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모리 ''불명예 귀국''에 착잡한 일본
  • 도쿄·채명석 편집위원 ()
  • 승인 2000.12.07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일본인들, 후지모리 전 페루 대통령 '불명예 귀국'에 착잡 ··· 교민 사회도 불똥 튈까 불안
알베르토 후지모리(62)와 가토 고이치(61). 두 사람은 거의 같은 시기에 일본에서 적전 도망 행위를 저질러 일본뿐 아니라 전세계인으로 하여금 코웃음을 치게 했다.

알베르토 후지모리 페루 대통령은 브루나이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에 참석한 후 지난 11월17일 일본에 도착했다. 일본인 이민 2세 대통령으로서 일본을 방문할 때마다 큰 관심을 모은 후지모리였지만, 그때는 가토 고이치 전 자민당 간사장이 불을 지핀 정쟁 때문에 그가 일본에 도착했다는 뉴스는 한 줄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대통령 사임서를 팩스로 페루 의회에 보낸다는 사실이 전해지자 일본 언론들도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정쟁의 틈바구니에서도 지면과 화면을 할애해 관련 뉴스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후지모리는 결국 가토가 백기를 든 11월20일 대통령 사임서를 페루 의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페루 의회는 후지모리의 사임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고 ‘도덕적인 무능력’을 이유로 11월21일 그를 파면했다. 그가 1989년 개혁신당을 만들어 페루 대통령에 당선된 지 11년 만의 일이다.

프랑스와 미국 유학을 마친 그가 국립 농과대학장을 지내면서 대통령 후보로 나서자 페루의 일본인 교민 사회에서는 반대하는 소리가 높았다고 한다. 그것은 1940년 5월 수도 리마 시내에서 대규모 반일 시위가 일어나 일본인 6백20여 명이 학살된 쓰라린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우려는 1996년 말 현실로 나타났다. 페루의 좌익 게릴라들이 후지모리 정권을 전폭 지원하고 있는 일본 정부를 견제하기 위해 일왕 탄생일 축하 파티가 열리고 있던 일본대사관저를 무장 점거한 것이다.

페루의 일본인 교민 사회는 후지모리가 급작스레 사임하자 또다시 곤경에 처했다. 후지모리는 자신이 일본인 이민 2세라는 것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일본인의 장점인 ‘정직·근면·기술’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또 “나의 언어는 스페인어지만 나의 침묵은 일본적이다”라고 강조해 왔다.

그러나 그는 11년 재임하면서 정직과 근면보다는 ‘문민 군사독재’라고 불린 고문·공포 정치를 널리 확산하고, 해외에 엄청난 부를 빼돌려 부정 축재에 열을 올린 일밖에 한 일이 없다.
충격 받은 고향 주민들 할 말 잃어

이 때문에 약 8만명에 달하는 일본인 교민 사회는 ‘사무라이 대통령’에 대한 복수의 칼끝이 언제 자기들에게 겨냥될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다. 벌써 리마의 거리에는 ‘후지모리는 일본으로 도망쳤다’ ‘일본인은 자기 나라로 돌아가라’는 플래카드가 나붙고 있다고 한다.

후지모리 정권을 등에 업고 페루 경제를 좌지우지하려 했던 일본 기업도 마찬가지이다. 일본무역진흥회에 따르면, 페루에는 현재 광산·식품·전기 분야에서 일본 회사가 40여 개 진출해 있다. 그러나 새로 등장한 발렌틴 파니아구아 정권이 여론을 의식해 일본 기업들에 대한 세제 우대 조처 등을 폐지할 경우 일본 기업들은 엄청난 손실을 감수해야 할 판이다.

후지모리는 잘 알려진 대로 구마모토(能本) 현에서 태어난 부친이 페루로 이민해 낳은 자식이다. 때문에 구마모토 사람들은 후지모리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손뼉을 치며 환영하면서, 대통령이 된 그를 고향으로 초청한 바 있다. 구마모토 사람들은 또 지난해 페루 일본인 교민 사회가 이민 100주년을 맞자 리마 시내에 기념 병원을 지을 수 있도록 많은 돈을 모금해 기부했다.

