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용 정책 추진하되 조건 더욱 까다롭게
  • 정옥임 (세종연구소 연구위원) (sisa@sisapress.com)
  • 승인 2002.06.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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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 정부 고위 관리들이 말하는 미국의 대북 전략
필자인 정옥임 연구위원은 지난 5월29일∼6월6일에 워싱턴을 방문해 백악관·국무부·국방부 등 대북 정책을 담당하는 주요 정책 당국자들을 인터뷰했다. 다음은 필자가 인터뷰 내용을 토대로 작성한 글이다.






그동안 한국 정부는 여러 경로를 통해 북한을 포용해야 하는 중요성을 미국측 인사들에게 설득해 왔다. 또한 남북 관계를 실질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북한에 대한 인내 외교를 전개하면서 ‘선의의 중재자’ 역할을 시도했다. 그러나 대미 정책 및 대북 정책에서 만족할 만한 결과를 유도한 것 같지는 않다.


특히 한·미 정책 조율에서 부시 행정부는 확실히 클린턴 행정부와 차별성을 보였다. 클린턴은 김대중 대통령을 ‘스승(mentor)’이라고까지 언급하며 한국의 대북 포용 노선에 협조했었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는 한국측 인사들이 대북 햇볕론의 당위성을 설명할 때마다 ‘장기적인 대북 전략은 결여한 채 전술적인 문제에만 집착하며 미국을 강의하려 든다’는 비판론으로 응수했다.


사실 한국은 미국이 좀더 유연한 태도를 취해야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미국은 한국의 국내 정치 상황이 유동적이고 북한의 안보 위협이 완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먼저 외교적 이니셔티브를 취해야 할 필요성 자체를 못 느끼고 있다. 그렇다고 미국이 북한에 전혀 무관심하거나, 북한을 방치(benign neglect)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문제에 대해 먼저 행동을 취할(proactive) 여유는 없어 보인다. 이라크 정책 및 중동 사태, 그리고 인도·파키스탄에서의 긴장 같은 상황 변수가 아직까지는 답보 상태인 북한 문제를 대외 정책 우선 순위에서 밀어내고 있는 측면도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은 어느 행정부를 막론하고, 한반도 정책을 집행하는 데 외부 상황에 의한 충격이 있어야만 반응하는 행태를 보였다. 즉 북한에 의해 위기 상황이 연출된 연후에야 비로소 대응했고, 이것이 클린턴 행정부 당시 대북 정책의 큰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부시 행정부 들어서도 달라진 것은 별로 없다. 단지 북한이 미국의 관심을 끌기 위해 돌출 행동을 시도할 때 그 대가가 클 것임을 분명히 한다는 점에서는 전임 클린턴 정부와 명백히 다르다.


북한이 북·미 대화에 긍정적인 입장을 표하기 전까지 부시 행정부 내에서 대북 정책에 대한 이견이나 알력은 없었다. 오히려 행정부 내부에서 정책 조율이 잘 안되고 있다는 조짐은 지난 5월 이래, 즉 북한과 대화할 가능성이 가시화하면서 두드러졌다. 핵 비확산 및 대량살상무기를 다루는 인사들이 지역전문가를 압도하면서, 그리고 반 테러 정책이 미국 대외 정책의 중심추가 되면서, 대북 정책에 파월 등 온건파가 운신할 공간은 줄어들었다.


미국, 북한 태도 따라 고위급 특사 파견 검토


대북 정책 조율의 주요 축을 형성하는 아미티지 국무부 부장관과 월포위츠 국방부 부장관, 그리고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헤들리 안보 부보좌관 중에서 상대적으로 온건한 입장을 취하는 인사는 아미티지뿐이다. 또한 부시 대통령 자신이 북한에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어 행정부 내 어느 누구도 상대방의 처지가 되어서 북한 지도부가 처한 딜레마를 이해하라고 역설하기는 어려운 분위기이다.





체니 부통령·럼스펠드 국방장관·라이스 안보보좌관·월포위츠 국방부 부장관 등 대북 강경파는 냉전 종식의 역군이었을 뿐만 아니라, 노련한 안보 전문가들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들이 외교의 노련미보다 대북 강경 수사를 앞세우는 것은 바로 북한을 ‘악(evil)’으로 보는 부시의 대북 감정을 정확히 꿰뚫고 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존 볼턴과 같은 이데올로그와, 공화당 내 기독교원리주의 세력을 포함한 인권운동가들이 가세하면서 미국의 대북 여론이나 인식은 더욱 경직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목할 일은 부시 행정부의 실용주의적 접근이다. 중국과의 정찰기 충돌 문제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북한 정책 등 외교 사안에 대해 부시 대통령이 보인 행보를 면밀히 검토하면 한 가지 공통점이 발견된다. 이념적인 수사와 실용적인 정부 정책이 뒤섞인 현상이다.
부시 대통령은 기자 회견 등에서 자신의 대북 정서를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지만, 이것이 즉각 미국 행정부의 결단으로 연결된 적은 없었다. 외교적 무경험이 정책 이행에 직접 반영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앞으로 북·미 관계가 비관적이라고 볼 이유는 전혀 없다. 오히려 양국 관계는 북한이 미국에 보이는 태도 여하에 좌우될 수 있다.


백악관 관계자에 따르면, 부시 행정부는 북한 정책에 대한 개괄적인 내부 지침을 가지고 있다. 즉 북한과의 안보 사안에 포괄적인 접근을 시도하되 조건은 더욱 까다로울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북한 포용을 추진하는 데는 의회를 설득하기 위해 까다로운 조건이 필요하다는 논리이다. 단 북한이 긍정적으로 반응하면 그만큼 더 큰 급부가 공여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문제 해결을 위해 대가를 지불할 준비는 되어 있으며 북과 대화가 된다고 판단되면 프리차드급에서 상향 조정된 특사(special envoy)가 방북할 가능성도 열어 두고 있다. 그러나 북한이 이러한 문제를 외면하고 미사일 수출 및 대포동 2호 개발을 계속한다면 미국은 1차적으로 연성 권력(soft power)을 동원해 북한을 압박하고 그 수위를 차츰 높이겠다는 구상도 고려하고 있다. 북한의 고려호텔에 수단·이라크·이란 사람들이 드나드는 것에도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북한이 미사일을 선적한 사실이 발견될 경우 군사 행동도 배제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결국 보브 매닝이 지적했듯이 한반도 실정을 모르는 미국 내 강경파를 압도할 방법은 북한의 태도 변화 이외는 없다. 클린턴 행정부 때의 북·미 관계가 말해주듯 북한은 장고 끝에 악수를 두거나 실기(失機)한 경우가 많다. 북·미 관계만을 놓고 볼 때 시간이 별로 없는 쪽은 북한이지 미국이 아니다. 미국이 반 테러 및 이라크·중동·남아시아 정책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 북한은 외교적으로 미국과의 관계에서 돌파구를 찾으며 정권 회생을 위한 실질적인 접근을 추진하는 것이 최상의 현실적 대안이다.


대승적 차원에서 북한 지도부가 강조하는 ‘통 큰 모습’으로, 북한이 ‘악’이 아님을 보여주어야 한다. 미국 내 온건파의 입지를 살려 북한 포용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북한의 생존과 남북 평화 공존 그리고 통일 비용을 절감할 유일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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