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되살아난 ‘조선의 레닌’ 박헌영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4.07.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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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 전집> 완간…‘숨은 자료’ 폭넓게 찾아내 객관적 재평가 가능해져
남북 모두에서 버림받은 비운의 혁명가. ‘조선의 레닌’으로 불리며 일제하 국내 사회주의 운동을 이끌었던 사상가. 박헌영(1900~1956)을 수식하는 말들은 많지만, 정작 그의 일대기와 저작물이 체계적으로 정리된 적은 없었다. 일제하 대부분을 비밀 활동과 세 차례 투옥 등으로 보내느라 공식적인 저작을 많이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남북 양쪽에서 재평가조차 터부시되는 불온 인물로 낙인 찍혀 있었던 탓이 크다.

이번에 서울에서 <이정(而丁) 박헌영 전집> (전 9권, 역사비평사)이 출간되면서, 그는 사망 48년 만에 재평가 기회를 맞았다. 박헌영의 아들 원경 스님과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장, 임경석 교수(성균관대·한국사), 역사학자 윤해동씨(서울대 강사)가 중심이 되어 흩어진 자료를 찾아 나선 지 11년 만이다. 전집은 전체 아홉 권, 총 6천 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

전집에 실린 박헌영의 저술은, 일본 검·경에 체포되었을 때의 심문 답변서를 포함해 세 권 분량이다. 4~7권은 박헌영 관련 자료, 8권은 가족과 주변 인물의 증언, 9권은 연보와 사진을 실었다. 일제시대 박헌영의 저작물은 주로 옛 소련이 해체되면서 공개된 ‘코민테른(제3 국제공산당) 자료’와 일본 검·경의 심문 자료를 검색해서 찾아냈다. 북한에서 활동하던 시기의 자료는 미국 정부기록보존소에 소장되어 있는 <노획문서>(한국전쟁 중 미군이 북한에서 입수한 자료) 중 비밀 해제된 자료를 뒤져서 얻었다. 또한 박헌영의 딸 박 비비안나 여사와 박병률씨 등 북한에서 고위 관료를 지낸 인사들도 자료를 내놓았다.

전집에는 박헌영 연구뿐 아니라 국내 사회주의운동사 연구에도 의미 있는 자료가 다량 수록되어 있다. 우선 박헌영이 모스크바의 국제레닌학교에 다니던 1930년 10월부터 1931년 3월 사이에 작성한 <학습노트>가 최초로 발굴되었다. 당시 그는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가 1928년 광인 행세를 하며 가석방된 뒤, 두만강을 넘어 러시아로 탈출했고, 모스크바로 건너가 이 학교에 입학했다.

이 노트에는 박헌영이 당시 강의를 들으며 기록해놓은 상당히 수준 높은 코멘트가 많이 들어 있어서, 1930년대 국내 공산주의자들의 철학과 마르크스-레닌주의 이해 수준을 엿볼 수 있다. 국제레닌학교는 3년 과정의 당 간부 교육기관으로서 수준 높은 이론 교육을 담당하던 곳이었다. 박헌영은 당시 영문반에 속해 있었고, 노트도 영어로 되어 있다. 이 학교를 졸업한 조선인은 모두 6명. 박헌영은 베트남에서 유학 온 호치민과 함께 공부했다.

광복 직후인 1945년 8월20일 박헌영이 발표했던 <8월 테제> 원본도 이번에 처음 공개되었다. <8월 테제>는 해방 정국에서 취할 전략과 전술을 적시한 조선공산당의 공식 문건이다. 지금까지 1945년 9월20일 조선공산당 명의로 발표된 ‘수정본’만이 전해왔기 때문에 작성자가 누구인지를 놓고 논란이 있어왔다. 하지만 코민테른 자료에서 박헌영의 이름이 명기된 원본이 발견됨으로써 저자 논란에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세계와 조선> <동학농민난과 그 교훈> 등 박헌영의 저서 두 권도 전집에 실려 있다. <세계와 조선>의 저자는 ‘박건일’로 되어 있는데, 검색 과정에서 박건일은 박헌영이 광복 직후에 썼던 가명임이 확인되었다. 이밖에도 박헌영은 일제하에서 이 정·이 춘이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이 두 책을 통해 광복 직후 박헌영의 국제관과 역사관을 엿볼 수 있다.

박헌영이 1920년 문학 동인지 <문우>에 번역해 실은, 미국 시인 로웰의 시 한 편과 휘트먼의 시 두 편 등 영시 세 편도 최초로 공개되었다. 1919년 3월 경성고보를 졸업한 뒤 1920년 9월 상하이로 망명하기 전까지 ‘문학 청년’ 박헌영의 행적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그는 영시를 번역할 수 있을 정도로 영어 실력이 능숙했을 뿐 아니라, 러시아어·일본어와 한문 실력도 뛰어났다.

전집 편집위원들은 자료 수집 과정에서 부수적 성과도 얻었다. 일제시대 작가 심 훈의 소설 <동방의 애인>이 박헌영과 그의 첫 번째 부인 주세죽을 모델로 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 <동방의 애인>은 중국 상하이에서 조선 혁명을 위해 활동하던 청춘 남녀들의 사랑을 그린 소설이다. 심 훈과 박헌영은 경성고보 동창이며, 같은 시기에 중국에 있었다. 심 훈은 1927년 박헌영이 일경에 체포되자 <박군의 얼굴>이라는 수필에서 애석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또한 대중 가요 <눈물 젖은 두만강>에 나오는 ‘그리운 내 님’도 박헌영을 가리켰던 것으로 밝혀졌다.
박헌영 평가에서 가장 민감하고 다루기 어려운 주제는 역시 ‘박헌영 미국 간첩설’이다. 전집 편집위원들은 이에 대해 박헌영 간첩사건을 언급한 조선노동당 중앙위의 공식 문건(<결정집>) 등 간첩이라고 주장하는 문건뿐 아니라, 간첩이 아니라는 증언까지 8권에 모두 실은 뒤 독자의 판단에 맡겼다. 사회주의 운동사를 연구하는 임경석 교수는 “기소장 외에 간첩이었다는 객관적 증거는 찾지 못했다. 공산주의 국가에서 정적을 숙청할 때는, 그의 영향력을 단절시키기 위해서라도 대부분 간첩 혐의를 적용하곤 했다. 아무튼 비밀 해제가 아직 안된 기록도 있기 때문에 뭐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라고 말했다.

박헌영은 북한 당국에 의해 간첩 혐의를 받고 처형되었다. 1956년 7월19일, 소련과 동유럽을 순방 중이던 김일성은 평양에서 연안파가 자신을 공개 비판(이른바 ‘8월 종파 사건’)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했다. 그리고 평양 공항에 내리자마자 박헌영에 대한 사형 집행을 지시했다. 남로당 출신과 연안파의 연대를 경계했기 때문. 사형 선고 후 8개월 동안 내무성 지하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박헌영은 이날 평양 근교 산으로 끌려가 총살당했다.

북한에서 박헌영은 여전히 미국의 간첩으로 취급되고 있다. 항일 투쟁 경력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자였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남한에서도 왜곡된 시선으로만 조명되어 왔다. 서중석 교수(성균관대·한국사)는 “박헌영을 객관적으로 조명할 수 있는 1차 자료가 마련되었으니만큼 앞으로는 합리적이고 다양한 연구가 나올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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