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회사에 몸 바치십니까?”
  • 스트라스부르·류재화 통신원 ()
  • 승인 2004.10.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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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 찬양한 책, 프랑스에서 ‘선풍’…정부·기업은 산업 마비 걱정
‘절대 일하지 마십쇼!’.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 <다빈치 코드>를 바짝 추격하며 현재 프랑스에서 베스트 셀러 1위를 넘보고 있는 <봉주르 파레스>(게으름아, 안녕)의 첫 문장이다. 이 책은 1백10쪽에 지나지 않는 얇은 책이지만 반노동·반기업 주의를 ‘선전 선동’하는 신랄한 내용이 담겨 있다. 초판 4천부를 찍었는데, 한두 달 만에 프랑스에서만 10만부를 훌쩍 넘더니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특수를 타고 영국·스페인·미국·일본·한국 등 수십 개 나라에 저작권이 팔렸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결과다.

이 ‘발칙한’ 책이 크게 히트하자 프랑스의 우파 성향 언론들은 연일 푸념이다. 그렇지 않아도 주 35시간 근로제 탓에 프랑스가 일하지 않는 나라로 낙인 찍혔는데, 이제는 게으름뱅이 나라로 낙인 찍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경제 외교를 위해 최근 중국 등 아시아를 순방하고 돌아온 시라크 대통령은 “이제 프랑스를 일하는 나라로 만들어놓겠다!”라고 엄포를 놓았다. 라파랭 총리도 “프랑스를 거대한 레저 공원으로 만들 수는 없다”라며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

35시간 근로제에 쫓겨 공장 해외 이전 급증

프랑스는 요즘 이른바 데로칼리자시옹(delo calisation·산업 시설 해외 이전)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 한국이 겪고 있는 산업 공동화와 비슷한 것이다. 하루가 멀다고 프랑스 공장들이 문을 닫는 대신, 루마니아·체코·중국·인도 등지로 이전 중이다. 주 35시간 근로제로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다.

지난해 1월부터는 법정 보충 시간을 인정하고, 각 사업장 사정에 맞게 주 35 시간제를 유연하게 적용하는 ‘피용 법’(당시 노동장관의 이름을 딴 법)도 시행중이지만, 사업체의 해외 이전 발길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데로칼리자시옹을 하지 않는 대신 유급 휴가 일수를 줄이거나 임금을 삭감하고, 주 35 시간제를 포기하는 업체도 상당수다. 그러나 값싼 노동 시장을 찾아 중국·인도 등으로 생산 시설을 이전하는 데로칼리자시옹은 대세가 되고 있다.

비판론자들은 데로칼리자시옹을 국민적 수치로까지 여긴다. 최근 빗발치는 논쟁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이들에게서는 외국인 혐오증까지 엿보인다. ‘이제는 중국 도둑놈들한테까지 일자리를 뺏기는 것이냐’ 하는 것이다.

라파랭 총리는 지난 9월14일 ‘우리의 일자리, 우리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데로칼리자시옹을 결단코 막아야 한다, 전국민이 단결하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기업인들은 주 35시간 근로제 때문에라도 데로칼리자시옹은 불가피하다고 ‘거짓 선전’을 일삼는다.

경제 전문가들은 데로칼리자시옹과 노동 시장은 별 상관이 없다고 주장한다. 통계상으로는 프랑스에서 매년 40만명이 일자리를 잃는다. 데로칼리자시옹 때문에 일자리를 잃는 노동자는 전체 20명 중 한 사람꼴이다. 프랑스가 현지 투자를 하는 주요 대상국은 아직까지는 프랑스와 비슷한 경제 수준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이 대부분이다. 중국·인도에 투자하는 비율은 전체 해외 투자 규모의 2%도 안된다는 것이 경제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이처럼 현재의 경제 사정을 보면 프랑스인들이 놀자고 외칠 처지는 아니다. 그런데 왜 유럽에서 가장 적게 일하고 가장 실업률이 높은 프랑스에서 ‘게을러지자’는 주장이 공공연히 나오는 것일까. 게으름을 찬양한 책이 성공한 현상을 두고 미국의 뉴욕 타임스, 영국의 가디언 등 외국 언론은 ‘지극히 프랑스적인 현상’이라고 쓴소리를 해댄다. 편견일지 몰라도 국제 사회에서 프랑스인들에게 붙여준 별명은 ‘파업꾼’ ‘불평꾼’이다. 이제 ‘게으름꾼’ 딱지까지 붙게 생겼다.
<게으름아, 안녕>은 유머와 반어법이 철철 넘친다. ‘기업에서 가능한 한 가장 덜 일해야 하는 이유와 기술에 관하여’라는 부제를 자랑스레 달고 있다. 일하는 척하면서 가장 잘 놀 수 있는 방법도 소개했다. 가령 이런 식이다. ‘복도를 다닐 때에는 겨드랑이 밑에 항상 서류 뭉치를 끼고 다닐 것. 중요한 회의가 있는 사람처럼’. 손에 아무 것도 없으면 커피 마시러 가는 줄 알고, 겨드랑이에 신문을 끼고 복도를 나서면 화장실에 가는 것으로 안다는 것이다.

