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핵 해법 코러스 프로젝트 떴다
  • 남문희 기자 (bulgot@sisapress.com)
  • 승인 2003.02.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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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 천연 가스를 파이프라인을 통해 북한과 한국에 공급하는 ‘KoRus Pipeline 프로젝트’가 미국 주도로 추진되고 있다.
로슈코프 러시아 특사를 환대해 돌려보낸 북한이 이번에는 남쪽으로 눈길을 보냈다. 현정부가 비공개리에 특사 파견을 제의하자 지난 1월22일 답장을 보내온 것이다. 정부는 부랴부랴 임동원 청와대 외교안보특보와 임성준 외교안보수석 그리고 이종석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위원을 주축으로 한 특사단 파견 방침을 발표했다.






그동안 국제 사회는 북한 핵 문제를 중재할 자격 또는 열정을 갖춘 나라로 한국과 러시아를 꼽았다. 우리 특사단이 앞으로 어떤 보따리를 가지고 올지 두고보아야겠지만 현재까지는 러시아가 한 발짝 앞서 있다. 최근 워싱턴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따르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이번에 한몫 하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다고 한다. 김위원장도 푸틴 카드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러, 2월에 핵 해결책 공동 발표” 소문



그래서 2월께 김위원장과 푸틴 대통령이 극적으로 만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김위원장이 푸틴과 핵 문제 해법을 전격 발표함으로써 부시 대통령을 압박하려 할 것이라는 얘기다. 이라크 전쟁을 앞두고 어떤 형태로든 ‘반짝 대화 국면’이 조성되고 있는 듯하다.
푸틴 대통령이 ‘칩거’하고 있는 김정일 위원장을 바깥으로 유인한 비결은 무엇일까. 로슈코프 특사는 방북 당시 김위원장과 6시간 동안 만났다고 하는데, 거기에 뭔가 해답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동안 나온 것말고 분명한 ‘뉴스’가 있었다는 얘기다.



확실치 않지만, 뉴스는 중재를 요청한 미국측이 주었을 수 있다. 몇 가지 짚이는 대목이 있다. 지난 1월8일 미국 하원의원 한 사람이 모스크바를 찾았다. 커트 웰던 하원 군사위원장이다. 공화당 소속 8선 의원(펜실베이니아 주)인 그는 냉전 시대부터 미국·러시아 대화에 깊이 관여해온 비중 있는 인사이다. 최근 몇년 사이 그는 미국·러시아와 남북한이 모두 관련되어 있는 국제 프로젝트에 몰두해 왔다.



이름하여 ‘코러스 파이프라인’(KoRus Pipeline;한·러 천연 가스 파이프라인) 프로젝트(코러스 프로젝트)로 사할린의 천연 가스를 파이프라인을 통해 북한과 남한에 공급하자는 계획을 말한다. 그가 이 문제에 어느 정도 깊이 개입해 있는가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지난해 5월 말께 그가 이끄는 하원 군사위원회 소속 의원 12명이 북한을 방문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성사만 되면 북한을 방문한 최초의 미국의원단이 되는 것이다. 이들은 북·미 간에 대화가 끊긴 상태여서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북측이 비자 발급을 거부해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대신 타슈겐트·카라치·우즈베크·베이징·서울을 순회했다.






최근 <시사저널>은 지난해 5월24일부터 6월3일까지 활동한 이 의원단의 보고서 속에서 매우 흥미로운 대목을 발견했다. 이들은 러시아에서 원유 및 가스 관련 기업가들과 두루 접촉했다. 특히 러시아 주재 북한대사관의 구성복 상무관과 김정도 보좌관을 면담한 것이 눈길을 끌었다. 구상무관은 바로 ‘코러스 프로젝트’의 북한측 접촉 채널이었던 것이다. 두달 뒤 미국의 한 기업이 북한측과 만나 천연 가스 파이프라인 사업권과 관련한 합의서를 교환했는데 바로 이 면담이 그 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



코러스 프로젝트 추진은 부시의 뜻?



