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국민 "2만엔 상품권, 줘도 싫다"
  • 도쿄·蔡明錫 편집위원 ()
  • 승인 1998.12.10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일본, 2만엔어치 상품권 지급 논란…국민·재계 “경기 활성화에 도움 안된다” 반대
일본 정부는 지난 11월16일 역사상 최대 규모인 24조엔 긴급 경제 대책을 발표했다. 그러나 도쿄 주식 시장은 이 날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미국 신용평가회사 무디스는 일본 정부의 긴급 경제 대책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17일 일본 국채의 신용 등급을 최고 등급인 Aaa에서 Aa1로 한 등급 강등했다.

경제 대책을 발표할 때마다 시장이 냉담한 반응을 보이자 일본 정부 당국자들과 자민당 집행부는 속을 부글부글 끓이고 있다. 이리 뛰고 저리 뛰어 경기 대책을 마련해도 시장은 코웃음을 치고, 경기를 부양하는 데 아무런 효험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울분을 삭이려는 듯 자민당은 최근 야당인 공명당이 제안한 ‘상품권 구상’을 받아들여 경기 부양의 마지막 카드로 활용하기로 결정했다. 자민당과 공명당이 합의한 ‘상품권 구상’이란 2만엔어치 상품권을 15세 이하 자녀를 가진 전국의 모든 세대와 65세 이상 저소득자들에게 주어 소비를 자극한다는 계획이다.

자민당, 공명당 포섭하려고 상품권 배포

양당은 다음 임시국회에 관련 법안을 제출해 내년 4월부터 상품권을 일본 전국에 뿌릴 계획이다. 상품권 총액은 약 7천억엔 규모로 예상되며, 천엔권 20장으로 발행될 상품권의 유효 기간은 6개월로 한정할 예정이다. 또 상품권 발행·인쇄·지급 업무를 각 지방자치단체에 일임해 일정한 지역 안에서만 유통되도록 할 방침이다.

정부 당국이 상품권을 뿌려 경기를 진작한다는 것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기발한 아이디어이다. 이 아이디어가 경기 부양책으로 등장하게 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상품권 구상을 처음 제안한 공명당에 따르면, ‘소비가 미덕이 아니라 저축이 미덕’인 일본 사회에서는 세금을 줄이는 등의 경기 대책이 큰 효과를 얻지 못한다. 예컨대 일본 정부가 예전에 2조엔 규모의 감세를 실시했지만 실제로 소비된 것은 약 1조엔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모두 저축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는 위축된 소비를 진작하고 경기를 자극하기 위해서는 소비세를 내리는 것이 중요하지만, 일본에서는 소비세를 3%에서 5%로 인상해 늘어난 세수 4조엔을 직접 소비자들에게 환원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경기 부양책이라고 공명당은 주장한다. 공명당은 소비세 인상분을 환원하는 방법을 현금으로 할 것인지, 상품권으로 할 것인지를 놓고 노심 초사했다고 한다.

현금으로 환원할 경우 일본인들의 저축 성향으로 보아 태반이 소비보다는 저축으로 돌려질 가능성이 높다. 10년 전 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 내각 때 ‘고향 창생 기금’이라는 명목으로 각 지방자치단체에 일률적으로 1억엔씩 지급한 예가 있지만 중앙 정부가 직접 상품권을 제공한 경우는 없다. 현재 상품권 제도를 도입해 지역 경기 활성화를 꾀하는 지방자치단체가 한둘이 아니다. 공명당은 이같은 성공 사례를 참고해 최종적으로 총액 4조엔, 국민 1인당 3만엔어치 상품권을 제공하기로 당내 의견을 통일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공명당의 상품권 구상을 제안받은 자민당은 처음에는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코웃음을 쳤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정부가 국민에게 상품권을 발급한 전례가 없다”라고 지적하면서, 경제가 어렵다고 해서 국민에게 마구잡이로 상품권을 뿌렸다가는 세계의 조롱거리가 된다고 주장했다.

