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현상]‘광란의 문명’ 낳는 자동차 신화
  • 李文宰 기자 ()
  • 승인 1997.10.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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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천만대 시대, 속도지상주의 ‘역기능’ 주목해야
“할머니, 육교를 이용하세요! 육교 바로 밑에서 무단 횡단하면 어떡하십니까!”지난 9월27일 오전 9시30분, 서울 노원구 상계1동 720번 좌석 버스 종점 앞 도로. 무거운 등짐을 진 할머니 두 분이 육교 바로 밑에서 무단 횡단을 하고 있었다. 마침 수락산 쪽에서 달려오던 교통 순찰차가 이를 발견했다. 왕복 4차선 도로에는 교통 순찰차 이외에 다른 차는 없었다.

또 다른 장면 하나. 9월 중순, 서울 한복판 광화문 네거리. 여행용 가방을 세워놓은 노신사가 세종문화회관 쪽에서 서대문 쪽으로 우회전하던 택시를 세웠다. 노신사는 운전기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짐이 무거워 지하도를 건너갈 수가 없어요. 서대문 쪽으로 돌아서 저 건너편에 내렸으면 하는데…” 택시 기사는 씩 웃으면서 그냥 출발했다.

두 삽화에서 할머니들의 준법 정신이나, 택시 운전 기사의 친절도를 떠올리는 이들은 자동차 신화, 달리 말하면 자동차 중심주의에 빠져 있다고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다. 위의 두 장면에서 키워드는 육교와 지하 보도이다. 등짐을 가득 진 노인들에게 육교는 험난한 산이고, 여행용 가방을 든 노인에게 광화문 지하도는 아득한 계곡이다. 그러나 경찰이나 택시 운전기사의 눈에는 도시에 무수하게 존재하는 험난한 산과 계곡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자동차중심주의의 반인간성을 드러내는 한 단면이다.

지난 여름 이후, 이 땅 위에는 천만대의 자동차가 달리고 있다. 이른바 자동차 천만대 시대. 1인당 국민소득 만달러 시대 진입과 겹쳐지면서, 세계에서 열다섯 번째라는 자동차 천만대 시대는 세계화의 한 자격증처럼 보였다. 그 반대켠에서 나오는 목소리래야 바람직한 자동차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캠페인 수준을 넘지 못했다. 오존주의보가 발령되면 자동차 운행을 자제하라는 당국의 경고는 거의 지켜지지 않았다. 추석 연휴에는 전국의 도로 상황이 시시각각 ‘생중계’되기도 했다. 자동차 천만대 시대는 자동차에 대한 신화를 강화하는 데서 그치고 있지, 갖가지 역기능을 직시하는 데까지는 이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육교와 지하보도는 보행자에 대한 폭력”

최근에 나온 생태 전문 격월간지 <녹색 평론> 9·10월호가 아니었다면 자동차 천만대 시대에 대한 반성과 비판은 가려졌을지도 모른다(이 격월간지는 92년 9·10월호, 94년 5·6월호에서도 자동차 시대 극복을 위한 국내외의 시각들을 실어 왔다). 임삼진씨(녹색교통운동 사무총장)와 박용남씨(대전의제21추진협의회 사무처장)는 각각 ‘자동차에 관한 미신들’과 ‘지금은 자동차를 길들일 때’라는 논문에서 자동차 중심주의가 고착시킨 갖가지 미신을 파헤치고, 환경 오염과 비인간화의 주범인 자동차 신화를 그대로 둘 경우 인류가 맞닥뜨릴 사태를 심각하게 경고했다.

자동차 신화의 성지는 미국과 독일이다. ‘달리는 궁전을 모든 집에 하나씩’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던 헨리 포드와, 자동차를 통해 민족 공동체를 구현하고자 했던 히틀러 이래, 각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자동차를 끊임없이 예찬했다. 박용남씨의 조사에 의하면, 스웨덴 총리 잉그바르 칼손은 ‘자동차 소유는 인권에 속한다’고 천명했고 89년 영국 교통장관 피터 보텀리는 ‘현재 개인 수송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여성, 소수 민족, 생활보호자 들이 장차 구입할 자동차를 위해 더 많은 도로가 건설되어야 한다’고 발표했다. 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은 ‘국민소득 천달러, 수출 백억달러’와 함께 ‘마이카 시대’를 약속하면서 유신 시대로 진입했었다.

자동차 신화는 정치 지도자나 자동차 생산·판매자들에게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자동차는 이미 인류에게 하나의 신화로 각인되어 있다. 심리학자들이 보기에 자동차는 자궁이자 남성중심주의의 상징이다. 운전자들은 자동차와 자신을 동일시하기까지 한다. 자동차에 대한 위협은 종종 운전자에게 자신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된다. 사회학자들의 눈에 자동차는 신분의 표현으로 보인다.