커트 웰던 위원장은 1월8일 러시아를 방문한 목적 중에 코러스 프로젝트 관련 협의가 들어 있음을 1월7일 워싱턴에서 열린 국제 포럼에서 실토했다. 이 국제 포럼은 한국의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과 워싱턴 소재 한국경제연구원(KEI)이 동북아 에너지 협력을 주제로 연 비공개 행사였다(‘1월7일 워싱턴 포럼’으로 표기). 이 행사의 기조 연설자로 참석한 그의 연설 중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눈에 띈다. “현재 심각하게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미국과 북한 관계에서도 대화는 매우 중요하다. 예컨대 이 포럼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코러스 프로젝트’를 대안으로 삼아 대화할 수도 있고…이런 현안 문제를 중재할 겸…러시아를 방문한다.”



북한 핵 문제로 각광받기 시작한 사할린 천연 가스 프로젝트가 웰던-로슈코프 채널을 거쳐, 로슈코프와 김정일 위원장 간의 6시간 회담 메뉴 중 하나로 등장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은 비약일까.
웰던 의원 한 사람만 얘기하고 다녔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공교롭게도 바로 그 즈음 부시 대통령을 포함한 미국 행정부의 고위 당국자들이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키는 얘기들을 ‘갑자기’ 쏟아냈다. 예를 들어 1월13일 제임스 켈리 특사는 서울에서 “핵 문제가 해소된다면 다른 나라는 물론 민간 투자가들과 함께 북한의 에너지 문제 해결 방안을 모색할 수 있다”라고 발언해 기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에너지 지원 얘기는 처음 나왔을 뿐더러 민간 투자가를 언급한 것도 매우 파격적이다. 그런데 같은 날 콜린 파월 미국 국무장관은 <월 스트리트 저널>과 가진 인터뷰에서 ‘북한이 필요로 하는 에너지를 제공하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원자력 이외에 다른 형태의 에너지가 될 수 있다’며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다음 날인 1월14일 부시 대통령은 북한이 핵을 포기한다면 ‘식량과 에너지 원조 등 평양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과감한 구상을 고려하겠다’고 말함으로써 앞선 얘기들이 바로 자기 뜻임을 분명히했다.






‘엑손 모빌 프로젝트 추진’ 보도는 오보



미국 고위 당국자들의 중대 발언이 연거푸 쏟아지면서 국내 언론들이 때아닌 술래잡기에 나섰다. 그리하여 엉뚱한 프로젝트 하나가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이른바 ‘엑손 모빌 프로젝트’이다. 한 언론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소식통을 인용한 1월8일자 기사에서 ‘세계 최대 석유 기업인 엑손 모빌이 개발한 사할린 가스전을 북한 핵 문제를 타개하는 카드로 활용하는 방안이 다각도로 검토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1월7일 워싱턴 포럼’에 대해서도 엑손 모빌 프로젝트와 관련된 것처럼 거론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과성으로 지날 수 있었으나 1월13일 켈리 발언이 나오자 이 주장이 모든 언론으로 확산되었다. 이에 따라 이 분야에 관심 있는 사람들 사이에 엑손 모빌이 시쳇말로 ‘뜬’ 것이다.



그러나 엑손 모빌 얘기는 그 원조 격인 미국의 저명한 한반도 전문가 셀리그 해리슨 씨의 ‘부정확한’ 주장에서 비롯한 것 같다. 제네바 회담 전인 1993년부터 천연 가스를 통한 북한 핵 해법안을 설파해 온 그는 무슨 연유에서인지 지난해 10월22일자 <유에스에이 투데이> 기고에서도 ‘엑손 모빌 사와 일본의 한 회사가 사할린 가스 개발 사업권을 가지고 있다’는 식의 주장을 펼쳤다. 그리고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관계자가 이 자료 전문을 번역해 가지고 있는 것도 확인되었다. 추측컨대 이런 경로로 엑손 모빌 얘기가 느닷없이 언론에 등장하게 된 것 같다.



그러나 해리슨 씨 얘기는 일부분만 사실이다. 사할린 가스전은 여러 광구로 이루어져 있다. 엑손 모빌은 그 중에서 광구의 지분을 30% 정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Ⅰ광구는 엑슨 모빌 외에도 일본의 사할린석유개발과 러시아의 로즈네프트, Ⅱ광구는 미국의 마라톤 오일, 일본의 미쓰이와 미쓰비시, 영국의 로열 더치 셸, Ⅲ광구는 미국의 모빌·텍사코 등 여러 회사가 지분을 나누어 가지고 있다. 따라서 굳이 엑손 모빌을 대표 주자로 내세울 이유가 없다.






