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휴전선 따라 펼치는 ‘한풀이’ 퍼포먼스
  • 시사저널이상철 (lee@sisapress.com)
  • 승인 2000.10.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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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김주영씨, 작품 태워 ‘통일 염원’… 남은 재와 기록으로 개인전도 열어
지난 9월21일 오후 2~5시 서울에서 가장 복잡한 곳 가운데 하나인 남대문시장 입구에서 이색적인 퍼포먼스가 벌어졌다. 삼베로 지은 실용 한복을 입은 한 여성이 목소리를 높였다. “통일에 대해 한 말씀 적어주세요. 사인만 하셔도 돼요.”

그러나 그 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손사래를 치며 제 갈길을 가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영업에 방해가 된다며 시장 지게꾼들이 서명용 탁자를 번쩍 들어 다른 곳으로 옮겨도 그녀는 ‘쫓겨난 것이 영광’이라며 즐거워했다.

남대문에서 벌어진 이 광경은 화가 김주영씨가 ‘통일 염원’을 주제로 11월12일까지 진행하는 퍼포먼스의 제1막이다. 김씨는 남대문시장에서 시민들로부터 한지에 글을 받은 뒤, 9월27일~10월3일 휴전선을 따라 서해안에서 동해안까지 2백50km에 이르는 두 번째 퍼포먼스에 들어간다.

자연에서 났으니 자연으로 돌려보낸다

강화군 교동도, 경기도 문산 선유리, 임진각, 철원 등지에서 펼쳐지는 두 번째 퍼포먼스는 시민들로부터 받은 글들을 지방(紙榜)처럼 태우며 분단으로 희생된 수많은 이들의 영혼을 위무하는 행위 예술이다. 광목의 매듭을 잘라 태움으로써 실타래처럼 얽히고 설킨 현대사를 푸는 의식도 함께 행한다.

김씨가 불로 태워 만든 재들은 상자에 담겨 10월28일~11월12일 서울 인사아트스페이스에서 촛불 조명 아래 전시되며, 그 모든 과정을 기록한 사진·작업 노트·일기가 책으로 묶여 출판되면 퍼포먼스는 끝을 맺는다.

1986년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해온 김씨는, 전시·퍼포먼스를 한 뒤 자기 작품을 모두 태우는 것으로 작업을 마무리하는 독특한 작가이다. ‘사람이든 물질이든 자연에서 났으니 자연으로 돌려보낸다’는 생태학적인 의미를 지닌 작업이다. 그녀는 자기 작품이 미술관에 물질로 소장되기보다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래 저장되기를 원한다.

김씨는 <이름 없는 영혼들이여>라는 제목으로 펼치는 이번 퍼포먼스를 2년 전부터 준비해 왔다. 1942년에 태어난 김주영씨는 서울 거리와 휴전선 근처에서 처음 벌이는 이번 작업을 통해 자신의 원래 이름을 되찾았다. ‘현선영’. 해방 공간에서 좌익 활동을 했던 아버지 때문에 버려야 했던 이름이다. “어머니가 자식들의 성과 이름까지 바꾸면서 그 문제를 철저하게 잊고 살게 하셨지만, 아무리 삭이려 해도 마음에 앙금으로 남아 있었다”라고 그녀는 말했다.

이번 퍼포먼스는 분단으로 인해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고 있는 응어리를 푸는 제의이자, 작가가 가슴에 맺힌 한을 푸는 개인적인 굿이기도 하다. 그녀가 미술관이나 대학 같은 ‘고상한 장소’가 아니라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남대문시장을 첫 번째 한풀이 장소로 삼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남대문에서는 ‘6·25 전몰 장병 무명 용사 모든 영혼이 고이 잠드소서’라는 한 중년 남자의 기원에서부터 ‘평양으로 신혼 여행을 가고 싶다’는 청년에 이르기까지 김씨의 퍼포먼스에 적극성을 보인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통일을 원치 않아 사인할 수 없다’는 이들도 더러 눈에 띄었다.
작가는 이 작업이 무당이 펼치는 굿과 다름없다고 했다. “예술가는 어차피 무당 아닌가. 정신이 절정에 오른 뒤에 찾아오는 평정이 나는 너무나 좋다”라고 그녀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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