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법·수경스님의 탁발순례 대장정
  • 이문재 기자 (moon@sisapress.com)
  • 승인 2004.03.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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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법·수경 스님, ‘생명 평화’ 탁발 도보 순례…3~5년 동안 전국 돌아
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리기 직전이었다. 경내에는 봄 기운이 완연했다. 실상사 앞을 흐르는 엄천강도 물이 불어나 쿵쾅거렸다. 며칠 전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났다고 했다. 지리산은 북쪽 사면까지 눈을 모두 녹여낸 뒤였다. 아침 새소리들이 윤택했다. 지리산 일대가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실상사가 성큼 봄의 안쪽으로 한 발짝 내딛고 있었다.

지난 2월26일 오전, 두 스님은 비옷이며 신발 따위를 챙기고 있었다. 도법 스님과 수경 스님. ‘전생에 부부였을 것’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절친한 사이. 눈빛만으로도 흉중을 읽는 두 도반이 길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때가 된 것이다. 도법 스님이 깨달음도 접고, 부처도 내려놓고, 수행도 포기하고 붙잡았다는 화두-생명 평화. 그 생명 평화의 문을 찾아 기어코 그 문을 열기 위해 두 스님이 길을 나서는 것이다.

3월1일 오전, 두 스님은 지리산 노고단에서 생명 평화 탁발 도보 순례의 시작을 알리는 기도를 올린 다음, 길에 올랐다. 우선 지리산 일대 1천6백리를 40여 일 동안 걷는다. 4월 하순, 탁발 순례는 물을 건너 제주도 땅을 밟는다. 제주도를 구석구석 돌고 나면 다시 뭍으로 나와 전국을 주유하는데, 짧으면 3년, 길면 5년이 걸리는 대장정이다. 두 탁발승은 걷고 걷고 또 걸어서 전국의 면 단위 땅을 모두 밟을 예정이다.

탁발은 걸식이다. 걸식은 부처 이래 두타행의 한 중심을 이루어온 수행법이다. 부처는 탁발을 통해 수행의 가장 큰 적인 교만과 아집을 없애고, 걸식을 통해 얻은 음식을 중생에게 베풀라고 가르쳤다. 초기 불교는 걸식으로 먹을 것을 해결하고, 걸식할 때에는 가난한 집과 부잣집을 가리지 말며, 하루에 한 끼만 먹으라고 일렀다.

도법 스님은 출가 초기 토굴 생활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탁발을 해본 경험이 없다. 반면 수경 스님은 입산 직후부터 ‘원없이’ 탁발을 했다. 1960년대 후반, 당시 열아홉 살이던 수경 스님은 서산 간월암에서 노장 스님을 모시고 살았다. 간월암에는 노장 응담 스님과 제자 수경 단둘이었다. 하지만 노장 스님은 한 끼도 발우공양을 거르지 않을 정도로 엄격했다. 노장 스님은 식량이 있는데도 어린 제자에게 탁발을 시켰다.

수경 스님에게 탁발은 부끄러움과의 싸움이었다. “처음에는 얼굴이 뜨거워 견디기 힘들었다. 사지 멀쩡한 젊은 놈이 웬 거렁뱅이 짓이냐고 야단을 치는 사람, 기독교 믿는 집이라며 문을 닫아버리는 사람, 사주 관상 봐달라는 사람 등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었다.” 간월암에서 노장을 모시고 살던 3년간, 수경 스님은 서산·홍성·해미·당진·태안 등지를 돌며 탁발했다. 쌀 소두 열 말을 지고 뻘만 7~8km를 걸어야 하는 고행을 받아들이며 자기를 비울 수 있었다.

생명 평화를 위한 탁발 순례는 지난해 11월에 끝난 도법 스님의 1000일 기도의 연장이자, 지난해 3월 말부터 6월 초까지 수경 스님이 문규현 신부와 함께한 새만금 살리기 삼보일배의 연장이다. 도법 스님의 1000일 기도는 지리산으로 상징되는 현대사의 아픔을 치유하고, 나아가 21세기 생명 평화 운동의 전망을 모색하는 데 집중했지만, 명쾌한 결론이 나지 않았다. 기도 기간에 밖에서는 이라크에서 전쟁이 나고 한반도에는 전쟁 위기가 감돌았다. 생명과 생명 사이의 평화는 멀기만 했다.