‘워싱턴 포럼’에 쟁쟁한 인사 다수 참석



더군다나 ‘코러스 파이프라인-사할린 투 서울(KoRus Pipeline-Sakhalin to Seoul)’을 부제로 열린 ‘1월7일 워싱턴 포럼’ 역시 엑손 모빌과는 관련이 없다. 전혀 별개 기업이 추진해온 프로젝트에 초점이 맞추어진 행사였던 것이다. 바로 이 기업이 최근 몇년 사이 커트 웰던 의원과 행보를 같이 해오며 북한 핵 사태 와중에 태풍의 눈으로 등장했다.
이 기업은 엑손 모빌처럼 세계적인 지명도가 있는 회사는 아니다. 국내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에너지 관련 중견 기업이다. 에너지 전문가인 존 페터 사장이 이끄는 ‘FSI에너지(Foundation Systems Inc Energy)’ 사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1월7일 워싱턴 포럼’은 FSI에너지 사가 그동안 물밑에서 추진해온 ‘코러스 프로젝트’를 비공개 형식이기는 하지만 처음으로 공론화한 장이었다. 물론 포럼의 주 발표는 존 페터 사장이 맡았다.



비록 중견 기업이 이 날 포럼을 주도했지만 40여 명에 이르는 참석자들의 면면은 결코 만만치 않다. 한반도 에너지 문제와 관련한 비중 있는 전문가들과 국무부 및 에너지부의 담당관들 그리고 한국·일본·러시아 대사관 관계자 등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다. 국무부에서는 로버트 매닝·존 메릴 등 잘 알려진 인사 외에 4명이 더 참석했고, 에너지부에서는 프로젝트 담당관인 로버트 프라이스 외에 1명 그리고 셀리그 해리슨 씨, 월드뱅크의 브래들리 봅슨 박사, 노틸러스 연구소의 피터 헤이즈 소장 등 쟁쟁한 인사들이 망라되어 있다.



참석자 중에는 한국 에이스기술단 윤갑구 회장이 특히 눈길을 끌었다. 윤회장은 1996년부터 러시아·몽골·중국·한반도·일본 등의 전력 계통을 연계하는 평화망사업(PN)을 추진해온 동북아 에너지 협력 사업의 선구자 격인 인물이다. FSI에너지측과는 지난해 8월 ‘공동 개발 합의서’를 체결한 사업 파트너이다. 존 페터 사장의 이 날 발표문에서는 코러스 프로젝트 내용이 깊이 다루어졌다.



사실 FSI에너지 사가 한반도 에너지 문제에서 태풍의 눈으로 단기간에 떠오르게 된 데에는 2000년 부사장으로 취임한 로이 김 드렉셀 대학 경제학 교수(63·한국명 김응택)의 역할이 컸다(96쪽 인터뷰 참조). 대북 에너지 사업에서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로이 김 교수는 오랫동안 친분을 맺어온 커트 웰던 의원을 든든한 우군으로 끌어들이는 한편 러시아 주재 북한대사관의 구성복 상무관 등 북한 인맥을 동원해 북측과 접촉했다. 급기야 지난해 8월3일 모스크바에서 북한 천연가스연구회 김경봉 회장과 북한 지역 파이프라인 건설 사업권에 대한 합의서를 체결해 결정적인 전환점을 마련하게 되었다.



총 12개 항목으로 되어 있는 이 합의서는 FSI에너지 사가 북·러 국경으로부터 남북 분계선까지 가스관 건설을 책임지고 진행한다는 것과, 2003년 6월1일까지 가스 공급 원천을 확정하고, 이 날 쌍방이 각각 정부 승인을 받아 최종 합의문을 작성하기로 되어 있다.
지난해 8월 양측의 합의로 ‘코러스 프로젝트’가 비로소 전환점을 도는 듯이 보였다. 그래서 9월에는 평양에서 ‘사할린 가스 파이프라인 사업 선포식’을 하려고 했는데, 마침 고이즈미 일본 총리 방북과 준비 부족 등으로 10월로 미루어졌다. 그러나 10월에는 켈리 특사 방북을 계기로 북·미 간에 핵 문제가 터지면서 또다시 순연되었다. 그러던 중 마침내 기회가 왔다. 북한 핵 문제가 지난 연말께부터 심각성을 더해가기 시작하면서 부시 행정부 안에서 북한 핵 문제를 풀기 위한 해법으로 ‘코러스 프로젝트’가 떠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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