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적’ 빈 라덴은 누구인가
  • 뉴욕·金鎭華 편집위원 ()
  • 승인 1998.09.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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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력·지성 갖춘 이슬람 무장 투쟁 지도자…아프간 전쟁 승리로 위상 굳혀
‘빈라덴을 붙잡아라.’

중동 건설 붐이 한창이던 70년대 중반, 한국의 건설업체들은 너나없이 빈 라덴을 잡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달러가 석유처럼 흘러다닌다는 허풍이 허풍처럼 들리지 않던 그때, 사우디아라비아 건설 시장에서 빈 라덴의 이름을 모르면 간첩이었다. 각종 건설사업, 중장비 판매·대여, 금융, 서비스, 무역업 등 여러 부문에서 굵직한 사업체를 갖고 있던 빈 라덴 그룹은 사우디 왕가와의 친분을 활용해 전국 도처에서 사업을 벌이던 엄청난 재벌이었다.

70년대 사우디아라비아에 진출한 한국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던 그 이름은 지금, 미국인들에게는 공포와 저주의 대상이다. 재벌 ‘무하마드 빈 라덴’은 4명의 처에게서 아들만 20명을 얻었다. 그 막내 아들 ‘오사마 빈 라덴’은 지난달 케냐와 탄자니아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발생한 폭파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고 있는 인물이다.

미국인들에게 ‘오사마’라는 이름이 생소하게 들릴 정도로 그는 잘 알려진 ‘테러리스트’가 아니다. 그러나 이슬람권에서는 80년대 초부터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통해 널리 이름이 알려진 전설적 인물이다.

아프가니스탄 10년 전쟁이 끝나갈 무렵, 오사마는 그때껏 이슬람 세계에서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유형의 지도자이자 투사로 젊은 모슬렘층에 확고히 자리잡고 있었다. 출신 성분, 학력, 종교 철학과 정치 이념, 행동 양식과 현실 감각 등 여러 면에서 그는 이슬람 세계의 카리스마적 지도자로, 전투적 모슬렘 청년들의 우상으로 떠올랐다. 때문에 미국 정부와 정보 당국은 그의 움직임에 과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뉴욕과 워싱턴의 주요 공공 시설, 심지어 도서관에까지 특별경계를 펼 만큼 민감하게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오사마 빈 라덴은 왜 주목되고 있는가? 왜 주목해야 할 인물인가? 국제 분쟁과 테러가 더욱 격화할 것으로 예상되는 다음 세기에, 그의 이름과 모습이 자주 등장하리라는 예상 때문이다. 그는 근대 이슬람 무장 투쟁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리더십을 보이고 있다.

무역업 등으로 번 돈 모두 투쟁 자금으로 사용

오사마는 지난 반 세기 동안 무장 혁명의 지도자를 배출한 적이 없는 사우디 왕국 태생일 뿐만 아니라, 막대한 유산을 넘겨받은 재벌의 아들이다. 전통적 종교 지도자인 ‘이맘’이나 ‘물라’ 출신이 아닌 그는 구도자적인 신앙심과 현대 교육을 겸비한 지식인으로 알려져 있다. ‘행동하는 모슬렘’으로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뛰어들어,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이 전쟁에서 그를 돋보이게 한 것은 조용하고 꾸준한 막후 활동이었다. 50여 나라로부터 자원병을 모집하고, 험준한 고지에 터널을 뚫고 도로를 내어 무자히딘(모슬렘 전사) 게릴라들을 수송하는가 하면, 무기·식량·후생품을 조달하고, 이웃 파키스탄과 이란 벌판에 흩어져 있는 4백만 아프가니스탄 난민에게 병원과 학교를 세워 주고 식량을 공급했다.

