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밤 묵어가며 양반 풍류 맛보세요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3.05.22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외국인 위한 한옥 체험 공간 ‘락고재’/품격 높은 전통 문화 프로그램 제공
외국인이 묵을 수 있는 특급 호텔은 서울 시내에 많다. 그러나 한국적인 문화 체험을 원하는 이들에게는 이런 ‘국제적인’ 환경이 불만족스럽기 마련이다. 민박 형태로 운영되는 한옥 게스트 하우스가 있지만, 고급 숙박시설에서 전통적인 문화 체험을 하고 싶은 이들에게는 눈에 차지 않는다. 그런 이들을 겨냥해 만든, 호텔 수준의 한옥 체험 공간이 전통 한옥 마을인 서울 종로구 북촌에 들어선다. 5월19일 문을 여는 ‘한풍류문화원 락고재(樂古齋, 02-742-3410)’가 그곳이다.

대지 1백30여평에 건평 40여평 규모인 락고재는 일제 시대에 국학 연구기관으로 세워진 진단학회 건물을 인간문화재 대목장 정영진옹이 맡아 개·보수했다. ㄷ자 형태 건물의 한쪽을 헐고 정자와 연못을 들였으며, 기와 담장·장독대·굴뚝을 설치하고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어 한옥의 멋을 살렸다. 객실은 다섯 칸인데, 방마다 붙박이 옷장과 화장실이 달려 있다.

락고재는 외국인 5~6명에게 하루 동안 집 전체를 빌려주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이들은 머무르는 동안 백자·방짜 그릇·목기 등에 담긴 한국 전통 음식을 맛보며, 옛 선비들처럼 음악·미술·춤·시문 따위 풍류를 즐기는 다양한 연희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다.

락고재 대표 안영환씨(47)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엔지니어 출신이다. 10여년 전부터 ‘진사댁’ ‘제주물항’ 등 한국 전통 식당을 운영해 왔으며, 1995년부터는 안동 하회마을에 있는 담연재와 병산서원, 지례 예술촌, 경주 독락당 등의 전통 한옥에서 외국인 관광객을 상대로 숙박과 함께 풍류를 즐기는 양반 문화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해 왔다. 귀국 후 국내에서 만난 외국인들로부터 한국 문화의 진수를 맛볼 기회가 없다는 말을 자주 듣다가 체험 프로그램을 생각해냈다는 그는 “한국 문화의 본류인 ‘풍류’를 품격 높은 문화 상품으로 만들고자 2년여 준비해 락고재를 개원했다”라고 말했다.

1주일에 두 번 정도 열 예정인 체험 프로그램의 1인당 참가비는 서울시내 특급 호텔의 하루 숙식비와 비슷하게 책정했다. 체험 프로그램이 운영되지 않는 기간에는 학술 세미나 장소로 활용하거나, 대금·가야금 연주회장, 전통 차(茶)문화 체험실 등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락고재의 문화 콘텐츠를 책임지는 한풍류문화원의 원장은 시인이자 풍류도학가인 정우일씨가 맡았다.

락고재가 기존 한옥을 개·보수해 문을 연 것은 최근 일고 있는 북촌마을 한옥 재단장 바람과도 맥락이 닿아 있다. 그러나 락고재 건물에는 아쉬운 점도 눈에 띈다. 우선 개·보수하면서 구들을 기름 보일러로 대체했다. 방바닥 밑으로 고래를 켜서 방을 데우는 구들은 한옥 난방의 대표적인 방식이지만, 연기가 많이 나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고 한다. 창이나 방문도 두세 겹으로 만드는 전통 양반 가옥과 달리 홑겹이어서 겨우살이에 문제가 있어 보였다.

안영환 대표는 “어차피 봄부터 가을까지만 활용하고, 겨울에는 개방하지 않을 생각이어서 난방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한겨울 문풍지를 스치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설설 끓는 구들에 누워 하룻밤을 지내보지 않고 어찌 한옥 체험의 참맛을 논할 수 있을까? 그 점이 못내 아쉬웠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