수경 스님에게도 새만금 삼보일배 후유증이 있었다. 삼보일배는 단순히 새만금 간척공사를 반대하는 운동이 아니라, ‘욕심을 줄이고 자족하는’ 생태적 삶의 방식을 모색하는 참회와 각성의 기도였는데, 그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수경 스님은 “내 역량이 부족했다. 특히 전라북도 도민들에게 갈등의 소지를 제공했다는 것이 큰 부담이었다. 불교적 행위였다면, 대립을 해소하는 결과가 나왔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지난해 말, 1000일 기도와 삼보일배 후유증을 앓고 있던 두 스님은 “여기서 한 발짝 더 내딛자”라고 다짐했다. 수경 스님은 원효의 무애행을 현재화·대중화하자고 제안했다. 불교적 격식을 훌훌 털어버리고 대중이 알아들을 수 있는 대중의 언어를 들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자는 것이었다.

도법 스님도 같은 생각이었다. 스님은 지난해 말 한 신문에 발표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붙잡고 있던 모든 것을 비우고 버리는 길을 떠나볼까 싶다. 깨달음이라는 환상을 좇아온 그간의 삶을 포기할 작정이다. 훌륭한 수행자라는 허상을 좇아온 벅찬 꿈을 접기로 했다.’ 도법 스님의 글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농부도 상인도 사장도 실업자도 장관도 주정뱅이도 목사도 신부도 교무도 스님도 만날 것이다. 술집도 가정집도 관공서도 언론사도 교당도 교회도 절도 굿당도 찾아갈 것이다. 만나는 사람마다 탁발할 것이다. 밥도 빌고, 돈도 빌 것이다. 땅도 빌고, 마음도 빌 것이다.’두 스님은 ‘알리러 가는 길이 아니라 얻으러 가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생명이 안전하고 건강하며, 더불어 사는 삶이 평화로운 세계로 가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이 질문이 탁발 순례가 힘껏 붙잡고 있는 화두이다. 도법 스님은 생명 평화 탁발 순례의 기본적 전제는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라고 말한다. “행복과 불행의 주인은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다. 사회를 만들어가는 주체도 바로 자기 자신이다. 나라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것도 나 자신이다. 우리 모두가 저마다 부처라는 사실을 일깨우려고 한다.”

짧게는 3년, 길게는 5년 동안,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두 스님이 만나고자 하는 사람들은 ‘좋은 뜻을 가진 사람들’만은 아니다. 지역과 직업, 남과 여, 나이, 정치적 이념, 종교 등 모든 경계를 뛰어넘어 두 스님이 만나고자 하는 사람은 ‘생명 평화의 중요성을 공유하는 사람들’이다. 어제까지 도둑이었든, 좌익이었든 우익이었든, 돈 많은 사람이었든 가난한 사람이었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오늘부터 생명 평화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모여 대화를 나누는 마당, 그것이 탁발 순례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진보와 보수, 영남과 호남, 부자와 가난한 자, 남자와 여자가 대립하는 이른바 ‘남남 갈등’ 혹은 집단 이기주의를 풀어내는 계기를 마련하자는 것이다.

생명 평화의 길을 찾으려는 탁발 도보 순례는 겹겹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도법·수경 두 스님만이 길을 떠나는 것이 아니다. 천년 고찰 실상사가 21세기, 아니 새로운 천년을 내다보며 함께 길을 나서는 것이다. 이 땅에 선불교를 처음 들여온 실상사는 20세기 들어 겨우 명맥을 유지하다가 1980년대 후반 선우도량에 이어 화엄학림을 열며 수행과 연구 풍토를 쇄신했다. 동시에 실상사는 산문의 울타리를 헐어버렸다. 작은학교·생명문화교육원·지역생태농업센터·지역복지문화센터 등 ‘실상사 공동체’로 거듭나고 있다. 실상사는 불교는 물론 한국 사회와 지구촌의 미래를 위한 ‘모색과 전망의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두 스님은 ‘걸음걸음이 모두 사지(死地)’라는 경허 스님 말씀을 되새기겠다고 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죽음의 장소라면, 한 순간도 깨어 있지 않을 수 없다. 깨어 있다면 그 걸음은 죽음이 아니라 거듭남이자 살림의 걸음이다.

‘나’로 돌아가면서 동시에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길. 둘이 걷되 각자 걷고, 각자 걷되 생명 평화를 기원하는 모든 마음들과 함께 걷는 길. 탁발 도보 순례가 3월 초순, 지리산 남쪽, 구례군·용방면·구례읍·문척면·토지면으로 천천히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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