그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3억 달러를 중동·아프리카·동남아에 투자해 건설업·금융업·무역업으로 큰 돈을 벌어들이는 사업 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는 이 막대한 돈을 이슬람 혁명과 난민들을 위해 썼다. 과거 무력투쟁 단체들이 헌금과 모금으로 자금을 조달하던 관례를 버리고 자신의 돈을 아낌없이 바침으로써 부패의 유혹과 외부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오사마는 이슬람의 순수성에 집착하면서도 광신적이고 맹목적인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게 둘러싸이는 것을 두려워한다. 옛 소련군이 산악 전투에서 죽을 쑤고 철수하기 직전인 88년 초, 기자는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접경 도시 페샤와르 근처 난민촌을 취재하고 있었다. 어느날 저녁 허술한 찻집에서 쓴 아랍 커피를 마시고 있던 기자에게 미국 <뉴욕 타임스>의 캄 기자가 이렇게 중얼거렸다. “저기 흰옷 입은 뚱뚱한 사람, 아마 빈 라덴의 밀사일 걸세.” 그 뚱뚱한 사람을 자세히 살펴보니 어디서 만난 사람이었다. “당신 닥터 S 아닙니까? 이런 산골짜기에서 무얼하고 있습니까?” 닥터 S는 사업차 온 길이라고 얼버무리고 가버렸다. 그는 80년 여름, 메카 성지 순례차 제다에 들른 파키스탄의 지아 울 대통령, 아라파트 당시 PLO 의장, 터키 이슬람당 아드난 당수의 기자 회견에서 영어 통역을 하던 사우디아라비아 출신 변호사였다. 닥터 S와 같은 지식인들이 오사마 주위에 많으며 그것이 그의 강점이라는 것이 50대 후반 베테랑 기자 캄의 평가였다.

오사마가 직접 거느리는 무장 병력은 3천여 명에 불과하다. 그는 작전을 직접 지휘하거나 계획을 세우기보다, ‘파트와’(종교 지도자의 명령·지시)를 통해 정신적 지침과 방향을 내리는 편이다.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그의 추종자들이 그의 파트와를 행동으로 옮긴다.

오사마의 생활은 수도승과 같이 엄격하고 절제된 면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작년 가을 오사마를 인터뷰한 CNN 기자는 최근 이렇게 서술했다. ‘취재진은 수도 카불 남서쪽 1백50㎞ 지점 칸다하르 부근에 있는 그의 거점을 향해 3천∼3천5백m의 가파른 산길을 따라 짚차로 올라갔다. 가는 도중 끈으로 우리 눈을 가리기도 했다. 빈 라덴이 기거하는 간이 막사와 동굴에는 컴퓨터와 인공위성 통신 시설이 있었고 책과 자료도 많았다. 그는 간간이 기도하며 코란과 일반 서적을 번갈아 읽고 있었다.’

이 모든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뒷받침되어 오사마는 중세 이슬람의 지도자 겸 군 최고 사령관 격인 ‘칼리프’나 ‘쉐이크’의 반열에 오를 정도의 카리스마적 지도력을, 적어도 그의 추종자들로부터 받고 있다.

공과대학 출신인 재벌 아들 오사마가 어떻게 이슬람 혁명에 몰입하게 되었는지, 그 경위는 분명치 않다. 캄 기자에 따르면, 오사마는 10대 초반에 아버지를 따라 이슬람의 대성지 메카와 메디나의 건설 현장을 자주 드나들면서 신앙심이 깊어졌다고 한다.

범이슬람 정권 건설이 최종 목표

기자가 사우디아라비아 출신 동창생의 소개로 오사마를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은 그가 제다의 한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듬해인 74년, 베이루트 해변의 특급 호텔 페니시아에서였다. 비교적 큰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 가무잡잡하면서도 약간 창백하고 깡마른 얼굴로부터 받은 첫인상은 한눈에 그가 부잣집 출신임을 알 수 있게 했다. 당시 중동의 파리라는 베이루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중동 졸부 아들들의 모습은 전혀 아니었다.

그때 기자는 그와 몇 마디를 주고 받았을 뿐이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그는 어느 한국이냐고 물었다. ‘쿠리야 제노비야(남한)’라고 하자 “‘쿠리야 아므리카니(미국쪽 한국)’말이죠?”라고 물어 기자를 좀 언짢게 했던 기억이 있다. 기자로서는 낮은 목소리에 말수가 적고 어딘가 수줍고 우울한 듯한 눈매를 한 그 청년이 오늘의 오사마라고 상상하기가 어렵다.
최근 <워싱턴 포스트>는 영국에서 발행되는 <미들 이스트 미러>를 인용해 오사마의 또 다른 일면을 소개했다. 이 신문은 당시 베이루트의 한 아르메니아인 이발사의 말을 인용해 ‘사우디에서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오사마는 레바논에 자주 놀러가 배꼽춤 댄서나 바 걸들과 어울렸다. 때로는 여자 문제로 다른 남자들과 주먹다짐을 하거나 말싸움을 하던 플레이 보이였다’라고 전했다.