그러나 후지모리가 페루로 귀국하지도 않은 채 일본에서 사표를 던졌다는 소식을 들은 구마모토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일본 언론들이 현지에서 전한 바에 따르면, 한 주민은 “이 지역에서 일국의 대통령이 탄생했다고 해서 모두들 흥분했었다. 후지모리가 선거에서 패해 일본으로 돌아왔다면 모르겠지만, 도쿄의 고급 호텔 스위트룸에서 대통령 직을 내팽개쳤다는 소식에 이 지역 사람들은 그저 쉬쉬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얼어붙은 지역 정서를 밝혔다.

일본 정부도 후지모리 때문에 큰 혹을 붙이게 되었다. 후지모리는 지난 11월21일 밤 숙소인 뉴 오타니 호텔에서 처음으로 보도진과 15분간 회견하고, 당분간 일본에 정주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그는 일본에 정치적 망명을 신청할 의사가 없다고 밝혔다. 그의 말인즉 라틴아메리카 나라에는 망명 제도가 있으나 일본에는 그런 제도가 없기 때문에 외무성에 공식으로 일본에 정주할 수속을 밟겠다는 것이다.

후지모리는 또 이 기자회견에서 “내가 페루인이라는 사실을 예순 두 번이나 확인해 왔으나, 일본에서 이민 온 양친이 페루의 일본영사관에 출생계를 제출했었다”라며 자신이 일본 국적을 소지하고 있음을 은근히 과시했다.

일본의 옛 국적법에 따르면, 부친이 일본인이면 페루에서 태어난 이민의 자녀도 일본 국적을 소유할 수 있었다. 게다가 1985년 국적법이 개정된 후에도 이중 국적을 갖고 있는 미성년자가 성인이 된 후 국적을 선택하지 않았을 경우, 일본 국적을 소지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따라서 후지모리의 부친이 일본영사관에 출생계를 제출했다면 후지모리는 일본 국적을 갖고 있는 셈이 된다.
일본 언론 “페루로 돌아가라” 권고

이에 대해 일본 외무성은 “현시점에서는 아무런 요청이 없으나, 후지모리측으로부터 요청이 있으면 법무성과 협의해 결정하겠다”라고 밝혔다.

후지모리가 만약 일본 국적을 갖고 있다면, 페루 정부로부터 제기되는 형사 소추를 모면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일본과 페루 사이에는 범인인도조약이 체결되어 있지 않지만, 페루 정부가 후지모리의 신병을 넘겨 달라고 요청할 경우 일본 정부는 그가 일본 국민이라는 이유를 들어 거부할 수 있다는 얘기이다.

그러나 실제로 페루 정부가 후지모리 신병 인도 요청을 해올 경우 일본 정부가 이를 완전히 묵살할 수는 없는 형편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페루에는 현재 8만명에 달하는 일본인이 거주하고 있으며, 일본 기업이 40여 개 진출해 있다. 만약 신병 인도 요청을 거부할 경우 1996년에 일어난 일본대사관저 점거 사건과 같은 비극이 또다시 일어날 수도 있다.

그래서 일본 언론들은 사설을 통해 후지모리에게 귀국을 종용하고 있다. 예컨대 <아사히 신분>은 ‘우선 귀국해 국민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라’고 권고했고, <산케이 신분>은 ‘귀국해 지도자로서 유종의 미를 거두라’고 충고했다.

우연의 일치일는지 모르지만 후지모리는 국민을 저버리는 행위를 파렴치하게 저질렀고, 가토는 유권자를 기만하는 행위를 파렴치하게 저질렀다. 일본인을 상징하는 사무라이 정신과 정직성과는 거리가 먼 행동들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