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한국 고대사 바로 세우기 큰 성과
  • 朴晟濬 기자 ()
  • 승인 2000.01.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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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백제 역사 중심으로 두드러진 성과
윤명철이라는 고대사 연구가가 있다. 국내에서는 가장 일찍이 고구려사를 주제로 하여 박사 학위(〈고구려 해양 교섭사 연구〉 1993년)를 받았고, 고대사와 관련된 주제라면 분야를 가리지 않고 나서서 소신을 밝히는 의욕 넘치는 소장 연구가이다. 윤씨의 명함에는 ‘동국대 사학과 겸임 교수’‘고구려연구회 연구위원’이라는 직함 외에 또 하나 눈길을 끄는 이름이 박혀 있다. 바로 ‘탐사문화연구소 소장’이라는 다소 이색적인 꼬리표가 그것이다.

순전히 혼자 힘으로 운영하는 이 연구소의 이름을 내세워, 윤씨는 최근 몇년간 수차례에 걸쳐 언론의 관심을 불러모은 흥미로운 탐험을 감행한 바 있다. 그는 일찍이 1982·1983년 두 차례에 걸쳐 뗏목을 타고 대한해협을 건넜다. 1997년 6월 하순에도 또 한번 모험심 어린 시도를 감행했다. 스스로 만든 뗏목 ‘동아지중해호’를 타고 중국 저장성 해안을 출발해 17일 항해한 끝에 동중국해를 건너 흑산도에 이른 것이다.

항해 목적은 고대 동북 아시아, 정확히는 한국과 중국 간에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항로를 복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이같은 탐험을 통해 고대는 물론 선사 시대의 해양 왕래도 복원할 수 있음을 입증해 보였다.

최근 그는 또 하나의 탐험을 기획하고 있다. 통일 신라기 청해진을 중심으로 황해 일원의 제해권을 장악해 거대한 ‘해상 왕국’을 건설한 장보고가 실제 활동했던 항로를 직접 되밟아봄으로써 당시 해상 왕국의 실상을 더 분명하게 알아보자는 것이다. 윤씨는 이를 통해 박사 학위 논문 제출 이래 자신의 지론이 되어온 ‘동아 지중해론’의 구체성을 확보해갈 생각이다.

‘식민 사관’과의 고통스런 싸움

동아 지중해론의 핵심은 단순화해 말하자면 고구려·백제·신라 3국은 물론 고대 중국과 일본 모두가 바다 패권을 놓고 일대 격전을 벌인 드라마가 바로 동아시아 고대사를 이해하는 데 기본 축이 된다는 설이다. 삼국 시대 하면 으레 중국 또는 내륙으로의 진출만 연결지어 생각해온 기존 고대사 시각과는 180° 다른 것이다. 그의 시각은 학계 일반에서는 여전히‘이단’으로 취급되고 있지만, 최근 동료들로부터 적지 않은 관심과 함께 상당한 지지를 얻고 있다.고대사 연구 지도가 바뀌고 있다.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한반도 고대사에 관한 논의는 한반도에 집중해 있었다. 중국 역사서에 기록된 대로 한반도에 ‘한사군’은 존재했는가, 일본 학계가 주장하는 것처럼 과연 한반도 남부에 ‘임나일본부’가 존재했는가, 백여 년간 논란거리가 되어온 광개토태왕비(대왕의 대(大)는 고대에 ‘태’로 읽혔다. 따라서 ‘태왕’이라는 표기가 맞다) 기사는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따위가 대표적이다. 주로 일제가 대륙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퍼뜨린 ‘식민 사관’의 잔재이기도 한 이들 문제는 기존 학계가 수십 년간 싫든 좋든 반드시 씨름해야 할 고통스런 연구 주제가 되어 왔다.

식민 사관을 극복한다는 차원에서 이들 문제를 해명하는 작업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과제로 여겨지고 있지만, 상황은 예전의 모습과 크게 달라졌다. 식민 사관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일단의 소장 연구자들이, 전에 없던 시각과 새로운 방법론을 들고 나와 역사 서술의 무대에 전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연구 주제를 다양하게 잡고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선배 역사학자들이 식민 사관과 투쟁하면서 저도 모르게 식민 사관의 굴레에 빠져들기도 한 데 비해 이들 대부분은‘주변국 연구 성과와의 호혜 평등’을 외치며 비교적 중립적인 입장에서 고대사를 재구성하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이 가운데 최근 10년 사이 가장 풍부한 연구 성과를 내놓고 있는 고구려사 분야의 움직임은 주목할 만하다.