청소년기 오사마에 대한 평가가 어떻든 79년 제다의 킹 압둘아지즈 대학 토목학과를 나온 스물두 살 청년 오사마는 파키스탄을 거쳐 아프가니스탄의 험준한 산악지대로 들어갔다. 그 해 옛 소련군이 이슬람 국가인 이 나라를 침공해 사회주의 괴뢰 정권을 수립해 이슬람교를 ‘능욕’한 사실을 청년 오사마는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프가니스탄 10년 전쟁이 끝난 뒤 고국으로 돌아간 32세의 오사마는 ‘세속화하고 부패·타락·위선·탐욕에 가득찬 사우디 왕가’에 반기를 들었다. 그는 귀국 2년 만에 빈 라덴 가문에서 제명된 뒤 수단으로 추방되었다.

오사마가 결정적으로 반미로 돌아선 계기는 걸프전쟁이었다. 91년 이라크를 침공한 미군은 종전 후에도 ‘중동 유전 보호를 위해’ 계속 사우디아라비아에 주둔했다. 오사마는 미군의 주둔을 ‘점령’으로 치부했다. 아라비아 반도에 미군을 불러들여 이슬람 최대의 ‘성스러운 땅을 더럽힌’ 사우디 왕가도 저주했다.

그는 옛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미군의 아라비아 반도 주둔을 같은 맥락에서 바라보고 있다. 세계의 모슬렘들이 단합해 이슬람 성지를 이교도로부터 해방시킬 의무가 있다고 외치던 오사마는 96년 9월 미국에 대해 ‘지하드’(聖戰)를 선포했다. “미국은 철저히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세계 최대의 도적이며 최대의 테러 국가이다. 우리는 미국과 똑같은 방법(테러)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지난달 케냐와 탄자니아에서의 폭파 사건은 ‘오사마의 선택’이라는 것이 미국 정보 당국의 주장이다. 그러나 그의 추종자들은 오사마의 파트와를 따랐을 뿐이며 오사마가 구체적으로 폭파를 지시한 적은 없다고 주장한다.

오사마의 궁극적 목표는 국경과 지역과 종파를 초월한 범이슬람 정권 건설이다. 세계의 모든 모슬렘은 한 국민이며, 세계의 이슬람 국가는 한 국가라는 것이다.

그는 21세기에 닥쳐올 서양 문명과 이슬람 간의 불가피한 충돌에서 승리하기 위해 차세대 무자히딘을 양성해야 한다는 신념도 갖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승리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다국적 무자히딘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위대한 지도자” “무모한 망상가” 시각 엇갈려

그를 열렬하게 따르는 추종자들은 오사마가 호메이니의 종교적 카리스마, 아라파트의 투쟁력, 나세르의 정치력에다가 빈 라덴가의 사업 능력을 모두 갖춘 ‘21세기의 칼리프’라고 환호한다. 그러나 아랍권의 일부 비판론자들은 오사마를 또 하나의 광신자로 몰아붙인다. 이집트 출신 유엔본부 직원 E.K. 씨는 “60년대 아르헨티나 태생 체 게바라는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 혁명을 이끈 후 또 다른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볼리비아로 향했다. 게바라에게는 적어도 혁명의 로맨티시즘이라도 있었지만 오사마에게는 시대착오적인 유치함밖에 없다. 아프가니스탄의 깊은 산골짜기에 앉아 어떻게 범이슬람 혁명을 이끈다는 것인가. 그는 망상에 젖어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과연 그는 망상가일까? 지난 5월 페샤와르 근교의 아프가니스탄 빈민촌에서는 10여개 이슬람 단체들이 모여 이스라엘과 미국에 대항하는 ‘국제 이슬람 지하드전선(IIFAJC)’이라는 긴 이름의 연합전선을 결성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한 기자가 물었다.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미국과 싸워 승리할 자신이 있는가?” 오사마는 간단히 대답했다. “몇 주 내에 알게 될 것이다.”

그로부터 9주 후, 그의 말은 케냐와 탄자니아에서 폭발했다. 그로부터 다시 2주 후 아프가니탄과 수단에서 미국의 미사일이 터졌다. 르윈스키 성추문에 시달리는 클린턴과 동굴 속에서 기관단총을 옆에 두고 코란을 읽는 오사마 빈 라덴의 스코어는 2 대 2. 두곳에서 두번씩 치고 받았다.

그가 아프가니스탄의 동굴에서 코란을 읽고 있는 한 오사마의 ‘마인 캄프’(나의 투쟁)는 계속될 것이다. 다만 세계는 다음번 대결의 장소와 때를 정확히 알 수 없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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