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가 아버지 말 들으랴
  • 워싱턴·변창섭 편집위원 (cspyon@sisapress.com)
  • 승인 2002.09.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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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전쟁 강행, 부자간 난기류 형성…홀로 서기 나선 듯
지난 4월 사우디아라비아의 압둘라 왕자는 미국의 수도 워싱턴이 아닌 현직 대통령의 저택이 있는 텍사스 주의 크로포드를 방문해 부시 대통령 부자를 만났다. 특히 그는 부시 전 대통령과 저녁을 함께 한 뒤 나란히 기차에 탄 채 휴스턴의 ‘부시 대통령 기념도서관’으로 향하는 약 90분 동안 밀담을 나누어 눈길을 끌었다.





이런 사실이 언론에 크게 보도되자 백악관측은 압둘라 왕자 개인 일정에 불과하다며 그 의미를 축소했지만 정작 워싱턴 주재 사우디아라비아 대사관측은 “부시 전 대통령이 중동 지역의 안정에 긴요한 역할을 한다”라며 압둘라 왕자의 방문에 ‘정치적 목적’이 있음을 시사했다. 실제로 지난해 여름 압둘라 왕자가 부시 행정부의 지나친 친이스라엘 정책에 대해 노골적인 불만을 토로하자 부시 전 대통령이 개인적으로 그에게 전화를 걸어 무마하려고 나선 일도 있다.



이같은 일화는 지난해 1월 부시 대통령이 취임한 뒤 대외정책에 관한 한 부친의 영향권 안에 있다는 세간의 통념을 다시 한번 확인한 계기가 되었다. 실제로 중앙 정치 무대 경험이 전혀 없는 ‘외교 문외한’인 부시가 중앙정보부장·부통령·대통령을 지낸 부친으로부터 직·간접으로 외교 문제에 관한 조언을 받아온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여기에 더해 딕 체니 부통령·콜린 파월 국무장관·콘돌리자 라이스 국가안보보좌관 등 백악관 실세 외교 안보 참모 모두가 과거 부시 전 대통령 밑에서 녹을 먹은 ‘충복’이라는 사실도 예사롭지 않다. 물론 부시 전 대통령은 공개적으로 “아들은 나나 어미의 그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라며 자신의 영향력을 줄곧 부인해 왔지만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 사람은 드물다.



그런데 최대 외교 현안인 이라크와의 전쟁 여부를 놓고 부시 대통령이 부친의 그늘에서 벗어나 ‘홀로 서기’를 한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무성하다. 부시 전 대통령 스스로 전쟁과 관련해 어떤 발언을 한 일은 없지만 브렌트 스코크로프트 전 국가안보보좌관, 제임스 베이커 및 로렌스 이글버거 전 국무장관 등 그의 ‘분신’들은 언론을 통해 공개적으로 전쟁 신중론 내지는 반대론을 주창해 왔다. 그러나 부친의 ‘의중’을 담은 이들의 견해를 경청하는 듯하던 부시 대통령은 태도를 바꾸어 이라크와의 전쟁 결의를 연일 다지고 있다. 9월12일 유엔 특별연설에서도 그는 이라크가 유엔 결의안에 따른 핵사찰 의무를 저버릴 경우 독자 군사 행동에 나서겠다고 경고했다.



이런 가운데 <뉴욕 타임스>의 보수 논객인 윌리엄 사파이어는 9월5일자 칼럼에서 ‘건국 아버지인 존 퀸시 애덤스 대통령과 그의 부친인 존 애덤스 대통령도 지금의 부시 대통령 부자 같은 문제는 없었다. 현직 대통령과 부친 간에 노출된 것이 분명해 보이는 이라크 정책의 균열상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며 부시 부자 간에 의견 충돌이 있음을 시사해 관심을 끈다.






체니, 페르시아 만 전쟁 때도 ‘주전파’



외교 전문가들은 부시 전 대통령이 아들이 이라크와 전쟁을 벌이겠다면 말리지는 못하겠지만 후세인 대통령을 제거하는 ‘정권 전복’ 문제만큼은 내심 반기를 든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 문제에 관한 그의 견해는 1998년 스코크로프트 전 국가안보보좌관과 함께 집필한 <달라진 세계>에서 잘 나타난다.


