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古典으로 가는 ‘막힌 길’ 열기
  • 成宇濟 기자 ()
  • 승인 1995.07.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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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성 민족문화추진회장, 국역 작업·실학 연구 집대성한 책 3권 동시 출간
민족문화추진회 李佑成 회장(70·성균관대 명예교수)이 최근 저·편서 세 권을 한꺼번에 펴냈다. 한국 중세 사회와 실학을 전공한 역사학자로서, 또 대학 강단에서 한문학을 강의한 한문학자로서 수십 년간 축적해 온 연구 성과들을 담아 낸 것이다. 최근에 나온 <실시학사산고>(창작과비평사), <한국고전의 발견>(한길사), <신라사산비명>(교역·아세아문화사)은 일반 독자들로 하여금 이회장의 연구 과정과 그 결과를 직접 접할 수 있게 한다는 데서 큰 의미를 지닌다. 저서보다는 논문에 더 주력해 온 이회장의 평생 연구의 일부분이 이 저서들을 통해 집대성된 것이다.

한편 70년대 중반부터 해외에 흩어진 우리 고전들을 모아 영인한 <서벽외사해외수일본총서(栖碧外史海外蒐佚本叢書)>(아세아문화사)가 최근 <치평요람>을 끝으로 총 83종 76책으로 마무리됨으로써 이회장은 또 하나의 거대한 작업에 마침표를 찍었다.

성균관대 교수 재직 시절 이회장은 역사·한문학 논문과 고전에 대한 해제를 수없이 발표했지만, 저·편서는 <한국의 역사인식> <한국의 역사상> 등 몇 권에 불과했다. 고려 시대 사회사와 실학 연구 부문 개척자의 한 사람으로서, 동양적 문(文)·사(史)·철(哲)의 세계가 하나로 융합·조화되는 학문 세계로 그가 관련 학계에 미친 영향을 감안한다면 지극히 적은 분량이었다. “나를 성균관대로 불러준 조윤제 선생이 ‘논문부터 쓰라’며 책 내는 것을 싫어하셔서 그렇게 되었다”고 이회장은 말했다.

“전통 문화를 정당히 계승해야 한다는 것은 역사적 당위에 속한 명제로서 지금 아무도 부정하지 못한다. 그러나 당위가 필연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라고 말하는 이회장은, 우리 고전이 소외되어 온 까닭을 이렇게 지적한다. “전통 문화 가운데서도 조형 예술 유물이나 서민층의 민속놀이와 같은 감각적 오락물들은 쉽게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는 데 반하여 조상들의 심오한 철학적 사색과 격조 높은 시문학의 정서가 담긴 고전들은 일반적으로 먼 거리에 던져둔 채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않는다.”
“고전적 교양 더 절실한 시대”

그는 우리 조상의 고상하고도 진지한 정신이 담긴 고전을 일반 사람들이 가까이 하지 않는 이유로 두 가지를 꼽는다. 먼저, 우리 고전이 대부분 한자 한문으로 기록되어 일반 사람이 읽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고, 다음은 처음부터 흥미를 느끼지 않고 또 무슨 내용이 들어 있는지 몰라 굳이 펼쳐 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중에 두 번째 것이 더 문제이다. 한자 한문은 현재 번역 사업이 다방면으로 진행되고 있어서 언젠가는 모두 우리글로 바뀔 것이므로 해결할 수 있지만 처음부터 흥미를 느끼지 않거나 어떤 내용이 들어 있는지 몰라서 펼쳐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도리가 없을 것이다”라고 이회장은 말했다.

지난해부터 이회장이 이끌어온 재단법인 민족문화추진회(민추)는 올해로 창립 30주년을 맞았다. 그동안 민추는 고전을 국역하는 사업에 전력 투구해 해마다 50여 책을 편찬해 왔고, 올해에는 국역 목표량을 60여 책으로 늘렸다. 그러나 이회장에 따르면, 민추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고전 국역이 그 중요성을 고려할 때 제대로 수행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선 국역 작업에 필요한 인력이 크게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민추는 3년 과정의 한문 특강을 통해 국역자를 양성하고 그 인력을 중심으로 국역 작업을 하고 있으나, 그 수가 10여 명에 불과하다.

