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년 6월 전쟁설의 진상
  • 卞昌燮 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1997.07.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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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온 시걸 박사 증언/카터 중재로 위기 넘겨… 미국대사, 미국인 철수 본국에 자문
정확히 3년 전 이때쯤, 서울은 워싱턴에서 쉴새없이 날아드는 전쟁 위기설로 뒤숭숭했다. 북한이 핵확산방지조약에서 탈퇴하겠다고 위협한데다 사용후 핵연료봉 처리 문제에 모호한 태도를 보이면서 야기된 미·북한간 군사적 긴장 국면은 94년 여름으로 접어들면서 최고조에 달했다.

특히 94년 2월 당시 윌리엄 페리 미국 국방장관 지명자가 상원군사위원회에서 한반도에서 분쟁이 일어날 가능성을 경고한 데 이어 게리 럭 주한미군사령관 역시 3월 같은 위원회에 출석해‘지금 한반도에는 북한 지도부의 오판에 의해 전쟁이 터질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경각심을 높였다. 그러자 한반도 전쟁 시나리오가 여기저기서 난무했다.

미국, 실전 대비해 치밀하게 준비

긴장 국면은 6월 접어들어 절정에 달했다. 바로 전 달 사용후 핵연료봉을 빼내려는 북한의 의도를 확인한 클린턴 행정부는 곧바로 유엔 안보리에 북한에 대한 경제 제재안을 상정하고 한국에 패트리어트 미사일 부대 배치를 포함한 미군의 전력 증강을 명령한 것이다. 미국 국방부는 영변 핵시설을 정밀 폭격하기 위한 비상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고, 이같은 낌새를 알아챈 북한은 대규모 병력 동원령을 내릴 태세였다. 휴전선에서 국지전이라도 벌어지면 곧바로 6·25보다 가공할 상황이 전개될 것이 명백해 보였다. 이런 위기 상황은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전격적인 평양 방문으로 해소되었지만, 미국 국방부는 실전에 대비한 준비를 치밀하게 세워놓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런 비화를 포함해 미국과 북한간 날카로운 핵 갈등의 전말을 파헤친 책이 북한 정책을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본 한 미국인 학자에 의해 오는 연말께 나올 예정이다. 주인공은 89년 6월~95년 8월 <뉴욕 타임스> 논설위원을 지냈고 지금은 뉴욕의 비영리 연구기관인 사회과학연구원(SSRC)에서 일하는 레온 시걸 박사(56). 최근 그는 기자와 만나 “당시 카터가 중재하지 않았더라면 한반도는 서울과 워싱턴의 강경론에 휩쓸려 전쟁 국면으로 치달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특히 그는 94년 벽두부터 전쟁설이 난무하자 당시 제임스 레이니 주한 미국대사가 국무부에 비밀 전문을 보내 주한미군 군속 철수 문제를 심각하게 제기한 사실도 처음 털어놓았다.

그 진상은 이렇다. 한반도에 전쟁설이 난무하던 94년 2월 어느 날. 워싱턴으로부터 시시각각으로 전해지는 전쟁설 보도가 심상치 않다고 느낀 제임스 레이니 주한 미국대사는 국무부에 다음과 같은 요지의 전문을 띄웠다.‘한반도에 전쟁 위기설이 증폭되고 있고, 국방부는 유사시에 대비한 비상계획(contingency plan)을 짠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서울에 나와 있는 모든 미국인들의 안전을 책임진 현직 대사로서 다음 질문에 대한 상부의 지시를 기다린다. 본인은 주한미군 군속들을 모두 본국으로 소개해야 하는가?’

레이니 대사가 이런 전문을 띄운 까닭은 무엇일까. 전쟁 위기설을 기정사실화하고 그에 대한 대비책을 촉구하기 위한 것일까,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었을까. 이 문제와 관련해 레이니씨를 만났다는 시걸 박사는 “대사의 목적은 아무런 근거 없이 확산되고 있던 한반도 전쟁 위기설이 서울에서 불필요한 위기감을 조성하고 있는 것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점을 본국 정부에 명확히 알리는 데 있었다”라고 말했다.

지한파였던 레이니 대사는 워싱턴의 일부 강경론자들이 깊은 생각 없이 제기한 대북 일전론(一戰論)이 휴전선을 코앞에 둔 서울 한복판에서 필요 이상으로 위기감을 고조시키는 것을 경계했던 것 같다. 그의 전문은 곧바로 국무부를 통해 고위 안보 관계자들에게 전달되었고, 결과적으로 워싱턴을 진원지로 한 한반도 전쟁설이 수그러들게 하는 데 크게 일조했다는 것이 시걸 박사의 진단이다.

