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CD 롬으로 들어가신 부처님
  • 박성준 (snype00@sisapress.com)
  • 승인 2000.12.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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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장경> 전산화 완료…동아시아 문명사 연구에 획기적 전환 예고
‘손이 춤추고 발이 춤춘다.’ 중국 송대 정자가 <논어>를 두고 이른 말이다. 후대 학인들이 성인의 말씀을 읽고 좇노라면, 그 오묘한 이치를 깨달아 저도 모르게 희열에 젖어든다는 뜻이다.

모름지기 고대 이래 종교적 희열은 그 종교의 개조인 성인의 말씀을 기록한 책, 즉 ‘경(經)’이 있음으로써 가능했다. 유교든, 불교든, 기독교든 성인의 말씀[經]은 성인이 일러주는 인생의 좌표라는 점에서 길[徑]과 통했다.

최근 인류는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또 하나의 경, 달리 말해 길을 얻었다. 그 길은 한국인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닦아 놓은 길이어서 더욱 의미가 새롭다. 세계 문화 유산이 세계 최초로 ‘CD 롬’이라는 편리한 그릇에 담겨 세상에 나왔다. 이른바 <고려대장경 전산화본 2000>(www. sutra.re.kr)의 출현이다.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문명이 변전하는 길목에서, 새로운 길을 얻은 ‘사부 대중’은 ‘손과 발이 저절로 춤추는’ 기쁨에 벌써부터 가슴을 설레고 있다.

전산화본 대장경을 부처님께 올리는 ‘봉정식’은 지난 12월6일 서울 올림픽 펜싱경기장에서 열렸다. 세속적인 장소의 대표 격인 올림픽 경기장이 한순간 가장 거룩한 의식을 올리는 성스러운 무대로 변한 것이다. 이 날 행사는 <고려대장경> 전산화 사업을 이끌어온 종림 스님(고려대장경연구소장·85쪽 상자 기사 참조)이, 갓 구워낸 CD 롬을 15층 탑 모양으로 쌓아 부처님 앞에 올리면서 절정에 올랐다. 행사에는 사부 대중 1만5천 명이 운집했다. 성철 큰스님 다비식 이래 사람이 가장 많이 몰린 불교계 행사였다.

조계종 종정 혜암 스님은 봉정식을 기려 ‘해변 너른 들에 금학이 춤추고 화산 주변으로 옥토끼가 달린다’고 노래했다. 백양사 방장인 서옹 큰스님도 법어를 베풀었다. 현존하는 종교계 지도자로서 세계적인 명성이 있는 달라이 라마는 축전을 보내 대불사의 성공에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온’ 찬사를 바쳤다. 조계종 총무원장 서정대 스님은 축사를 통해 ‘장경각에 묻혀 있던 부처님 말씀이 되살아나게 되었다’라고 선언했다. 그의 선언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부처님이 전한 말씀은 해인사 경내 장경각에 묻혀 있었다. 이른바 <팔만대장경>으로 잘 알려진 <고려대장경>이다. 이 대장경의 정확한 경판 수는 8만1천2백58 장. 경전의 종류는 총 1천5백14 종으로, 권수로 따지면 6천8백2 권에 이른다. 경판에 새긴 한자 수는 무려 5천만 자(字)가 넘는다.

그러나 극히 예외적인 몇몇 경우를 빼고서 이 방대한 분량의 부처님 말씀은 문자 그대로 창고에 ‘감추어져’(藏) 있었다. 유네스코가 제정한 세계 문화 유산의 하나로, 세계에서 가장 정확하고 오래된 불경 집대성으로 평가받아온 대장경이 정작 살아 있는 중생을 이끄는 길잡이로는 제구실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국내외 불교학자들은 지난 12월 7~9일 <고려대장경 전산화본> 완성을 기념해 대규모 국제 학술대회를 열었다. 전산화본 출현이 갖는 학술적·문화적 의미를 되새기는 자리였다.

행사 첫날, 고려대장경연구소 허인섭 학술부장은 ‘디지털 대장경’의 구성과 학술적 가치를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디지털 대장경의 최대 의의는 색인어를 통해 대장경 내용의 전모를 편리하게 찾아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연구소측은 검색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불교학자 찰스 뮬러(일본 도요가쿠엔 대학)가 제공한 불교 용어 14만어를 대장경과 일일이 대조하여 새로운 시스템을 만드는 지난한 작업을 벌였다. 디지털 대장경은 <팔만대장경>의 원문 외에도, 불교 용어 사전과 이체자(표기 당시 통용되던 정자와 모양이 다른 글자)를 중심으로 한 한자 자전(아래 상자 기사 참조) 서비스도 아울러 제공한다. 말 그대로 세계 최고의 디지털 경전인 것이다.

고려 왕조가 16년간 국력을 기울여 1251년 완성한 <고려대장경>은 경장(經藏·부처가 직접 설한 근본 교리)·율장(律藏·불제자가 지켜야 할 윤리 조항과 공동 생활 규범)·논장(論藏·경과 율에 대한 학자들의 설명 논의) 등 ‘3장’을 망라하고 있다. 세계 각국에는 불경이 단일 경전이나, 대장경 형태로 존재한다. 이 중 고려대장경은 판본의 엄밀성에서 가장 높이 평가받아 왔다.

