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발로 끝난 일본 모리 총리 ''퇴출 작전''
  • 도쿄·채명석 편집위원 ()
  • 승인 2000.12.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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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국회 모리 내각 불신임안 부결 ··· 변심한 주모자 가토 의원에 비난 빗발
20세기 최후의 일본 정치 대란이 ‘찻잔 속의 태풍’으로 막을 내렸다.

일본 국회는 지난 11월21일 새벽 민주·자유·사민·공산 등 야 4당이 제출한 모리 내각 불신임안을 찬성 1백90, 반대 2백37로 부결했다. 야당에 동조해 모리 내각 불신임안에 찬성표를 던지겠다던 가토파 의원 21명과 야마사키파 의원 17명이 돌연 태도를 바꾸어 본회의에 불참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가토파 회장 가토 고이치(加藤鑛一) 전 자민당 간사장이 야당과 합세해 모리 정권을 전복하려 했던 정치 쿠데타는 일단 불발로 끝났다.

가토 전 자민당 간사장이 모리 내각 타도를 외치며 궐기한 때는 약 2주 전. 그가 정치 평론가들과 회식하는 자리에서 다음 조각은 자기가 직접 담당하겠다며 모리 내각 타도를 다짐했다는 발언이 전해지면서부터이다.

또 가토의 정치적 동지인 야마사키파 야마사키 다쿠(山崎拓) 전 자민당 정조회장이 자유당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 당수와 회담했다는 뉴스가 전해지면서 가토가 일으키려는 정변이 모리 내각 타도에 그치지 않고 야당을 포함한 일대 정계 재편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추측이 무성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추가경정예산안을 이번 국회에서 처리해야 하고, 내년부터 중앙 부처가 1부12성청제로 바뀌게 됨에 따라 12월 중에 내각을 개편해야 하는 정치 일정을 감안해, 가토가 왜 이 시기에 정변을 일으키려 하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사람이 많았다. 특히 가토는 결단력이 부족하다는 평을 받고 있던 터여서 그런 의문을 더욱 부채질했다.

가토는 부친이 국회의원을 지낸 이른바 ‘2세 의원’이다. 그는 부친이 타계하자 지역구를 물려받아 금배지를 달고 승승장구해, 오부치 총재 때 당 간사장을 맡아 ‘포스트 오부치’의 선두주자로 부각되었다.
그러나 사회당과 사키가케와의 연립 유지를 주장했던 그는 자유당·공명당과 연립을 주장하는 오부치파와 대립해 스스로 비주류로 전락했다. 가토는 그 때문에 오부치파(중의원 의원 60명)에 이은 제2위(45명)의 파벌 세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오부치 총리가 급사한 후 파벌 세력 3위인 모리파의 모리 회장이 총리 자리를 승계하는 것을 가로막지 못했다.

가토는 모리 정권이 탄생한 후 분을 삭이지 못해 주위에 이렇게 불만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나는 총재 선거에 출마해 싸웠으나, 포스트 오부치(모리 총리)는 밀실에서 정해지고, 최근에는 가메이(현 자민당 정조회장)가 설치고 있어 입맛이 떨어진다.” 이런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가토가 궐기한 것은 일본을 개혁하기 위한 일생일대의 결단이라기보다는 주류파로부터 권력을 탈취하기 위한 거사에 가깝다.

가토의 비장한 결단이 언론의 보도를 타고 전해지자 시중에서는 그를 격려하는 소리가 높아갔다. 가토가 개설한 e메일에는 1주일 동안 수십만 건의 메일이 쏟아졌다.

가토는 이러한 여론의 지지를 등에 업고 모리 내각 불신임안을 통과시킬 자신이 100% 있다고 기염을 토했다. 그는 불신임안 표결이 예정된 11월20일 아침만 해도 자신의 파벌과 야마사키 파벌이 일치 단결해 본회의에서 찬성표를 던지겠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표결을 불과 1시간 앞둔 저녁 8시께 가토는 맥없이 백기를 들고 주류파에 투항하고 말았다.

가토는 그후 자신의 파벌 의원을 모아 놓고 수적 열세 때문에 승리를 확보하지 못했다고 밝히면서, 찬성에서 결석으로 전술을 변경한 것은 힘을 아끼기 위한 ‘명예로운 후퇴’였다고 변명했다.
정계 개편 기대에 찬물

정국 변화를 기대했던 언론과 여론은 가토의 어처구니없는 투항에 크게 실망했다. <아사히 신분>은 ‘가토씨여, 불쌍하다’는 제목을 내걸고 “무능한 모리 정권을 무턱대고 연명시키고 있는 자민당의 무기력에 정면 도전한 것으로 보였던 가토씨의 조반극이 촌극으로 끝났으니 누가 정치의 미래를 믿을 수 있을 것인가’라고 가토의 행동을 준엄하게 비판했다.

일본 언론들이 소개한 시민들의 목소리도 “가토의 투항은 적전 도망 행위다” “밀실 정치를 비판했던 가토가 밀실의 담합에 따라 자신의 의지를 번복하는 우를 범했다” “결국 그도 자민당 정치가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우물안 개구리였다”라고 비난 일색이었다.

가토의 언질을 굳게 믿고 국회에 불신임안을 제출한 야당의 실망도 대단하다. 정변을 일으키는 동안 가토와 휴대 전화로 연락을 주고받았다고 알려진 자유당 오자와 당수는 가토가 출석에서 결석으로 마음을 바꾸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지금까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불신임안이 부결된 것은 헌정 사상 처음이다”라며 허탈해 했다고 한다. 민주당도 다른 야당과 협력해 11월20일 불신임안을 제출했다가 가토의 배반으로 큰 낭패를 보았다.

반면 적전에서 도망한 가토는 치명적인 정치적 타격을 입었다. 우선 그는 ‘포스트 모리’를 겨냥한 대권 경쟁에서 확실히 탈락했다. 당내 제2위 파벌인 가토파가 이번 소동으로 두 쪽으로 갈라질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가토가 야당과 손잡고 자신이 속해 있는 정당의 내각을 타도하려는 이른바 ‘금지된 수’를 쓴 것도 불씨로 남을 것이다. 자민당의 다른 파벌에도 모리 총리로는 더 이상 안된다는 생각을 가진 젊은 의원이 상당수 있었으나, 가토가 야당의 힘을 빌려 불신임안을 통과시키려는 것을 보고 등을 돌린 것으로 알려졌다.
모리 총리와 자민당도 가토 못지 않게 큰 타격을 입었다. 자민당 주류파는 불신임안이 부결되었기 때문에 일단 모리 총리가 계속 총리 자리를 유지하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국민의 지지도가 형편없는 모리 총리를 간판으로 내걸고서는 내년 여름 참의원 선거를 치를 수 없다는 소리가 주류파 중의 주류인 최대 파벌 하시모토파를 중심으로 높아지고 있다. 내년 9월 치러질 총재 선거를 3∼4월로 앞당겨 당의 간판을 고노 외상이나, 고이즈미 전 우정상, 고무라 전 외상으로 교체하자는 안이 유력하게 거론되는 것도 그 한 예이다.

정계 개편의 긴 막이 시작되기도 전에 가토는 스스로 막을 내렸다. 그러나 길게 보면 이번 정변극이 21세기를 향한 정계 개편 드라마의 시작으로 기록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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