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신냉전은 오지 않는다
  • 워싱턴·변창섭 편집위원 ()
  • 승인 2001.04.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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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 잇는 '악재' 불구, 파국 피할 듯…

부시 행정부는 '외교적 해법'에 치중


"더심각한 상황으로 빠져들기 전에 사태가 진정되었다고 본다. 앞으로 양국 관계와 관련해 회복하지 못할 아무 것도 없다."


지난 4월11일 중국이 억류한 미군 정찰기 승무원 24명을 석방하기로 한 직후 콜린 파월 미국 국무장관이 한 발언이다. 파월 장관의 말대로, 이번 정찰기 사건으로 험악한 지경까지 치닫던 미·중 관계는 일단 최악의 국면은 벗어난 것 같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 들어 미·중 관계의 앞날은 말 그대로 산 넘어 산이다. 사실 전임 클린턴 행정부 때 그나마 회복 기미를 보이던 미·중 관계는 부시 행정부 출범 초기부터 긴장의 연속이었다. 무엇보다 국가미사일방어(NMD) 문제로 미국은 중국의 강력한 반발을 샀다.


타이완 무기 판매 등 갈등 요인 '산 넘어 산'




특히 타이완을 전역미사일방어권에 포함하려는 미국측 구상이 알려지면서 중국의 대응 수위는 높아만 갔다. 지난 3월 중국이 올해 국방 예산으로 지난해보다 18% 가까이 늘어난 1백72억 달러를 책정한 것도 미국을 향한 일종의 경고다. 여기에 더해 최근 중국 인민해방군 소속 대령이 미국으로 망명한 사건이나, 중국 당국이 미국 영주권자인 중국인을 스파이 혐의로 체포한 것 모두가 부시 행정부 출범 후 터진 것들이다. 그런 마당에 4월1일 미군 정찰기와 중국 전투기 간에 충돌 사고가 벌어진 것이다.


이번 정찰기 사건말고도 앞으로 미·중 관계를 시험할 '악재'는 도처에 널려 있다. 당장 부시 행정부는 4월24일까지 타이완에 약 10억 달러 상당의 무기를 판매할지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타이완이 수입을 요청한 무기의 핵심은 요격 미사일 체제를 갖춘 이지스급 구축함이다. 중국은 타이완을 겨냥해 단거리 미사일을 약 3백기 배치해 놓고 있다. 타이완이 이지스급 구축함을 갖출 경우 중국의 미사일 위협은 사실상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중국은 부시 행정부에 대해 이지스급 구축함 판매를 '중국 주권에 대한 심각한 모욕'으로 간주하고 강력히 대응한다는 방침을 천명했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는 이번 정찰기 사건이 터지기 훨씬 전에 의회에 무기 판매를 승인하겠다고 통고한 바 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중국의 위협 요인이 다시 한번 확인된 만큼 부시 행정부는 타이완에 무기 판매를 강행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여기에는 의회의 친타이완계 공화당 보수파 의원들의 엄청난 압력도 가세하고 있다.


5월에는 천수이볜 타이완 총통에게 미국 통과 입국 비자를 내주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가 부시 행정부를 기다리고 있다. 클린턴 행정부는 1995년 리덩후이 당시 타이완 총통이 모교인 코넬 대학을 방문하기 위해 신청한 통과 비자를 내주었다가 중국의 격렬한 항의를 받은 적이 있다. 비록 천수이볜 총통의 최종 목적지가 중남미이기는 하지만, 중국은 그에 대한 통과 비자 발급을 '하나의 중국' 정책을 위반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부시 행정부는 공화당 우파를 의식해 비자 발급을 허가하는 쪽으로 기운 것 같다.


