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KBS 드라마 <태조 왕건>의 인기 비결
  • 박성준 ()
  • 승인 2000.11.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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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태조 왕건>, 직장 남성 시청자 사로잡아
KBS 주말 드라마 〈태조 왕건〉이 지난 4월 방영을 시작한 이래 매주 평균 35% 대를 웃도는 높은 시청률을 이어가고 있다. 〈태조 왕건〉은 첫 방영 때인 지난 4월1일에도, 첫 방영으로서는 〈모래 시계〉 이후 가장 높은 시청률(32.4%)을 기록해 눈길을 모았다. 이 드라마는 8월 마지막 주에는 시청률이 42.9%까지 치솟았다.

정통 사극을 표방하고 있는 드라마 <태조 왕건>은, 신라말 송악(개성) 지방 호족 출신인 왕건(최수종 분)이 궁예·견훤 등 군웅이 할거하는 후삼국 시대의 혼란을 평정하고 ‘역사상 최초’의 통일 대업을 이룩해 가는 과정을 기둥 줄거리로 한다. 전체 1백56회분으로 예정되어 있는 이 드라마는, 궁예(김영철 분)의 휘하에 들어간 왕건이 후백제와 맞붙어 금성 전투(904년)를 승리로 장식하고 충주로 진격하는 등 드라마의 중심 인물로 본격 등장하는 장면을 합쳐 11월4일 현재까지 모두 64회 방영되었다.

정통 사극으로는 보기 드물게 이 드라마가 인기를 누리고 있는 비결은 대략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소재의 참신성이다. 국내 방송 사상 ‘고려 시대’를 소재로 끌어들인 드라마는 〈태조 왕건〉을 빼놓고는 찾아보기 드물다.

〈태조 왕건〉이 갖는 소재의 참신성은 곧장 새로운 역사적 사실에 대한 시청자의 지적 호기심으로 이어진다. 일반 시청자 가운데는 이 드라마를 통해 고려를 개국한 왕건이 한때 궁예의 부하였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사람도 적지 않다. 이밖에도 후삼국 시대 3대 영웅(왕건·궁예·견훤)이 각축한 과정이, 당시의 생활상·복식·풍속 등과 더불어 비교적 사실에 가깝게 시청자에게 전달되고 있다.

이 드라마를 성공으로 이끌고 있는 또 다른 요소는 극적 재미이다. 드라마의 기둥 줄거리는 정사를 바탕으로 하되, 정사가 알려주지 못하는 부분은 작가(이환경)가 상상력을 적극 동원해 메워감으로써 갈등 구조를 극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갈등 구조는 기왕의 진부한 이분법적 선악 구도와는 거리가 멀다. 대신 〈태조 왕건〉은 드라마 전개 방식을 3각 구도로 설정해 긴장을 조이며 ‘낡은 소재’인 영웅 이야기를 새롭게 펼치고 있다. 제작진은 가공 인물과 허구를 적극 활용해, 사실을 중시하다 보면 자칫 다큐멘터리로 빠지기 쉬운 정통 사극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이 드라마에서 어린 시절의 왕건은 궁예와 조우하지만 이는 두 영웅의 ‘숙명적 만남’을 위한 장치일 뿐, 전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왕건과 정혼했다가 훗날 궁예의 부인이 되는 비운의 인물로 묘사되고 있는 강비(연화·김혜리 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사료에는 강비가 궁예의 손에 죽었다는 사실만 남아 있을 뿐, 왕건과 정혼하는 장면 역시 훗날 왕건과 궁예의 극적 대결을 위해 작가가 의도적으로 끼워 넣은 에피소드인 것이다.
특이한 것은 시청자의 반응이다. 대개의 연속극이 여성, 그것도 주부를 대상으로 기획되고, 시청률 또한 주부들에 의해 좌우되는 실정에 견주어 보면 〈태조 왕건〉에 쏠리는 남성 시청자의 반응은 대조적이다. 시청률 조사 기관인 AC닐슨이 최근 인기 순위 3위에 든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대한 성별·연령별 시청 동향을 조사했더니 30대 이상 한국 남성의 23% 이상이 드라마 <태조 왕건>(11월 첫째주 방영분)을 시청한 것으로 나타났다.

대개의 남성 시청자는 우선 이 드라마가 틀에 박힌 멜로물이 아니라는 점에 반색한다. 막대한 제작비(편당 2억원)를 투입해 실감 나게 그리는 대규모 전투 장면도 남성 시청자가 즐겨 보는 눈요깃감이다.

게다가 극중 인물들이 펼쳐 가는 권력 다툼의 장대한 파노라마는, 드라마를 통해서나마 욕망 실현의 희열을 맛보게 하는 ‘대리 충족’ 기제로 작동해 직장인 남성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경기도 의정부시에서 자동차 영업에 종사하는 박은석씨는 “권력을 둘러싼 암투와 헤게모니 쟁탈전이 흥미롭다”라고 말한다.

특히 남성 시청자를 파고드는 <태조 왕건>의 진짜 매력은, 시청자들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인물 군상 하나하나를 자신과 동일시하며 ‘나라면 어떻게 할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끔 한다는 데 있다. 이 드라마를 즐겨 본다는 출판사 직원 윤석구씨는 “드라마를 보면서 내 인생을 떠올린다. 때때로 등장 인물이 좌절하거나 성취하는 모습을 통해 통쾌함이나 교훈을 얻는다. 지금은 나라를 세울 때만 해도 주위의 지지를 받았던 궁예가 어떤 과정을 거쳐 몰락해 가는지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라고 말한다.

〈태조 왕건〉은 방영 시점이 공교롭게도 대통령 선거 이후 복잡하게 전개되는 국내 정치 상황, 6·15 남북 정상회담 이후 급류를 타기 시작한 남북 관계 등과 맞물려 시청자에게 더 실감을 주기도 했다. 드라마의 시대 배경이 되고 있는 ‘후삼국 시대’가 지역주의가 판치는 대선 이후의 상황에 곧바로 대입되거나, 통일 논의가 뜨겁게 일고 있는 최근 남북 관계로 이어져 시청자의 상상력을 자극했던 것이다.
제작진도 드라마에 쏟아지는 지나친 정치적 해석에 대해서는 부담감을 느끼면서도, 드라마가 갖는 일종의 ‘역사 교육’ 기능에 대해서는 나름으로 뚜렷한 입장을 내세우고 있다. 고려사 연구자들이 이 드라마에 대해 부분적으로는 불만을 표시하면서도 전체적으로는 후한 점수를 주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김갑동 교수(대전대)는 “지금까지 시청자들은 ‘조선 시대’가 우리 역사의 전부인 것으로 여겨왔다. 드라마 대부분이 조선 시대만 재탕삼탕 방영해 왔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고려 시대를 전면에 내세워 통일 문제를 설득력 있게 그리고 있는 〈태조 왕건〉은 일단 시도했다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라고 말한다.

반면 바로 이같은 사실을 감안해 앞으로는 사실성의 비중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역사를 소재로 한 드라마에 늘 따라다니는 ‘사실과 허구를 착각할 수 있다’는 지적에서 〈태조 왕건〉 역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한켠에서는 자막 하나만 잘못 나가도 전화가 빗발치는 시청자들의 뜨거운 관심과, 다른 한켠에서는 역사적 사실 왜곡 여부를 냉정하게 따지는 전문가들의 매서운 눈초리를 받아가며 〈태조 왕건〉은, 왕건 일파가 마침내 궁예 일파를 내쫓고 왕위에 등극하는 극중 반환점을 향해 힘차게 내닫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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