우리 고전의 국역은 10%도 채 되어 있지 않다. 이회장은 산적한 고전을 완벽한 우리글로 바꾸려면 앞으로 백년 이상이 걸린다고 본다. 그러나 일반 국민이 고전을 쉽게 읽고 소화하게 하기 위해서는 국역 사업만으로 끝나면 안된다. 이회장이 늘 안고 있는 고민거리는 일반 사람들로 하여금 국역한 고전을 어떻게 읽게 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는 “어린이를 위한 책을 만드는 등 80년대부터 온갖 시도를 다 해왔으나, 빠듯한 정부 지원금과 인력난으로 국역만 하기에도 힘에 부친다”고 토로했다.

이회장은 특히 이 시대에 국민들이 고전을 정신적 재산으로 공유해야 하는 까닭을 이렇게 설명했다. “젊은이들에게는 실례되는 말인지 모르겠으나, 지금은 온 세상에 오직 타산적인 실리주의와 현란한 시청각 문화 속에 경조부박한 사고와 행동이 날로 확산되어 사회의 위기를 양성하고 있다. 게다가 ‘세기말 병’을 앓고 있는 지구촌의 여러 인간군 속에 우리 민족은 독특한 증상을 노정하고 있다. 중세와 현대의 의식 혼류 속에 제대로 방향을 정립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때이므로 우리에게 근대적 예지와 고전적 교양이 한층 더 요구되는 것이다.”

‘세계화’ 외침이 날로 커지는 지금 고전의 중요성도 그만큼 강조되어야 한다고 이회장은 지적했다. 세계화가 자칫 잘못하여 뿌리 없는 문화로서 남을 따라 춤추는 격이 되어 나중에 우리에게 남는 것이 아무 것도 없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것이다.

이회장에 따르면, 옛 책이라고 해서 다 고전이 아니다. 역사를 통해 여과된 고전만이 고전이다. 고전이라고 하여 모든 것이 누구에게나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읽는 사람의 가슴에 와닿을 때에 비로소 고전의 값을 하는 것이다. 수십 편의 해제를 담은 <한국고전의 발견>이 고전을 가까이하지 않는 일반인에게 고전에 어떤 내용이 들어 있는가를 알리고 흥미를 느끼게 하는 것이라면, <실시학사산고>는 이회장의 지향점이 어디에 있는가를 드러내는 책이다.

실학자 최한기 연구가 남은 목표

20년 전 <남북국시대와 최치원>이라는 논문을 통해 신라와 발해가 병립했던 시대를 ‘남북국시대’라 불러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 이회장은, 이념이 명분화하고 명분이 실리에 앞서는 지금 상황에서 가장 요구되는 것이 실사구시 정신이라고 본다. “실사구시란 현실을 바로 보고 오늘 지금 이곳에서 어느 것이 올바른 방향인가를 따져 보는 것이다. 남북한이 이념만 강조하다 보니 실리에서 멀어지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라고 이회장은 말했다. 90년 정년 퇴임한 후 서울 대치동에 마련한 연구소의 이름을 ‘실시(실사구시)학사’라 붙인 까닭은 ‘지금’ ‘이곳’에서 실사구시 정신이 그 어느 때보다 더 중요하게 요청되기 때문이다.

지난 수십 년간 ‘제도사’ ‘실학·실학자 ’ ‘한국사의 발전 과정에서 지식인의 사는 방식에 관한 연구’ ‘외압에 저항하는 민족적 긍지에 대한 연구’ ‘남북 분단의 극복을 지향하는 연구’ 등 고대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정치·사회·문화에 걸쳐 방대한 연구를 해온 이회장은 민추에서의 고전 국역 사업과 더불어 필생의 연구 과제를 설정해두고 있다. 그가 70년대부터 연구해온 19세기를 대표하는 학자 惠岡 崔漢綺에 대한 연구를 완성하는 작업이 그것이다.

실학사상을 계승하고 서양의 과학 지식을 흡수하여 개국 통상을 주장하면서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의 가교자’였던 대학자 최한기에 대한 연구는 학계에서 이회장에게 짐지운 것이기도 하다. “앞으로 10년 동안 전념하면 최한기의 사상적 성격이나 범위를 종합적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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