마 타결된 데에는 두 나라의 정치적 상황이 크게 작용한 점도 지나칠 수 없다. 미국 정부는 무엇보다 현실로 다가온 의회의 북한 제재 법안 채택과 관련해 우선 의회를 안심시킬 수 있는 양보를 북한에게서 끌어내야 했다. 루빈 미국 국무부 대변인이 10일 브리핑에서 ‘만일 이번 고위급 회담이 타결되지 않았다면 상황은 94년 이전으로 돌아갔을 것’이라고 말한 것은, 제네바 합의문을 파기시킬 수도 있는 공화당의 최근 움직임을 의식한 것이다. 물론 북한도 정권 창건 50주년을 앞두고 뭔가 ‘선물’을 얻어낼 필요가 있었다. 두 나라가 일곱 번이나 회담을 열어 합의 도출을 위해 노력한 것은 바로 이런 상황 요인이 크게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경수로 사업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일본이 과거 어느 때보다 북한의 미사일(인공 위성) 발사 실험 문제에 강경한 입장을 보이고 있고, 미국 의회 역시 북한 제재 법안을 통과시킨 상황이어서 이번 미·북한 고위급 회담의 결과를 반드시 낙관적으로 볼 수만은 없는 듯하다. 미국 의회조사국 래리 닉시 북한 담당관은 “이번 미·북한 합의에도 불구하고 의회가 이달 중에 북한 제재 법안을 최종 통과시킨다면, 이는 그야말로 제네바 합의의 파국을 알리는 신호탄이 될 것이다”라고 경고한 것도 바로 그같은 맥락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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