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속에서’ 손잡은 미술과 삶
  • 이건수 <월간 미술> 편집장 ()
  • 승인 2003.10.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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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모리 미술관 개관전을 보고/무엇이 예술이고 무엇이 상품인가
빛 의 미술가 제임스 터렐의 고독을 느끼려면 황량한 미국 애리조나 주 사막의 로덴 크레터로 찾아가야 한다. 조각가 도널드 저드의 미니멀한 입체물을 보려면 텍사스 남서부 멕시코 국경에 가까운 마파의 대포 격납고를 찾아야 한다. 그뿐인가. 친환경형 미술관의 대표 주자인 인젤 홈브로이히를 찾으려면 독일 노이스홀츠하임의 늪과 수풀로 가득한 들판을 헤매야 한다.

오늘의 미술관은 도시를 떠나려 한다. 미술 대중화라는 것이 미술의 질적 타락만을 야기했다는 반성 때문일까. 이제 미술은 더욱더 스스로를 고립시키려 하는 것 같다. 마치 속세와 멀어짐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듯이. 그래서일까. 지상 250m 지점에 터를 잡은, 세상에서 가장 높은 미술관이 탄생했다. 그러나 이 새 미술관은 ‘세상 속으로’를 지향했다는 점에서 동료들과 질적으로 다르다.

‘천국에 가장 가까운 미술관’이라는 별명을 얻은 모리 미술관(MAM:Mori Art Museum)은 일본의 부동산 재벌 모리 미노루와 그의 부인 모리 요시코의 꿈과 야망이 만들어낸 공간이다. 모리 미노루는 쇠락하는 일본의 옛 번화가 롯폰기(六本木)를, 도시설계 프로젝트를 통해 새롭게 회생시키려 했다. 오피스 주거 미술관 아카데미 방송국 호텔 영화관 상점 등을 넓지 않은 지역 안에 모으고, 이것들이 자아내는 다양하고 이질적인 교류를 통해 새로운 문화 발신지로 삼겠다는 작정이다.

그런 점에서 롯폰기의 한가운데, 모리빌딩의 최상층(52층과 53층)을 차지하고 있는 모리 미술관은 우선 현대 미술관의 위상과 역할을 되돌아보게 만들고 있다. 미술관 아래에는 도쿄 시내 전역을 살필 수 있는 전망대가 있고, 1천5백 엔을 내면 전망대를 거쳐 세계 최고의 미술품을 관람할 수 있다. 관람 시간도 평일에는 22시까지, 주말에는 24시까지여서 심야 관람이 가능하다. 심야 영화가 있는데 심야 미술관도 있을 법한 얘기가 아닌가.

모리가 기존 미술관의 이미지를 벗어나기 위해 잡은 컨셉트는 ‘미술과 삶의 연관성’이다. 생활 속의 미술관, 복합 문화 공간으로서의 미술관을 지향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예술과 매니지먼트의 교묘한 결합이 엿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미술관 복도에서는 좌판 분위기가 엿보이고, 미술관 밑 백화점의 쇼윈도에서는 현대 미술의 표면적 복사가 눈에 띈다. 무엇이 예술품이고 무엇이 상품인가.
모리 미술관이 <행복>이라는 제목으로 열고 있는 개관 기념전에서도 그런 기미를 읽을 수 있다.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동서의 ‘아트’를 통해 인간의 영원한 주제인 행복을 탐구하고자 한 이번 전시는, 아르카디아(지상의 낙원), 니르바나(열반), 욕망, 하모니라는 네 가지 섹션을 거쳐 우주의 흔적을 그린 별 그림으로 마무리짓는다. 이토 야쿠추·클로드 모네·폴 세잔·앙리 마티스·파블로 피카소·앤디 워홀·루이즈 부르주아·구사마 야요이·오노 요코·아라키 노부요시·무라카미 다카시·제프 쿤스 등 동서고금의 미술가 1백80여 명이 출품한 작품 2백50점이 모여 있는 초대형 전시다. 최정화 김영진 구정아 정소연 등 한국 작가도 참가했다.

이미 예술이나 예술가라는 표현 대신 아트나 아티스트라는 말을 사용하는 일본에서 ‘예술’이라는 말은 수백 년 전 장르 구분에나 쓰이는 용어다. 패션·만화·애니메이션·게임·광고 등 갖가지 예술 장르는 아트라는 말에 흡수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의 자연스런 월경(越境)을 통해 새로운 비주얼리티를 증식시키는 것이 일본의 아트 월드이다.

그렇다면 기존 ‘미술관 미술’은 구치나 샤넬의 디스플레이나 빌보드의 강렬한 시각적 파워에 어떻게 맞설 수 있을까. 나는 모리 미술관 길 건너편에 새로 개장한 루이뷔통 매점에 들어서면서 이것이 오히려 미술관답지 않은가 하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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