인간과 자연이 더불어 살아가는 새로운 사회를 희망하는 시각에서 보면 자동차는 괴물이고 암세포이다. 이들의 보고에 의하면, 20세기의 가장 대표적인 물신(物神) 가운데 하나인 자동차에 관한 신화는 거개가 미신이다. 과학 기술의 집약인 자동차를 덧씌우고 있는 신화가 미신이라는 사실은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임삼진씨는 <녹색 평론>에서 무엇보다 먼저 ‘빠른 것이 선(善)’이라는 속도지상주의를 뒤집으면서, 보행자와 자전거 운전자가 중심이 되는 느림의 미학을 강조한다.

육교와 지하 보도는 자동차의 속도지상주의가 낳은 대표적인 구조물이다. 육교와 지하 보도야말로 도시의 주인인 사람(보행자)에 대한 구조적 폭력이라는 임삼진씨는, 도로를 넓히면 더 안전하다는 주장도 근거 없는 미신이라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도로가 넓어지면, 일부 구간에서 속도가 높아지지만 동시에 죽거나 크게 다치는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도 커진다. 시속 30㎞ 제한 구역에서는 사망률이 15%이지만, 시속 50㎞ 구간에서는 50%로 증가한다는 것이다.
브라에스의 역설 “도로 넓어지면 체증 심해진다”

속도는 환경 오염과도 밀접한 관계이다. 소음은 물론이고 오염 물질들이 배출된다. 임씨는 92년 핀란드에서 나온 통계를 근거로 비행기가 철도에 비해 많게는 50배까지 오염 물질을 배출한다고 지적했다. 속도는 결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박용남씨가 논문에 인용한 <한국의 환경 통계 평가보고서>(1996)에 따르면, 94년 말 현재 우리나라 이산화탄소 총배출량에서 자동차로 대표되는 수송 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은 83.1%, 탄화수소는 96.8%, 아황산가스는 17.2%에 이른다. 박용남씨는 특히 이 가운데 협심증, 시력 장애, 신경 및 폐기관 질환을 유발하며 지구 온난화와 오존층 파괴 등 2차적 환경 오염을 일으키는 이산화탄소 배출 비율이 매우 높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밖에도 자동차는 벤졸·석면·납·카드뮴 등 치명적인 중금속을 상당량 방출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교통 체증을 도로 확장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도 대표적인 미신 가운데 하나이다. 교통학에서는 이미 입증된 학설로 ‘도로가 넓어지면 체증이 심해진다’는 브라에스의 역설이 있다. 도로 확장은 교통량 증가와 체증 심화라는 악순환을 거듭한다. 새로운 도로가 확장되면 새로운 방향으로 통행할 수 있고 접근성이 좋아짐에 따라 통행 빈도가 늘고,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직장을 구하며, 통행 시간 단축을 기대해 시민들이 대중 교통에서 승용차로 전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의 교통 정책은 이 미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자동차 시대에 대한 문명적 반성 필요

보행자 전용 공간이 늘면 경제가 죽고 교통 대란이 일어난다는 주장도 낭설이다. 선진국에서는 도심에 보행자 전용 공간을 설치해 오히려 상인들로부터 환영을 받고 있다. 선진국은 아니지만 브라질 남부에 있는 쿠리치바 시는 70년대 중반 도심을 관통하는 왕복 4차선, 4㎞에 이르는 거리를 보행자 천국으로 만들었는데, 한 달 후 투표를 한 결과 시민들로부터 압도적 지지(97%)를 얻었다.

이밖에도 미신 목록은 얼마든지 있다. 자동차 세금이 너무 많다는 것도 근거가 희박하다는 것이다. 자동차가 일으키는 환경 파괴와 교통 사고 등 사회적 비용을 고려한다면 현재 세금 수준은 대당 1년에 최소한 1억 원은 되어야 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고 임삼진씨는 지적했다. 자동차로 인한 대기 오염 문제는 기술로 해결할 수 있다든지, 큰 차가 안전하다, 자동차는 가정의 행복을 키운다, 자동차에 대한 통행 제약은 경제를 위축시킨다, 자동차에 의한 사망 사고는 과실 사고이다라는 믿음도 근거 없는 맹신이라는 것이다.

‘지금은 자동차를 길들일 때’에서 박용남씨는 자동차를 아편이라고 규정했다. 신속성·편의성·안락함으로 구성되는 자동차 환상으로부터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못박았다. 박씨는 환경적 교통 관리라는 새로운 안목으로 보행과 자전거를 위한 정책과 대중 교통을 연결하는 방안을 실천해 나가야 한다고 제안했다(위 상자 기사 참조).

자동차 시대의 역기능은 교통 사고와 대기 오염, 도로와 주차장을 넓히기 위한 자연 파괴 등 다양한 통계 수치를 통해 수시로 공표되고 있지만, 자동차 시대에 대한 반성으로는 옮아가지 않고 있다. 프랑스의 비영리 환경단체 연구원인 볼프강 주커만은‘현대 생활의 신비 가운데 하나는 우리 모두가 끊임없는 움직임, 즉 광란적인 분주함을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주커만은 학력과 신분에 관계 없이 자동차 시대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그 누구도 나서지 않는 까닭을 두 가지로 압축했다. 무지와 관성. 속도지상주의에 대한 무지와 자동차 시대에 대한 관성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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