그야말로 20세기의 끄트머리였던 지난해 11월 말 일반 독자를 겨냥해 시중에 나온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나〉가 단적인 사례다. 최근 들어 고구려사 분야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보이고 있는 소장 연구자인 김용만씨가 쓴 이 책은, 고구려 벽화에 대한 기존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고구려 역사를 생활사 중심으로 기술했다. 이 책에는 눈길을 끄는 지도가 한 장 들어가 있다. 이 책 6장 앞머리에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실린 간이 지도가 그것이다. 이 지도에는 고구려가 가장 강성했던 시기 고구려의 강역이 한반도 어느 지역에까지 이르렀는가가 일목요연하게 표시되어 있다.

발상 전환으로 윤곽 드러내는 고구려의 비밀

문제는 이 지도가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한반도 지도와 달리 거꾸로 뒤집혀 있으며, 육지 쪽보다는 바다 쪽으로 화살표가 훨씬 더 복잡하게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화살표 방향은 중국 방면으로는 한반도 각지에서 시작하여 저장성·랴오허·산둥 지방에 이르고, 일본 방면으로는 두만강 입구와 함경도 해안에서 시작하여 니카타·노토 반도·쓰루가·이즈모 및 왜(일본 남부) 등 일본의 주요 해안 지역에 이른다. 말하자면 이 지도는 한반도를 거꾸로 세워놓음으로써 지은이가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고구려가 한때 동해와 서해를 내해로 삼았다는 사실을 매우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고대 동북아 세계에 대해 이처럼 발상 전환이 가능케 된 것은 무어니 무어니 해도 1990년대 초·중반 이래 급변한 연구 여건 변화, 유적·유물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 등에 힘입은 바가 크다. 1990년대 이전까지 고구려사 연구는 한·중 관계 등 국제 정치적인 제약에 묶여 답보 상태를 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중국과 국교를 수립한 이후, 한국 학자들은 광활한 중국 대륙을 누비며 고구려 유적·유물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연구할 기회를 얻었다. 비록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줄이은 현지 답사 결과, 국내 학자들이 현재 내리고 있는 결론은 통설과 사뭇 다르다. 고구려가 상상 밖으로 동북아 전체의 고대 질서를 좌우했던 강국이었음은 물론, 중국 고대 사회의 문화와도 뚜렷하게 대비되는 독자적인 문화를 건설했다는 사실이다.

최근 일부 학자 사이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삼국 통일 전쟁’ 성격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이나, 고구려 문명의 독자성에 대한 평가도 모두 이같은 답사를 통해 가능해졌다. 삼국 통일 전쟁은, 지금껏 신라에 의한 삼국 통일 전쟁으로만 해석되었다. 하지만 현재 이 부분에 대한 논의는 삼국 통일 전쟁을 ‘동아시아 종주권을 둘러싼 국제전적 성격’이라고 보는 시각이 빠르게 퍼지고 있다.

반면 만주 일대에 흩어진 고구려 성곽·고분 벽화 등의 유적 조사·연구(벽화의 경우 울산대 전호태 교수의 연구가 대표적) 결과는 고구려(나아가 삼국 전체)가 정치적으로는 물론 문화적으로도 중국과는 상당히 다른 방식의 독자적 발전 양상을 보여왔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한국의 고대 문화는 성곽 축조술·건축 등 주요 분야에서 중국의 영향을 받아온 것으로 여겨져 왔지만(이는 중국 학계의 일반적인 주장이기도 하다), 실제로는 대등한 입장에서 중국과 교류해 왔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오히려 중국에 영향을 주었을 공산도 크다는 것이다.

아울러 고고학적 발굴 역시 고구려사 연구에 새로운 기폭제로 작용했다. 이 중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서울 아차산의 보루성, 경기도 연천의 호로고루, 경기도 포천의 반월산성 등 한반도 남부에서 발견된 고구려 유적지이다.

