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사=요동사`를 반박한다
  • 조법종 (우석대 사학과 교수) ()
  • 승인 2004.02.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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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규 교수의 ‘요동역사공동체론’을 반박한다
김한규 교수(서강대·동양사)는 곧 출간될 <요동사(遼東史)>(문학과지성사)에서, 고구려사 논쟁을 원점에서부터 뒤엎는 충격적인 역사 해석을 선보이고 있다. 그에 따르면, 요동 지역에는 중국이나 한국과는 다른 제3의 역사 공동체가 존재했으며, 고구려는 요동 공동체에 속한 국가였다. <시사저널>은 지난주(745호)에 ‘고구려는 한국에 속하지 않았다’는 기사를 통해 김교수의 책 내용을 소개한 바 있다. 다음 글은 김교수의 주장에 대한 조법종 교수(우석대·한국사)의 반론이다. 조교수는 한국고대사학회를 중심으로 꾸려진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대책위원회’ 소속이다.

최근 우리 역사 학계, 특히 한국고대사 학계는 기존의 역사 인식 체계에 대한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과거 역사 논쟁에서 쟁점화했던 임나일본부나 독도 문제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해석·평가의 문제로서 우리 역사의 근본적인 인식 체계와 관련된 문제 제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최근 중국이 진행하고 있는 ‘동북공정’의 고구려사 왜곡은 고구려사의 중국사 편입은 물론 고조선 및 예맥족, 부여, 발해 역사의 중국사 편입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어 문제가 심각하다. 이는 우리 역사 인식의 근간을 부정하고 우리 민족의 정체성마저 부정하는 엄청난 문제를 야기한다.

그런데 이같은 논의와 약간 성격은 다르지만 결과적으로 동일한 결론을 유도하는 견해가 최근 우리 학계에서 제기되었다. 김한규 교수(서강대)가 <요동사>에서 주장하는 내용이 그것이다.

필자는 아직 <요동사>를 읽지 못했지만, <시사저널>에 보도된 것을 보면 김교수는 자신이 이미 <한중관계사>에서 제기한 기존 입장을 바탕으로 ‘요동사’라는 새로운 인식틀을 제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최근 중국의 동북공정과 같은 궤에서 이 논의가 연결될 수 있다는 점에서 필자는 구체적 문제점과 이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고자 한다.
김교수는 요동의 독자성을 전제로 새로운 역사 중심 축을 한국과 중국 사이에 신설했다. 그러나 요동 지역은 한국과 중국 역사의 변경지대로서 선사 이래로 독자적인 문화 단위가 형성된 적이 한 번도 없다. 우선 한반도를 중심으로 요동반도로 연결되는 지역에 한국의 대표적 청동기 문화 유적인 고인돌(지석묘) 문화와 비파형 청동단검 문화가 퍼져 있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러한 문화는 요동반도-한반도-일본 규슈 지역까지 연결되며, 중국과는 다른 문화 범위이다. 이는 요동 지역만의 독자 문화권역 설정이 불가하다는 전제가 된다.

또한 예(濊)·맥(貊)·한(韓)은 동일한 청동기 문화와 계통을 갖는 종족이 지역적으로 분화해 중국인들에 의해 명칭이 달리 표현된 것일 뿐, 이질적인 종족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거주 지역 환경에 따른 생계 방식의 변화는 있었으나, 기본적 계통과 내용이 동일했고 비슷한 시점에 중국 사서에 나타나고 있다.
고구려는 기본적으로 다종족 국가체였다. 김한규 교수는 한족(韓族) 계통이 평양 천도 이후에나 포섭되었다고 하면서 평양 천도를 중요한 기점으로 설정했다. 그러나 이는 고구려 역사를 잘못 이해한 결과이다. 이미 평양 천도 전부터 고구려는 한족 계통을 동일 공동체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고구려 통치 범위로서 인식하고 있었다. 즉 중국과는 구별되는 별도의 천하관을 바탕으로 백제·신라·부여 등을 포괄하여 이들을 속민·신민 등으로 장악하고 있었다. 특히 광개토왕은 자신의 무덤을 관리할 수묘인(守墓人)을 모두 새로이 고구려 백성으로 포섭된 ‘신래한예(新來韓濊)’ 2백20가로 구성하게 하였다. 이는 평양 천도(427년) 이전에 있었던 일(412년)이다. 특히 광개토왕이 정복하고 포섭한 수많은 종족(숙신, 거란, 중국의 후연, 왜) 가운데 유독 이들 한예 집단만을 토착민과 동일하게 대우하며 자신의 수묘인으로 삼았다는 것은 이미 천도 이전부터 문화와 언어, 종족적 일체감이 있었다는 것을 반영하는 결정적 사실이다. 따라서 평양 천도 이후에나 종족 및 언어적 연결이 있었다는 김교수의 주장은 사료를 잘못 이해한 것이며, 이같은 이해를 근거로 고구려와 백제·신라의 이질성을 부각하는 논리 또한 성립할 수 없다.

고구려와 백제가 부여를 매개로 같은 역사 계승 의식과 동족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이미 중국 사서인 <위서>에도 나와 있다. ‘신(백제)과 고구려는 그 근원이 부여로부터 (함께) 나왔다. (따라서) 선대 이래로 옛정을 돈독히 하였다(臣與高麗 源出夫餘 先世之時 篤崇舊款)’라는 구절이다. 또한 <수서> 신라전에는 고구려 유민 세력이 신라를 세웠다는 견해가 보인다. 이는 고구려-백제의 혈연적 공동체 인식과 고구려-신라와의 밀접성을 확인시켜 주는 것으로, 결국 삼국이 혈연적 공동체 인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확인시켜 준다.
<삼국사기>는 삼국 시대 사람들이 통역 없이 대화하고 있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즉, 장수왕이 파견한 고구려 승려 간첩 도림(道琳)은 백제로 망명해 개로왕과 개인적으로 바로 대화하고 있다. 고구려인과 백제인이 통역 없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니혼 쇼키(日本書紀)>에도 나와 있다. 즉 고구려와 백제가 군사적으로 대립하던 성왕 시기에 고구려 장수와 백제 왕자 창(위덕왕)이 전투 때 서로 예를 갖추어 통성명을 하고 전투를 했는데, 그때 서로 성명·관위·나이 등을 주고받는 대화 내용 중에 백제 왕자가 자신의 성씨가 부여씨여서 고구려 장수와 같다는 것을 언급하는 대목이 나온다. <삼국사기>에는 또한 신라의 거칠부가 젊었을 때 고구려 지역에 가서 혜량 법사를 만났을 때 서로 간의 대화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는 대목도 나온다. 다만 이종 간의 언어 차이가 아닌 지금과 같은 사투리의 존재는 상정된다. 결국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도 언어 소통에 문제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김한규 교수가 제기한 요동사, 다시 말해 요동역사공동체론이라는 개념은 고구려가 백제·신라와 다른 문화체라는 전제 하에 제시된 것이다. 그러나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구려·백제·신라는 혈연·언어·문화 공동체로 존재했으며, 특히 고조선-삼한-고구려·백제·신라·발해-고려로 연결되는 역사 계승 인식은 최치원의 삼한 삼국 계승 인식과 김부식의 <삼국사기> 이래 현재까지 1천5백년 이상 유지되고 있다. 이에 반하여 요동사 개념은 고고학적·역사적 근거도 설정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당대 인식에서도 확인할 수 없었고, 후대 계승 국가에서도 제기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같은 견해는 학자의 학문적 창작 개념일 뿐 역사적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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