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 사학자 이성시 교수가 말하는 `고구려의 진실`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4.04.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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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 사학자 이성시 교수/“고구려도 구한말에 재발견된 것”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촉발된 한·중 간의 고구려사 논쟁이 장기화하고 있다. 정부·학계와 시민단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태는 그다지 변하지 않은 듯하다. ‘고구려연구재단’ 설립 정도가 그나마 성과일까.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소장 임지현)의 창립 심포지엄에 참가하러 방한한 이성시 교수(52)는 고구려사 논쟁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학자다. 재일 한국인 2세인 그는 대학에서 한국 고대사를 전공했으며, 요코하마 국립대학을 거쳐 현재 와세다 대학 동양사학과 교수로 있다. 몇년 전 ‘우리가 보는 고대의 역사는 근대 국민 국가의 욕망이 만들어낸 표상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담은 그의 저서 <만들어진 고대>(삼인)가 국내에 소개되어 화제를 일으킨 바 있다.

이교수는 지난 4월23일 한양대에서 열린 심포지엄에서 <동북아시아 경계 영역의 역사 인식-배타적 점유로부터의 해방을 향하여>라는 주제 논문을 발표했다. 그에 따르면, 발해사만큼 근대적 시각으로 굴절된 역사도 드물다. 20세기 초 주변국 가운데 가장 먼저 발해를 주목했던 일본은 근대사를 고대 일본과 발해의 관계 속에 투영했고, 대륙 진출의 욕망을 북돋우는 기제로 발해 연구를 진행했다.

1945년 이후 발해 연구 대열에 합류한 한국·북한·중국·옛 소련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모두 발해사를 자국사의 범주에서 배타적으로 인식했고, 근대 일본이 그랬던 것처럼 현재의 정치적 과제가 주저없이 투영되었다. 그 결과 현재 각국의 발해사 연구는 거의 공유하기 어려운 ‘괴물’로 변해 버렸다.

이성시 교수가 고구려사 논쟁이 화두로 떠오른 자리에 발해사 연구 논문을 들고 나온 이유는 명확하다. 고구려사 또한 근대적 시각으로만 재단하려 하면 또 하나의 괴물로 변해버릴 수 있다는 경고를 전하기 위해서다. 그의 비판은 중국의 동북공정뿐 아니라 국내의 민족주의 사학에도 동시에 쏟아졌다.

인터뷰는 4월22일 오후, 한양대 임지현 교수 연구실을 빌려 진행했다. 그의 한국어 실력은 일상 생활을 하는 데 지장이 없을 정도. 그래서 인터뷰는 한국어로 묻고 일본어로 답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통역은 일본 근현대사 연구자인 박환무씨가 맡았다.
최근까지 국내 학계와 시민사회를 뜨겁게 달군 고구려사 논쟁을 어떻게 보는가?
고대사 연구는 고대를 누가, 언제, 어떤 의도에서 바라보았는가라는 인식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중국의 고구려사 해석에서 어떤 점이 문제인가라는 지적과는 별개로, 한국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고구려사의 인식은 타당한가라는 점도 생각해 봐야 한다.

무엇이 문제인가?
일본의 사례를 들어 설명하겠다. 쇼토쿠 태자(6세기 후반 아스카 문화를 중흥시킨 인물)를 모르는 일본인은 거의 없다. 하지만 현재의 쇼토쿠 태자 상은 구로이타 가쓰미라는 근대 사학자에 의해 ‘내셔널 히스토리’ 차원에서 다듬어진 것이다. 일본 고대사의 주요 사건들이 대부분 이렇게 메이지 유신 이후에 근대적 시각으로 새롭게 해석되었다. 여기서 핵심은 이들 역사가 국가의 요구에 의해, 근대 국민의 일체감을 형성시킬 목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이렇게 고대사를 볼 때는 그것의 콘텍스트까지 함께 살펴야 한다.

한국 고대사도 근대적 시각에서 만들어졌다는 뜻인가?
한국인들은 ‘고구려사는 우리 역사’라고 의심 없이 믿고 있다. 하지만 고려 왕실의 대신이었던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쓰기 전까지는 그런 인식이 없었다. 역사학자라면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쓰면서 왜 고구려는 자국사에 편입하고 발해와 가야는 버렸는지에 대해서까지, 다시 말해 이를 통해 드러난 고려 왕조의 역사 의식까지 살펴야 한다. 나아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고구려는 근대 역사학자들의 눈으로 재해석한 <삼국사기>에 의거하고 있다. 고구려는 구한말에 민족의 단결을 꾀하기 위한 기제로 재발견된 것이다.

각국이 서로 배타적인 주장을 펼치는 발해사와 달리, 고구려사에 대해서는 한국사라는 공통된 인식이 있었는데.
1980년대 초까지 중국 학계도 고구려사를 한국사의 영역으로 인정했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 이후 소수민족 문제와 홍콩 반환, 타이완 문제 등이 겹치면서 동북 지역의 역사 해석이 바뀌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것은, 중국은 근대 이전까지 동북 지역을 중국사의 일부로 인정한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동북 지역의 역사를 일관된 맥락에서 연구하고 기술하기 시작한 것은 근대 일본인들이었다. 일본의 대륙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서였다. 현재 한국과 중국의 사학자들은, 목적은 서로 다르지만 근대 일본인들의 역사 해석 방법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국내 학자들이 고구려사를 우리 역사로 보는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같은 민족이 세운 나라라는 점이다.
냉정하게 말하겠다. 단일 민족이라는 주장으로는 국제 학계에서 어떤 인정도 받을 수 없다. ‘민족(nation)’이라는 개념은 18~19세기 유럽에서 출현한 근대 국민국가의 산물이다. 그런 근대의 상으로 2000년 전의 과거를 투영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다. 고구려는 예족·맥족·말갈족 등 다양한 ‘에스노스(ethnos)’로 구성된 국가였다. 우리말로는 에스노스나 네이션이 모두 민족으로 번역되는 바람에 혼동이 생기는데, (역사학·인류학 등에서 고대의 민족 구분을 위해 쓰이는) 에스노스는 현재의 민족과는 전혀 다른 범주의 개념이다.

근대의 눈으로 고대를 해석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말인가?
현재의 관점으로 고대사를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현재의 눈으로 고대를 볼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런 과정을 자각하고 있느냐 없느냐 하는 점이다. 나는 민족을 키워드로 삼아서 자국 역사를 서술하는 것은 이제 한계에 왔다고 본다. 100~200 년간 지속된 근대 국민국가 체제는 현재 상당 부분 기능 부재 상태에 빠져 있다. 벌써 일국 차원을 뛰어넘는 더 큰 지역적 차원에서 역사를 연구하는 움직임이 생기고 있으며, 또 한 국가보다 더 작은 단위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국사 해체’를 주장하기도 했는데.
국사를 해체하자는 말은 자국 역사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내 말은, 왜 국가와 민족이라는 코드 속에 모든 사실과 사상이 환원되어 기술되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국사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그 과정을 해체해서 검토해 보자는 거다. 이것은 역사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자국 역사가 가지는 기능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유럽과 달리 한국에서는 민족주의가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점도 많지 않았나?
맞다. 언제나 이데올로기는 현실적인 역할이 있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식민지 해방과 근대 국민국가를 만드는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억압적인 측면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이전에 해방 측면에 중점을 두었다면 앞으로는 부정적인 측면이 점점 더 커질 것이다.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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