남한에서 고구려 유적이 발견되거나 발굴되기 시작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고구려의 남하에 대한 국내 연구는 이전까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 기존 역사서를 분석해 추정하는 수준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최근 이루어진 유적 발굴 결과를 토대로 고구려의 남하 경로, (신라·백제에 대한) 공격과 방어 경로가 매우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게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비근한 예가 지난해 10월 초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회의장에서 있었던 제5회 고구려 국제학술대회이다. ‘고구려 산성과 방어 체계’라는 주제로 열린 이 대회에서는 아차산 유적 발굴을 주도한 서울대 최종택 교수에 의해 경기 북부 지역의 고구려 유적을 토대로 고구려의 방어 체계를 종합적으로 그려본 논문이 나왔다. 애초 남한의 고구려 유적은 1977년 발굴된 구의동 보루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말 구의동 보루 규모의 10배가 넘는 고구려 군사 유적을 서울대 조사단이 발굴하면서 추정에만 그치던 고구려의 한강 이남 진출 경로가 △적성(칠중성)-양주-중랑천·왕숙천 루트 △개성-파주-서울 루트 △서울-포천-서울 루트 등 매우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특히 아차산 제4 보루에서는 고구려 철제 무기가 다량 출토되어 상당한 숫자의 고구려군이 이곳에 진주했음을 증명해 보이기도 했다.고구려사 연구가 활발하고 기존 유적지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조사 작업이 이루어지면서 백제·신라 등 다른 고대 왕국 연구도 큰 변모를 겪고 있다. 특히 고구려와 함께 신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았던 백제사 연구가 흥기하고 있다. 백제의 경우 한때 북진 정책을 취해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는 등 특히 4세기께인 근초고왕 때 전성기를 맞았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정설이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 성과는 당시 백제의 세력 판도가 단순히 한반도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중국의 화북 지역에 이르는 등 ‘범동북아적’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또한 백제가 농업 국가로서 비좁은 한반도에서 이웃 국가와 패권을 다툰 나라가 아니라, 중국 요서 지방까지를 활동 무대로 했던 동북아의 강국이었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아울러 백제 지역에 대해서는 기존 논의를 통째로 뒤엎을 만한 중대한 논쟁이 진행되고 있다. 전남 나주의 ‘반남면 고분’을 둘러싼 해석 문제가 대표적이다. 바닷가에 면한 전남 나주군 반남면 자미산 일대에는 ‘반남 고분군(群)’이라고 일컬어지는 규모가 매우 큰 고분이 30여 기 산재해 있다. 사실 이 고분군은 일찍이 일제 때부터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이유는 이곳에 산재한 고분의 겉모양, 그리고 금동관 등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이 일본 고대 문명 발상지의 한 곳으로 꼽히는 구마모토 현 후나야마(船山) 고분과 닮았기 때문이었다.

