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 속에 펼친 추사 글씨의 진수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4.02.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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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글씨 탁본전’/과천 시절 명품·대작 눈길 끌어
서울 강남 봉은사에 가면 ‘판전(板殿)’이라는 전각이 있다. 화엄경 목판을 보관하기 위해 지은 것인데, 추사 김정희(1786~1856)가 현판 글씨를 써서 더욱 유명해진 곳이다. 1856년 10월, 늙고 병든 추사는 어린애 몸통만큼이나 큼지막한 글씨 두 자를 쓰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추사는 이 두 글자를 쓴 다음 ‘칠십일과병중작(七十一果病中作; 71세 된 과천 사람이 병중에 쓰다)’이라고 쓴 뒤 낙관을 찍었다. 그리고 사흘 뒤 세상을 떠났다. ‘판전’은 속된 기운이나 기교 한 점 없이 고졸(古拙)한 맛이 풍기는 글씨다. 하지만 원본이 높다란 처마에 달려 있는 데다가 금색 칠까지 되어 있어 묵향을 느끼기에는 아쉬운 감이 없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한국미술연구소(소장 홍선표)와 과천시가 공동 주관하는 ‘추사체의 진수-과천 시절 추사 글씨 탁본전’(2월18일까지, 과천시민회관 2층 전시실)은 추사의 유필을 바로 코앞에서 감상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추사 글씨전은 여러 곳에서 많이 열렸지만, 글씨 탁본만 가지고 여는 전시는 처음이다.

전시회에는 탁본이 모두 70여 점 나와 있다. 목각 탁본이 40여 점, 목판 글씨첩이 11종, 금석문 탁본이 12점인데, 모두 전국의 사찰이나 개인에게서 수집한 것이다. ‘이위정기(以威亭記)’처럼 30대 초반에 쓴 작품도 있지만, 대개는 과천에서 말년을 보낼 때 쓴 글씨들이다.
추사는 1852년(철종 3년) 함경도 북청 유배지에서 풀려나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초막을 짓고 은거했다. 이후 후학을 가르치며 죽을 때까지 4년 동안이 이른바 ‘과천 시절’로 불리는 기간이다. 온갖 세파에서 벗어나 무심의 경지에 오른 그는 이 때 추사체의 명품이라고 불리는 대작을 많이 남겼다. 이때 추사는 ‘노과(老果)’ ‘노완(老阮)’ ‘칠십일과(七十一果)’ 같은 낙관을 사용했다.

전시회에 나온 작품 중에는 2m가 넘는 대형 현판 글씨가 몇몇 눈에 띈다. ‘판전’이나 경북 영천 은해사의 불광각에 걸려 있던 ‘불광(佛光)’, 충남 예산 화암사의 ‘무량수각(无量壽閣)’, 추사 글씨의 백미로 평가되는 ‘일로향각(一爐香閣)’ 등 예서나 해서로 또박또박 눌러쓴 대형 현판 글씨들은 탁본을 뜨지 않았다면 자세히 감상하기 어려웠을 작품들이다. 추사의 필력이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라는 것과, 추사체는 작은 글씨보다 큰 글씨에 장점이 많다는 것을 말해주는 작품들이다.

또한 유홍준 교수가 소장한 ‘소창다명(小窓多明)’ 같은 글씨는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우리는 추사가 예서체로 눌러 쓴 ‘밝을 명(明)’ 자를 보고 나서야 ‘밝다(明)’는 뜻을 가진 한자가 해(日)와 달(月)을 합쳐놓은 것이 아니라 창가에 비친 달빛을 묘사한 글자였음을 깨닫게 된다. 전시회에는 이런 명작 탁본들이 많이 나와 추사체가 주는 글씨의 힘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글씨의 예술적인 맛은 평면에 쓰였을 때와, 이를 음각 혹은 양각으로 조각한 뒤에 보는 것과, 또 종이를 밀착시켜 탁본으로 떠낸 뒤에 보는 것이 각각 다르다. 그림에도 판화가 있듯이, 목각이나 석각의 탁본 글씨는 원본과는 또 다른 느낌을 준다. 뿐만 아니라 은은한 묵향마저 즐길 수 있다. 동양에서는 오래 전부터 탁본을 원본과는 별개의 예술품으로 대접해 왔다.

이런 점 때문에 옛 선비들은 비문이나 현판 글씨를 쓸 때면 꼭 탁본을 염두에 두었다. 후대에 길이 남는 역사성을 가지고 있어서 더욱 주의를 기울였고, 다른 어떤 글씨보다도 중요시했다. 전통 시대 중국에서 잘 뜬 탁본이 진본 못지 않게 비싸게 팔렸던 것도 이렇듯 탁본의 미학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현재 국내에서도 신라 시대 비석을 뜬 고탁(古拓) 같은 경우는 4백만∼5백만 원 나간다고 고미술 전문가들은 말한다.

탁본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중국에서 탁본은 원래 금속이나 돌에 쓰인 글씨를 판독하기 위해 시작된 것으로, 당(唐)대에 이미 보편화했다. 송(宋)대에 나온 <순화각첩>(옛 금석문 탁본을 모은 책)은 서예가들 사이에서 옛 글씨를 익히는 중요한 교본 구실을 했다. 청(淸)대의 고증학은 탁본을 연구하는 금석학의 가치를 높였다. 갑골이나 청동기에 새겨진 글과 그림도 탁본을 통해서 복원해냈다.
국내의 경우, 탁본에 관한 공식 기록은 조선 세종 때 전국 사사(寺祠)의 자료를 탁본하도록 했다는 것이 처음이다. 이후 조선 후기에 낭선군 이 우가 <대동금석서>라는 탁본첩을 펴냈고, 이계 홍양호나 추사 김정희 등에 의해 탁본 문화가 크게 꽃피었다.

추사는 젊었을 적 중국의 수도인 연경에 다녀왔다. 이때 옹방강이나 완 원 등 청대의 대표적인 학자들과 교류한 것이 이후 추사의 삶을 좌우했다. 고증학에 관심을 두고 탁본을 시작한 것도 이들과의 교류 덕분이었다. 추사는 31세 때(1816년) 북한산에 올라 당시까지 무학대사비로 알려져 있던 비석을 탁본한 뒤 이 비석이 신라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혀냈고, 7천자나 되는 방대한 고증학 논문 <진흥이비고>를 쓰기도 했다.

하지만 추사에게 탁본은 궁극적으로 예술을 위한 것이었다. 추사체는 흔히 예서·전서·해서·행서·초서의 각 서체가 한 작품 안에 자유자재로 섞이면서도 필획의 강력한 힘과 담백한 품격, 엄정한 질서가 유지되는 글씨로 통한다. 하지만 그 글자의 한 점 한 획도 추사가 마음대로 만든 것이 아니다. 추사는 고대 중국의 금석문을 뜬 고탁을 수집했고, 그를 통해 파세(波勢)가 없고 ‘방경고졸(方勁古拙)’한 자기만의 글씨체를 완성했다.

전시기획자이자 고미술 전문가인 김영복씨(문우서림 대표)는 “추사의 글씨는 누구의 평에 의지해서 볼 것이 아니라, 불교에서 말하는 무심한 마음으로 스스로 느끼면서 보아야 감동이 온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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