상품권을 발급하는 데 드는 비용을 어떻게 마련하느냐 하는 문제도 상품권 구상이 처음부터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한 이유이다.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내각의 경제 주무 부처인 대장성의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장관은 공명당의 상품권 구상을 한마디로 ‘무식한 소리’라고 일축했다. 대장성 관료들은 “차라리 현금을 비행기에 싣고 뿌리라고 해”라고 내뱉었다. 그러나 공명당의 상품권 구상을 ‘유치하기 그지없고, 경제 원리를 무시한 무식한 소리’라고 폄하하던 자민당이 태도를 돌변해 한달 전부터 ‘좋은 아이디어’라고 칭찬하기 시작했다.
자민당은 지난번 금융 재생 관련 법안을 국회에서 통과시킬 때 참의원에서 과반수가 미달해 야당 수정안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굴욕을 맛보았다. 자민당이 참의원에서 과반수 세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공명당과의 연립이 무엇보다 절실했다. 만약 공명당이 연립 정권 참가를 고사하더라도 공명당이 야당 세력에 가담하는 것을 극력 차단할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 보면 자민당이 돌변해 상품권 구상에 동의한 것은 참의원에서 공명당을 끌어안기 위한 정략적 전술이다.

만약 다음 임시국회에서 상품권 관련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내년 4월부터 각 지방자치단체를 통해 상품권 2만엔어치를 지급한다. 그러나 의외로 일본인 대부분은 상품권 지급을 별로 반가워하지 않는다. <아사히 신분(朝日新聞)>이 최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상품권 지급에 찬성하는 사람은 26%에 그쳤다. 대신 반대하는 사람이 62%를 차지해 경기 악화가 일본인의 양식까지 좀먹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상품권 지급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지적한 주요한 반대 이유는 소비 진작보다는 고용 기회를 늘리는 것이 선결 과제라는 것이다. 말을 바꾸면 갈수록 실업률이 늘어나는 판에 2만엔짜리 상품권을 받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얘기이다. 그럴 여유가 있으면 정부는 직장부터 보장하라는 것이다.

상품권 지급에 반대하는 사람이 40∼50대에 집중해 있는 것도 흥미롭다. 그것은 상품권이 일본 국민 모두에게 지급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과 관계가 있다. 40∼50대의 자녀는 대부분 15세 이상이다. 더구나 본인들은 처음부터 지급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다.

상품권 지급을 쌍수를 들고 환영해야 할 유통업계의 반응도 시큰둥하다. 일본 유통업계는 식어 버린 소비열을 되지피기 위해서는 소비세를 일정 기간 동결하거나 인하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유통업계가 최근 소비세만큼을 할인 판매하는 ‘소비세 환원 바겐 세일’을 실시하자 매출액이 두 자릿수 이상 늘어났다.

경제 전문가 “상품권 지급은 바보 짓”

유통업계는 이같은 실험이 증명하듯 소비를 진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소비세에 손을 대야 한다는 입장이다. 유통업계는 또 상품권이 뿌려지면 일시적으로 소비가 늘겠지만 ‘반짝 쇼’로 끝날 것이라고 주장한다.

재계 총사령탑인 게이단렌(經團連)도 상품권 구상에 소극적이다. 게이단렌 간부들은 ‘소득세를 소폭 감세한 데 대한 보완 조처’라고 환영을 표하면서도 ‘대폭적인 감세 조처가 더 효과적’이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일본 경제 전문가들도 상품권 배포야말로 10년 전 다케시타 내각 때 실시한 ‘고향 창생 1억엔 사업’과 똑같은 전철을 밟게 될 ‘어리석은 짓’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당시 다케시타 내각은 경기가 호황이었음에도 지방 경제를 활성화한다는 명목으로 총 3천3백억엔을 들여 각 지방자치단체에 1억엔씩 배부했다. 그러나 지방자치단체가 1억엔으로 벌인 사업의 대부분이 지역 활성화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이다.

상품권 구상은 이같은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다음 임시국회에서 통과될 가능성이 크다. 상품권 구상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지금 일본은 경기 회복에 듣는다는 약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가리지 말고 복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