쟁점으로 떠오른 나주 반남면 고분군

실제로 최근의 발굴·조사 결과 이 지역의 고분은 일부가 △전방후원형(前方後圓形·봉분의 압부분은 방형이고 뒷부분은 원형)이라는 점 △또 다른 일부가 무덤 주위에 도랑이 조성되어 있다는 점 등에서 왜(倭)의 무덤 조성 방식과 동일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문제는 과연 어떤 과정을 통해 이 무덤이 한반도에 생기게 되었느냐는 것이다. 발굴 당시 일본 학자들은 무덤의 주인을 (일본에서 한반도로 진출한) 왜인으로 보았다(이것이 사실일 경우, 일본의 임나일본부 경영설은 유력한 증거를 확보하게 된다). 하지만 국내 학자들은 이를 달리 해석하고 있다. ‘반남면 고분은 한반도 안에 있던 왜의 중심 세력이 일본 열도로 진출해 일본 고분 시대를 열었음을 말해 주는 좋은 증거’라는 것이다.
한가람역사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는 이희근 박사 같은 이가 대표적이다. 이박사는 “많은 학자들이 왜의 한반도 존재설을 부정해 왔지만 이는 옳지 않다. 왜는 한반도 남부(반남)에 근거지를 두고 중국과도 왕래하는 등 한반도에 분명하게 실재했었다. 단 여기서 말하는 왜는 서기 400년을 전후해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결정타를 입고 일본으로 근거지를 옮긴 왜를 말한다. 즉 이들 왜는 일본을 근거지로 한반도에 진출했다는 일본 학자들의 주장과 근본적으로 성격을 달리하는 왜인 것이다”라고 말한다.
최근 백제사 분야에서 반남면 고분 성격을 둘러싼 논쟁과 더불어 가장 활기를 띠고 있는 연구 주제로는 초기 백제의 도읍지를 비정(批定)하는 문제가 있다. 현재까지 이 방면에 대한 정설은 고구려 주몽의 두 아들인 비류와 온조가 미추홀(인천 방면)과 위례성에 각각 나라를 세웠으며, 오늘날 논의되는 백제는 바로 온조를 시조로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온조가 도읍을 정했다는 위례성의 위치가, 논의만 분분한 채 오랫동안 확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백제사(마한사) 연구가인 박찬규 박사의 설명에 따르면, 위례성의 위치는 그동안 ‘경기도 광주설’(정약용) ‘하남 춘궁리설’(이병도) ‘남한산성설’(천관우) 등이 경합했다. 그런데 1980년대 들어서면서 몽촌토성과 풍납토성, 그리고 최근
의 이성산성이 잇달아 발굴되면서 초기 백제 도읍 문제가 한층 구체성을 띠고 논의되기 시작했다. 이 문제는 현재까지도 뚜렷한 결론을 얻지 못했지만 몽촌토성설과 풍납토성설이 가장 많은 지지자를 확보하며 새로운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고구려사와 백제사에 대한 연구가 최근 비약적인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반면, 과거 ‘고대사 연구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신라사 연구는 상대적으로 부진하다. 고대사 연구의 ‘지방화’ 추세 덕분에 활기를 띠는 가야사 분야를 제외하고는, 신라사 전체에 대한 연구 붐이 점차 퇴조하는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21세기 역사학의 화두는 고대사

물론 이런 분위기에서도 학계 전체를 요동치게 할 중요한 논쟁이 진행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서강대 이종욱 교수에 의해 제기된 ‘부체제설(說) 비판’ 논쟁과, 일본 호류사에서 ‘장적 문서’(일종의 토지 문서)가 발견된 것을 계기로 불붙고 있는 고대·중세 논쟁이 단적인 사례다. 부체제설 논쟁은 기존 연구가 신라 사회를 통칭 ‘부(部)’로 통하는 부족 사회의 연합체로 보는 데 비해, 이교수 등 일단의 학자들은 이와 달리 신라를‘처음부터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였다고 파악한 데에서 빚어졌다. 반면 고대·중세 논쟁은 시대 구분과 관련된 것이다. 종래 학설은 한반도 중세의 기점을 고려 왕조를 중심으로 잡았으나, 장적 문서가 발견된 이후 학계에서는 중세 기점을 더 올려잡아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이처럼 고대사 연구 분야에서 이는 새 바람은 신진 학자 진출, 연구 방법론 다양화, 특정 분야 전문화 등에 힘입은 바 크다. 예컨대 전공자가 거의 없던 고구려사의 경우는, 1990년대에 들어와서만 10여 명의 박사 학위 소지자를 만들어냈다. 또 1994년에는 사단법인 고구려연구회(회장 서길수 교수)가 정식 발족해 현장 답사와 대규모 국제 학술 대회를 연례적으로 개최하는 등 고구려사 연구열을 촉발하는 데 불쏘시개 구실을 하고 있다. 2000년대에는 바로 이같은 전사(前史)를 바탕으로 고대사 연구가 한층 더 폭발적인 양상으로 전개되리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예측이다.

하지만 한켠에서는 바람직한 발전을 위해 반드시 선결해야 할 과제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높다. 기존 고고학은 물론 인류학·민속학·문학 등 인접 학문과의 교류 폭을 넓힐 때에만 고대사가 진정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학계에서는 고대사 연구가 현대 한국인에게 거시적 전망을 제공하지 못해 왔음을 지적하고 반성하는 목소리도 높다. “지금까지의 고대사 연구는 실증 사학이라는 이름으로 소주제에만 매달리는 풍토에 얽매여 있었다. 변혁기 민중에게 거시적 전망을 제공하지 못하는 한 역사는 결코 제 구실을 할 수 없다”라고 윤명철씨는 주장한다. 역사학, 특히 고대사 연구의 중요성은 지금처럼 한 시대가 가고 새로운 시대가 오는 커다란 전환기를 맞을 때일수록 더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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