프랑스에 이미 팽배해 있는 ‘물족’(홍합을 뜻하는 ‘물’은 게으름뱅이라는 뜻도 있다)은 반세계화주의자·반자본주의자들이다. 이들은 노동 시장 위기의 주범이 바로 자유 경제 시장이라고 생각한다. <게으름아, 안녕>을 지은 코린 마이에르 역시 ‘물족’의 일원이다. 그녀는 한 방송에 출연해 자유경제주의자인 기업 대표와 불꽃 튀는 설전을 벌였다. 그녀는 경제학자이자 심리학자이며, 프랑스 굴지의 공기업인 에데페(EDF·프랑스전기전력공사)에서 15년째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있는, 학벌 좋고 능력 있는 엘리트다.

그녀는 자신의 책에서 기업 내부 조직을 변혁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고, 어깨에 힘을 주어가며 주장하지 않는다. 그저 ‘적당히 개기’라는 것이다. “쿠베르탱은 참가 정신이 중요하다고 말했지만, 오늘날 중요한 것은 최대한 덜 참가하는 것이다.” “생존에 불가피한 급여 명세서를 얻기 위해 조직체에 붙어 있되, 가장 본질적인 자신만의 정원을 경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녀가 파트타임을 고집하며 여러 직업을 갖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녀의 지론은 확고하다. 기업은 휴머니즘이 아니라는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게으름을 반드시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게으름을 설파하는 인터넷 사이트만 해도 수십 개이며, 지난 5월 몽펠리에에서는 ‘반노동 영화제’가 열리기도 했다. 프랑스에서 여전히 유명한 만화 주인공 ‘가스통 라가프’는 게으름보의 대명사다.

자칭 ‘게으름당(POF)’은 ‘행복한 실업자 운동’을 꾸려가는 단체다. 그들은 실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노동’을 근절해야 한다는 과격한 주장을 편다. 반노동주의자들이 자주 인용하는 책은 파울 라파르그의 <게으를 권리>이다. 그가 누군가. 바로 칼 마르크스의 사위다. 그는 ‘청년 마르크스’가 부각했던 인간 소외를 없애기 위해, 노동자는 하루 3시간만 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랑스인들은 ‘노동=고문’으로 여긴다”

한 역사학자는 프랑스인들의 의식 밑바닥에 ‘노동은 신성한 가치가 아니라 고역 또는 고문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고 설명한다. 노동(travail)을 뜻하는 라틴어 트레팔리움은 고문의 한 수단이었다. 전통적 카톨릭 국가인 프랑스는 노동을 통해 인간이 성장한다고 설파했던 프로테스탄트적·자본주의적 가치관의 세례를 덜 받은 나라이기도 하다.

주 35시간 근로제를 실시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35 시간 노동의 혜택을 누리는 것은 아니다. 대기업·공기업이면 몰라도 20인 이하 사업장이나 병원에서는 35시간 근로제가 수많은 문제를 낳기도 한다. 더 많이 벌기 위해 밤에도 일하거나, 제2의 직업을 갖는 사람도 많다. 아예 외국으로 떠나는 사람도 있다.

35시간 근로제 실시 이후 노동 강도는 더 강해졌다. 프랑스 은행 통계에 따르면, 미국을 ‘100’으로 놓았을 때 시간당 노동 생산성은 노르웨이에 이어 프랑스가 ‘108’로 2위다.

문제는 게으름이 아니라, 노동의 의미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의식 변화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인 직업과 기업을 위해 일하는 노동은 별개라는 것이다. 프랑스인들은 직장을 통해 사회적 상승이 가능하다고 보지 않는다. 또 개인이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지도 않는다. 적어도 프랑스에서 만큼은 기업에 대한 신뢰가 다른 나라와는 큰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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