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정선 '잃어버린 ‘대작'찾았다
  • 안철흥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3.11.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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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의 열세 번째 화첩 <구학첩> 일부 발굴·전시
완당(阮堂) 류의 문인화에 의해 기세가 꺾이기 전까지 조선 후기 회화는, 요새 말로 하면 사실주의를 지향하고 있었다. 주체적인 문예 의식이 사회 저변에 싹텄고, 옛것을 본받기보다 새롭게 창작되는 당대의 작품에 열광했다. 진경 산수화는 그런 사회 분위기의 산물이었다. 그 정점에 있는 인물이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년)이다.
그는 대가답게 수많은 그림을 남겼다. <박연폭포> <인왕제색도> <금강전도>가 대표작이다. 그는 또한 어느 화가보다 많은 화첩을 그렸다. 현재까지 <신묘년 풍악도첩> <관동명승첩> 등 모두 열두 권이 알려져 있다. 이 가운데 <사군첩> 등 세 권은 소재 불명이며, 아홉 권만 온전히 남아 있다. 하지만 미술사학계에는 이 열두 첩 외에도 <구학첩(丘壑帖)>이라는 열세 번째 화첩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는 설이 있었다. 관아재 조영석(1686~1761년)의 문집에 실린 ‘구학첩발’이라는 글 때문이었다. 이 글은 <구학첩>의 뒤에 붙인 제발문이 분명해 보였다. 그리고 ‘구학’은 곧 산수를 뜻하는 말이었으므로, <구학첩>은 산수화첩일 것으로 짐작되었다.

당대의 감식안 조영석의 품평도 ‘압권’

그런데 이번에 학계의 그런 추정이 사실로 확인되었다. 인사동 학고재 화랑이 재개관을 기념해 여는 <유희삼매(遊戱三昧)-선비의 예술과 선비 취미>전(11월20일~12월2일)에 충북 단양의 실경을 그린 겸재 정선의 그림 3점과 관아재 조영석·후계 조유수가 쓴 제발문이 출품되면서다. 유홍준 교수(명지대·미술사)는 “그림과 제발문을 정밀 검토한 결과, 이 그림들이 문헌으로만 희미하게 전하던 <구학첩>의 일부이며, 정선이 62~63세 때(1738년 정월 13일 이전)에 그린 작품으로 결론지었다”라고 말했다.

출품된 겸재의 그림 3점은 충북 단양 읍내의 정자를 그린 <봉서정>, 도담 삼봉을 그린 <삼도담>, 단양팔경 중 하나인 하선암을 그린 <하선암>이다. 모두 종이 위에 수묵 담채로 그렸으며, 왼쪽 위에 자필로 제목을 적어 넣었다. 그리고 각 그림마다 조영석과 이병연이 쓴 제화시가 붙어 있다.

이번 전시의 또 다른 즐거움은 겸재의 그림을, 그의 절친한 벗이자 당대의 ‘감식안’이었던 관아재 조영석의 ‘품평’과 견주어보며 감상할 수 있다는 점이다. 관아재는 겸재의 성취를 한없이 높게 평하면서도, 문제를 지적하는 데서는 추호의 거리낌도 없다. 관아재가 쓴 제발문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화면 배치를 보면 이따금 너무 빽빽하여 언덕과 골짜기가 화폭에 꽉 차서 하늘빛이 조금도 보이지 않으니, 원백(元伯, 정선의 자)의 그림은 공간 경영에서 미진한 바가 있는 듯하다. 원백 당신은 이 점을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학고재 재개관전에서는 국내 수입 서양화 1호로 기록될, 17세기 네덜란드의 동판화가인 페테르 솅크가 제작한 동판화 <술타니에 풍경>을 비롯해 한국계 중국 화가 김부귀의 <낙타도>, 작가를 알 수 없는 일본 <미인도> 등 조선시대에 유입된 18세기 외국 그림 3점도 공개된다. 이 그림들은 영·정조 때 의관이면서 시화 수집가였던 석농 김광국의 컬렉션에 포함되었던 작품들이다.
전시 기획자인 유홍준 교수가 11월24일 월요일 오전 10시, 관객 앞에서 직접 전시 작품들을 해설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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