이 책에서 그는 1991년 페르시아 만 전쟁 때 만일 미국이 당시 이라크군을 쿠웨이트에서 패퇴시키는 것을 넘어서 후세인 전복을 꾀했더라면 ‘미국은 지금 이 순간까지도 매우 적대적인 나라에서 (피곤한) 점령군 신세로 전락해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그는 회고담에서 ‘후세인을 제거하기 위해 페르시아 만 전쟁 계획을 이라크 본토 점령계획으로 전환했다면 이는 이라크 전쟁 본래의 목적을 벗어날 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천문학적인 인명 손실 및 정치적 비용을 치렀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부시 전 대통령은 아들에게 페르시아 만 전쟁과 관련한 이같은 경험담과 함께 나름의 조언을 했을 것으로 보이나 별 효과를 거둔 것 같지는 않다. 외교 관측통들은 그 주된 원인을 백악관내 주전파, 특히 딕 체니 부통령의 영향 때문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과거 페르시아 만 전쟁 때 국방장관을 지낸 체니 부통령은 이라크 후세인 정권의 속성과 대량살상무기 개발 문제를 훤히 파악하고 있으며, 그런 이유로 백악관 내 다른 누구보다 강력한 발언권을 행사한다.


그는 9월8일 NBC 방송의 시사 프로그램에 출연해 지금 군사 행동에 들어가는 비용이 나중에 한방 맞은 뒤 대응하는 비용에 비해 훨씬 덜 들 것이라면서 이라크 전쟁 개시와 후세인 축출을 강력히 역설했다.
부시 전 대통령은 자신의 저서에서 ‘당시 군부는 모든 외교적 수단을 동원한 뒤에야 이라크 군사작전에 임한다는 입장인 데 반해, 체니 국방장관은 처음부터 군사력 사용이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입장을 개진했다’고 밝힌 바 있다. 체니의 호전적 이라크관이 그 때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것이 없음을 시사한 대목이다.



체니 부통령만큼이나 막후에서 전쟁을 부추기는 인물로는 콘돌리자 라이스 국가안보보좌관을 꼽을 수 있다. 국가안보보좌관이라는 자리는 안보 관련 부처의 입장을 대통령에게 가감없이 전달하는 ‘정직한 중재자’ 역이다. 그러나 역대 안보보좌관 치고 이런 역에 머무른 예는 드물며 대개는 자신의 의견을 개진해 대통령의 최종 판단에 영향을 미쳐 왔다. 부시는 2년 전 대선 후보 시절부터 외교 문제에 관한 한 ‘개인 교사’인 라이스 보좌관에게 전적으로 의존해 왔다. 따라서 주전파인 라이스 보좌관이 부시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쉽게 짐작이 간다.



아버지 부시 “불화설 번질라” 언행 조심



외교 관측통들은 이처럼 주전론이 지배하는 분위기에서 부시가 스코크로프트 등 공화당 외교 원로들의 조언은 물론이고 부친의 충고조차 제대로 수용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한다. 대통령 문제 해설가로 이름난 <타임>의 휴 사이디에 따르면, 부시 전 대통령은 최근 이라크 전쟁을 둘러싼 국내 정쟁이 심해지면서 더욱 언행에 신중을 기하고 있다고 한다. 이미 수십 건의 텔레비전 인터뷰 요청을 사양했는가 하면 명사들과 함께하는 시사 좌담회 참석조차 기피하고 있다. 혹시나 이라크 문제에 관한 자신의 말 한마디가 현직 대통령인 아들과의 불화설로 번질까 봐 조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부시 전 대통령은 요즘 이라크 문제를 포함한 일체의 외교 현안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법이 없으며, 부시 대통령도 부친에게 이라크 문제에 관해 의견을 묻는 것 같지도 않다.



문제는 이라크 전쟁 찬반 여부를 놓고 백가쟁명식 논쟁이 활활 타오른 상황에서 부시 전 대통령이 과연 언제까지 침묵을 지킬 수 있느냐이다. 수십 년간 백악관 출입기자로 명성을 떨치다가 은퇴해 칼럼을 쓰고 있는 헬렌 토머스는 “지금이야말로 부시 전 대통령이 미국을 전쟁 수렁에 빠뜨리지 않도록 아들에게 말해야 할 때이다”라고 주장해 관심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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