오는 6월 하순에는 중국에 교역상의 최혜국대우 지위를 연장하는 문제가 기다리고 있다. 현재 미국과 중국의 교역 규모는 연간 1천1백50억 달러에 이를 정도로 막대하다. 중국이 미국이라는 거대한 수출 시장에서 톡톡히 재미를 보게 된 결정적인 비결도 다름아닌 최혜국지위 덕분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아무리 값싼 중국 상품이라도 미국의 높은 관세 장벽을 뚫을 수 없다. 중국은 이미 지난해 클린턴 행정부와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문제에 타결을 본 상태다. 그러나 중국이 세계무역기구에 정식으로 가입하려면, 우선 미국 의회의 조건부 최혜국대우라는 '족쇄'로부터 풀려나야 한다. 이런 구속에서 풀려나야 중국은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낮은 관세율 혜택을 받으며 미국 시장에 자유롭게 진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4월12일 〈워싱턴 포스트〉는 '중국 당국이 이번 정찰기 사건을 처리하는 것을 보고 의회내 보수파 공화당 의원들의 태도가 상당히 굳어졌다'고 보도했다. 특히 이 신문은 헨리 하이드 하원 국제관계위원장의 말을 인용해, '세계무역기구 가입이든, 타이완에 대한 무기 판매든 중국과 관련한 그 어떤 문제에도 의회의 태도는 별로 곱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미국 역대 행정부, 격렬한 외교전 뒤 관계 회복


긴장의 연속 : 미군 정찰기 사건으로 일합을 겨룬 중국의 장쩌민 주석(왼쪽)과 미국의 부시 대통령(오른쪽). 두 사람은 앞으로 부딪쳐야 할 일을 잔뜩 쌓아놓고 있다.

부시 대통령이 지지 기반인 공화당 보수 우파를 의식해 이러한 현안들을 친타이완 위주로 처리할 경우 미·중 관계는 자칫 1989년 천안문 사태 직후의 '신냉전' 시대로 되돌아갈 우려마저 없지 않다. 그러나 역대 행정부의 전례를 살펴볼 때 부시 행정부도 결국은 미·중 관계를 파국으로 끌고가는 극한 상황만은 피하리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이를테면 1980년대 레이건 대통령의 경우 취임과 동시에 타이완에 대한 대대적인 무기 판매 방침을 천명해 중국과 격렬한 외교전을 벌였다. 그러나 그도 결국은 1982년 타이완에 대한 무기 판매를 단계적으로 완화한다는 내용의 상하이 코뮤니케에 서명함으로써 중국과 관계 회복을 도모했다.


1993년 취임과 함께 중국의 인권문제를 최혜국대우와 연계하겠다고 공언했던 클린턴 대통령은 어떤가. 중국은 클린턴 행정부의 그런 위협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국내 반체제 인사들을 검거, 투옥했다. 이런 인권 유린 사태에도 불구하고 클린턴 행정부는 1993년 출범 이후 지난해까지 단 한 차례도 빼놓지 않고 최혜국대우를 연장해 주었다. 여기에는 양국의 전략적 관계 증진이라는 정치적 이유도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상업적 이해 관계가 깔려 있다. 중국 시장에는 제너럴 모터스·AT&T·모토롤라·보잉·듀퐁·카길 등 미국 굴지의 기업들이 일찌감치 진출해 있어 행정부가 업계의 이해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취임 후 첫 외교 시험대라고 할 정찰기 충돌 사건을 겪은 부시 대통령은 어떨까. 그는 중국을 전략적 동반자로 규정한 클린턴 행정부와 달리 '전략적 경쟁국'으로 재규정했다. 이번 정찰기 충돌 사건 처리 과정에서 부시 행정부가 보여준 강경 태도는 이같은 인식에서 나왔다는 인상이 짙다. 그런데도 부시가 중국을 제재하는 극한 수단보다는 '미국의 유감 표명과 중국의 정찰기 승무원 석방'이라는 외교적 해법을 채택했다는 것은 유의할 만하다. 앞으로 유사한 사태가 벌어질 경우 부시 행정부의 대응이 외교력을 통한 해법에 치중할 것임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일부 외교 전문가들은 이번 정찰기 사건을 전화 위복의 계기로 삼아 부시 행정부가 더더욱 중국과 협력해야 한다는 의견도 내놓고 있다. 주중대사를 지낸 윈스턴 로드가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뉴욕 타임스〉와의 회견에서 '이번 사건을 계기로 양국은 남아시아의 핵문제와 페르시아 만의 안정 등 전략적인 국제 현안에 대해 완전한 대화를 회복해야 할 것'이라고 권고했다. 부시 행정부가 1972년 닉슨 대통령의 역사적인 중국 방문으로 트인 미·중 관계의 물꼬를 다시 틀어막기는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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