<고려대장경>과 그 전산화본의 의의는 세계적인 불교학자로서 대장경 전산화 작업에 처음부터 참여하여 조언을 아끼지 않은 미국 루이스 랭카스터 교수(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 캠퍼스)의 한마디, 즉 ‘한자로 된 고대 불교 경전의 가장 오래된 완전한 세트’라는 말로 축약할 수 있다. 그는 학술 대회 인사말을 통해 “지금처럼 가슴 설레는 때가 없었다. 이같은 신기술이 가능해진 때에 살고 있다는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불경은 5세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1천 5백년 가까운 세월에 끊임 없이 편찬되었다. 이 과정에서 불경 편찬에는 전세계적으로 두 번의 큰 획기적 사건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활자본(목판본) 대장경 출현이며, 다른 하나가 오늘날 출판되는 책 형태의 대장경 출현이다.

<고려대장경>은 활자본 대장경 시대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유산이다. 찰스 뮬러 교수에 따르면, 이같은 활자본 대장경은 필사에 비해 △경전의 정확성에 상당히 높은 수준의 안정성·지속성을 제공하고 △복사를 통해 경전 대량 유포를 가능케 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의미를 갖는다. 이는 달리 말해 동아시아 불교 문명이 활자본 대장경을 통해 만개했음을 의미한다.
불경 편찬은 20세기 들어와 또 한번 획기적인 변화를 맞는데, 이를 대표하는 것이 바로 일본에서 편찬된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이다. 대정 연간, 즉 1921년에 시작해 1934년에 완성된 <신수대장경>은, 일본의 저명한 불교학자들이 그때까지 존재하던 한어(漢語) 불경을 집대성해 펴낸 것이다. 일본 도쿄 대학 마사히로 시모다 교수에 따르면, 이 <신수대장경>은 세계에서 처음 제본 형태로 출판되어 널리 보급됨으로써 최근까지 동서양 불교 학자들에게 한역 불경의 표준 역할을 해왔다. 물론 <신수대장경> 역시 <고려대장경>의 바탕 위에서 편찬된 것이다.

<고려대장경 전산화본>이 출현함으로써 불경 편찬은 새로운 ‘표준’을 얻게 되었다고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이 대장경은 한편으로 <고려대장경>의 장점을 이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신수대장경>이 취하고 있는 ‘아날로그 방식’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는 또 하나의 획기적인 전환이라는 것이다.

전산화본의 저본(底本) 격인 <고려대장경>의 가치는 몇몇 사례를 통해 입증된다. 불가에서 소의(所依) 경전의 대표로 꼽히는 〈금강경〉의 예도 그 중 하나다. 원래 고대 산스크리트어로 되어 있던 〈금강경〉은 중국 후진(後秦) 시대 구마라지바(鳩摩羅什)가 한역한 판본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바로 그 판본의 가장 완전한 형태가 <고려대장경>에 남아 있다는 것이다.

김종명 교수(동국대 사회교육원)는 또 다른 예를 든다. 김교수는 학술대회 이틀째인 12월 8일 ‘<고려대장경>의 전산화와 선문염송집’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의 핵심은 고려 시대에 나온 〈선문염송집〉(지눌의 제자인 혜심이 편찬)의 성격 해명에 있다.

이 책은 선사들의 공안 1천1백25칙을 모은, 동아시아에서 편찬된 공안집 가운데 가장 큰 규모에 속하는 중요한 문헌이다. 그에 따르면, 〈선문염송집〉은 오로지 <고려대장경>에만 존재한다.
<고려대장경 전산화본> 출현을 누구보다 반기는 쪽은 불교 학자를 비롯한 불교계이다. 양과 질에서 세계 최고의 컨텐츠를 자랑하는 <고려대장경>을 첨단 매체인 컴퓨터를 통해 누구든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됨으로써 엄청난 파급 효과가 예상된다는 것이다. 대장경을 이루는 8만 경판의 경문(經文)은 30초 안에 검색이 가능하다. 크리스찬 비턴 교수(타이완 중화불학연구소)는 “이같은 미래형 대장경은 지금까지 제한적으로만 텍스트에 접근할 수 있거나, 또는 전혀 접근할 수 없었던 지역들의 연구자와 독자에게 텍스트를 연구할 기회를 대폭 늘려 줄 것이다”라고 예상했다.

전산화본 대장경은 불교 영역을 뛰어넘어 다른 분야에도 학술적 이익을 나누어줄 것으로 예상된다. “동아시아 관련 학문의 어떤 분야도 불교적 영향을 떼어놓고서는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앞으로 관심의 축은, 대장경 전산화를 역사·문화·예술 등 다른 분야와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이동할 것이다”라고 고려대장경연구소 허인섭 학술부장은 말했다.

<고려대장경 전산화본> 개발은 불교계의 경사일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민족 문화 유산을 오늘에 되살려 재창조했다는 점에서 민족의 경사다. 한마디로 한국 문화사의 일대 쾌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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