<뉴욕 타임스> 논설위원을 지내면서 북한 핵문제를 포함한 한반도 전반에 관한 사설을 60여 건 썼다는 시걸 박사에 따르면, 93년 하순 한·미 두 나라 정부는 핵위기를 해소하기 위한 일괄 타결안을 놓고 심각한 내분을 겪은 것으로 밝혀졌다.
그 내막을 살펴보자. 미국과 북한이 고위급 회담을 통해 북한 핵문제를 풀어가던 93년 9월 로버트 갈루치 특사는 서울로 한승주 외무부장관을 찾아왔다. 이 자리에서 한장관은 북한이 전제 조건을 우선 만족시킨 뒤 미국이 응하는 단계적 접근식이 아니라 미국과 북한이 보따리를 풀고 동시에 이득을 취하는 일괄타결식 해법도 가능하다는 뜻을 전달했다. 이런 내용은 갈루치의 관심을 끌었고, 평양측에도 전달되었다. 북한은 그 해 10월 중순 게리 애커먼 미 하원 아태소위원회 위원장을 평양으로 초대해 일괄타결안에 대한 북한의 입장을 전달했다. 핵문제에 대한 해법이 조금씩 풀릴 기미가 보인 것이다.

그런데 그 해 11월23일 문제가 터졌다. 워싱턴을 방문한 김영삼 대통령이 클린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뒤 일괄타결안에 부정적 입장을 보인 것이다. 김대통령은 남북 특사 교환 및 남북회담 문제와 팀스피리트 훈련 중단 및 미·북한 고위급 회담 재개 문제를 연계하고자 했다. 시걸 박사는 “한 국방부 관리는‘한국 때문에 우리는 옴쭉달싹할 수 없게 됐다. 앞으로 몇달 동안 북한과 옥신각신하는 일이 벌어질 게 뻔하다’는 심경을 토로했다”라고 말했다.

일괄타결안을 둘러싼 이런 불협화음은 그 날 저녁 클린턴 대통령이 베푼 만찬에서 정종욱 외교안보수석과 앤서니 레이크 백악관 안보보좌관 간의 막후 담판을 통해 조정되었다. 즉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의 핵사찰을 받아들이고 실무급 남북 회담에 응하면 미·북한 고위급 회담을 재개하고 팀스피리트 훈련도 중단하기로 한 것이다.

“북한 살려야 전쟁 막을 수 있다”

그러나 백악관에서의 막후 조정에도 불구하고 한·미 두 나라는 일괄타결안에 대해 100% 의견 일치를 보지 못했다. 북한은 미국과 고위급 회담을 원했지만 서울의 방해로 번번이 무산되었다. 이런 가운데 미국은 서울의 불만을 무시한 채 일괄타결안에 기초해 대북 협상을 밀고 나갔다.

미국의 일방적 독주를 견제하기 위해 한국 정부는 94년 1월31일 국방부 대변인 성명을 통해‘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의 전면 핵사찰을 받지 않는 한 팀스피리트 훈련을 중단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했다. 그러나 미국은 그 해 3월1일 △팀스피리트 훈련 중단 △핵사찰 실시 △남북 실무 접촉 개시 △3차 고위급 미·북한 회담 재개 등 4개 항을 전격 발표했다.

미국의 일방적인 발표에 서울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은 특사 교환이 선행되지 않는 한 팀스피리트 훈련을 중단할 수 없음을 재천명했다. 시걸 박사에 따르면, 당시 미국 대표로 활동했고 지금은 필리핀 주재 미국대사로 있는 토머스 하버드가 “당시 한국은 남북 특사 교환을 위한 조건을 무척 까다롭게 했다”라고 토로했다고 전했다.

이처럼 팀스피리트 문제를 가지고 한국과 미국이 옥신각신하는 동안 94년 3월19일 특사 교환을 위한 남북회담은 북측의‘서울 불바다론’발언으로 완전히 깨지고 말았다. 그 후 상황은 5월 중순 북한이 영변 원자로를 패쇄한 뒤 사용후 핵연료를 꺼내기 시작하면서 급박하게 전개되었다. 이에 맞서 미국은 북한 제재안을 유엔 안보리에 회부하는 한편 한반도에 패트리어트 미사일 부대를 파견함으로써 북한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시작했다. 이런 와중에 카터가 독자적인 중재 임무를 띤 채 평양의 김일성과 회담을 갖고 북한의 핵동결 약속을 끌어낸 것은 앞서 말한 대로이다.

대북 유화론자인 시걸 박사는, 서울과 워싱턴의 강경론자들이 북한에 대한 원조 지원을 반대함으로써 북한의 붕괴를 바라고 있다고 지적하고,“북한의 경제적 위기를 더 악화시킬 경우 북한 주민의 대량 탈출은 물론 사회 혼돈과 전쟁을 야기할 수 있다”라고 경고했다. 특히 그는 대북 정책과 관련한 한·미 간의 이견이 지속될 경우 미·북한 관계 진전은 물론 4자 회담 실현에도 장애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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