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자동 이발사>에 담긴 ‘유신의 추억’
  • 노순동 기자 (soon@sisapress.com)
  • 승인 2004.04.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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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화 형식에 박정희 시대의 삶 담은 영화 <효자동 이발사>
“애안 낳을랍니더.” “그런 거 없어. 사사오입이야.” “뭔 소린데예?” “사사오입! 즉 뱃속의 애가 다섯 달이 넘으면 애를 낳아야 된다는 얘기야. 법이 그래. 사사오입이면 헌법도 고치는데 그깟 애는 문제도 아니야.”

영화 <효자동 이발사>(연출 임찬상)는 사사오입 파동에서부터 3·15 부정 선거, 인혁당 사건과 유신 그리고 대머리 대통령이 등장했던 시기까지 무려 20년 세월을 다룬다. 태반이 박정희 대통령 시절이어서 영화는 자연스레 ‘유신의 추억’을 더듬는다. 영화는 제작진이 강조한 대로, 그 시절을 살아낸 보통 사람 성한모(송강호)가 주인공이다. 하지만 그를 통해 드러나는 그 시절의 공기는 더없이 진하다.

개봉을 앞두고 배우들은 입 조심을 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이번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을 공개 지지했던 문소리씨는 시사회를 앞두고 화보를 촬영하러 해외로 나가 사실상 인터뷰를 거의 하지 않았다. 그녀는 “나온 분량이 얼마 되지 않는다”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캐스팅된 후 “좀 쉬려 했는데 시나리오가 너무 놀라워 또 출연을 약속해버렸다”라고 말했던 송강호씨도 배우가 “그런 문제에 입장을 말하는 게 좀 그렇다”라며 삼가는 태도를 보였다.

그보다 더 의뭉스러운 것은 감독의 태도다. 임찬상 감독은 지난 4월26일 첫 공개 시사회 때도 ‘그저 그 시절을 살았던 보통 사람들의 따뜻한 이야기’라며 시치미를 뗐다.

영화를 기획한 영화사 대표만이 설레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청어람 최용배 대표는 “1960~1970년대 우리의 삶을 재미나고도 따스하게 그렸다. 그러면서도 자욱했던 그 시절의 공기가 그대로 전해질 것이다”라며 자신감을 감추지 않았다.

영화는 ‘놀라운 시나리오, 듬직한 배우’라는 입소문에 걸맞게 예매율 1위를 달리고 있다. 소재가 소재인 만큼 정치권의 관심도 남다르다. 홍보를 맡고 있는 명필름 박소영씨는 “주위에서 관심이 높아 특별 시사회를 마련했고, 그 김에 각 당에도 통보해 놓았다. 열린우리당과 민노당에서는 당 대표를 비롯해 관심을 보인 의원이 여럿이다”라고 귀띔했다. 다만 ‘박통 시절’이 어떻게 그려졌는지 가장 궁금해할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측은 아직 응답이 없다고 한다.

그동안 홍보팀은 내내 ‘시대에 대한 판단보다 보통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라고만 말해왔는데 막상 뚜껑이 열리고 보니 이런 ‘경향 문학’이 없다. 전면에 드러내지 않았을 뿐, 그 시대에 대한 판단이 너무나 또렷한 것이다. ‘그 시절의 공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던 말도 무슨 말인지 분명해진다. 한 남자의 삶이 아니라, 그 시대가 그 삶에 어떤 그림자를 드리웠는지 집요하게 탐색하고 있기 때문이다.
효자동에서 효자이발관을 하고 있는 성한모는 소박하기 그지없는 인물이다. 3·15 선거 때도, 나랏님 말씀이 옳은 법이라는 주변 지인의 말에 따라 뭐든 하자는 대로 한다. 개표 중에 표 빼돌리기, 상대측 표 땅에 파묻기도 모두 친구 따라 강남 간 격이다. 4·19가 터지던 날, 공교롭게 그의 첫 아이 ‘낙안’이 태어난다. 무엇이건 통제했던 박통 정권은 고맙게도 단발령을 내려 이발사인 성한모의 금고를 가득 채워준다. 대통령이 사는 마을의 이발사였던 그는, 급기야 대통령의 이발사가 된다. 승승장구하는 세월이 계속된다.

그러던 어느 날 절망적인 일을 겪게 된다. 사랑하는 아들이 당시 유행하던 마루구스병에 걸렸다는 의심을 받은 것이다. 남침한 공비의 설사병에서 유래한다는 이 마루구스병은 공비와 접촉했다는 빼도 박도 못할 증거가 된다. 마루구스병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소리 내어 발음해보면 금방 드러난다. 그렇게 북한과 접촉했다는 혐의를 받은 인물들은, 보안법 위반 혐의로 확정 판결을 받은 지 사흘 만에 사형당한다. 인혁당 사건은 그렇게 등장한다. 이윽고 유신 시대가 열리고, 부하의 총에 박통이 숨지던 10·26까지 영화는 숨가쁘게 달려간다.

영화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첫머리에 ‘실제 사실과는 상관이 없다’는 자막을 깔고 시작한다. 실제 영화 어디에도 3·15 부정 선거니 유신이니 하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20년 동안 현대사를 구성했던 사건은 때로는 직설적으로, 때로는 설사병인 마루구스병처럼 우화의 힘을 빌려 모두 얼굴을 내민다.

영화는 송강호씨가 인터뷰할 때마다 ‘아버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한 이유를 알게 해준다. 그 시절 내내 겁먹고 굽신거리며 살아야 했던 보통 사람들의 처지를 잔인할 정도로 섬세하게 잡아낸다. 가족과 함께 청와대에 초청된 자리에서 아들 낙안이 감히 영식과 다툴 때, 성한모는 겁에 질려 제 자식을 개 패듯 후려친다. 영식이 뻔히 거짓말을 하는 것을 알면서도, 제 아들이 옳은 것을 알면서도 힘 없는 아비는 그렇게 세상의 질서를 일러준다. 아들이 물똥을 쌀 때도, 성한모는 제 아들 손을 끌고 직접 파출소로 간다.

영화의 또 다른 미덕은, 강퍅한 리얼리즘이 아니라 따뜻한 우화의 길을 택해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는 점이다. 우화의 너른 품 속에서는 과장도 희화화도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효자동 이발사>는 배급사 청어람이 처음 제작하는 영화다. 청어람은 그동안 <동승> <바람난 가족> <여섯 개의 시선> <고독이 몸부림칠 때> 등 주류 배급선을 타기 어려운 영화를 배포하는 데 앞장서 왔다. 하지만 첫 제작 영화만큼은 대형 웰메이드 작품으로 승부수를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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