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의 감옥을 깨뜨려라”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2002.08.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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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 평론가 9인, ‘주례사 비평’ 맹공…문학 권력·출판 상업주의 등 본격 거론
옥(獄)이라는 한자는 생김새가 독특하다. 두 마리 개가 양옆에서 옴쭉달싹 못하도록 말[言]을 지키고 있는 형국이다.
최근 문단에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다. 한국 문학이 ‘비평의 감옥’에 갇혀 있다고, 그 감옥을 한시바삐 벗어나야 한다고 짖어대는 이들이 8월 초 <주례사 비평을 넘어서>(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라는 단행본을 세상에 내놓았다. 고명철 권성우 김명인 김진석 신철하 이명원 진중권 하상일 홍기돈. 명단에서 알 수 있듯 이 책에 필자로 참여한 9명은 지난 몇 년간 문단을 들썩거리게 만들었던 이른바 문학 권력 논쟁에 직·간접으로 참여했던 평론가들이다(공교롭게도 이 중 1958년 출생자가 3명, 1970년 출생자가 4명이다. 1963년생 2명을 제외하면 9명 중 무려 7명이 개띠인 셈이다).





논쟁이 진행되는 동안 이들이 가장 많이 받은 비판이 바로 ‘텍스트를 갖고 말하라’는 것이었다. 문학 권력 논쟁 자체를 ‘가짜 소동’이라고 폄하하는 측에서는, 문학 권력을 공격하는 이들 세력이 텍스트에 기반을 둔 비평이 아니라 이미지에 기반을 둔 비난으로 유력 문예지와 작가를 ‘마녀 사냥’하듯 몰아가고 있다고 비판해 왔다.


<주례사 비평을 넘어서>는 이런 비판들에 맞서 나온 ‘문학적 출사표’라 할 수 있다. 언론학자 강준만 교수(전북대)가 ‘선도 투쟁’을 벌였던 문학 권력 논쟁 때와 달리 이번에는 문단 내부의 평론가들이 전면에 나섰다는 점에서 이 책은 새로운 파란을 예고한다.


평론가 9인(애초에는 11인)이 의기 투합한 것은 지난 1월. 그러나 4월로 예정했던 출간 시점은 늦춰지고 또 늦춰졌다. 시인 김정란씨(상지대 교수)와 노혜경씨(부산외국어대 겸임교수)가 개인 사정으로 필진에서 빠지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기 때문이다. 필자들의 심적 부담감도 컸다. 원고 초안을 갖고 이루어진 합평회에서는“눈앞이 캄캄해질 만큼 혹독한 비판이 오갔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주례사 비평’인가? 주례사 비평은 말 그대로 결혼식 주례사처럼 작가·작품에 대해 덕담만을 늘어놓은 비평을 말한다. 이는 비평의 태생적 한계에서 말미암은 측면이 있다. 작가를 위한 잔칫상에 평론가가 재를 뿌리기는 어렵다. 미국 작가 오스틴 오말리의 말마따나 서평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출판사가 개최한 공연의 호객꾼들인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의 문제는 이같은 주례사 비평이 전면화·주류화하고 있는 것이라고 김명인씨(<황해문화> 주간)는 주장한다. 어쩔 수 없다고는 해도 주례사 비평은 비평 양식 중 비주류에 머물러야 한다. 비평의 본령은 누가 뭐라고 해도 ‘비판 있는 비평’이다. 그런데 1990년대 이후 본말이 전도되기 시작했다는 것이 <주례사 비평…>의 주장이다.


광고 카피 방불케 하는 추천사 수두룩


일방적인 상찬이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책 날개나 뒷표지(흔히 ‘표4’라고 불린다)에 실린 추천사이다. 작품집 뒤에 딸린 해설 또한 주례사 경향이 강하다. 지난 10년간 문단을 먹여 살렸다고도 할 수 있는 젊은 여성 작가들 곧 신경숙·은희경·전경린 씨 작품에는 이런 비평이 붙어 있다. ‘신경숙과 그의 소설들은 볼수록 하나가 된다.’ ‘(은희경은) 특유의 문체에 기초한 안정된 서사력으로 일각의 문학적 진실을 길어올린다.’ ‘(전경린은) 1990년대 소설이 낳은 가장 몽환적인 작가의 한 사람이다.’


<주례사 비평>은 비판을 결여한 이들 비평이 덕담 수준을 넘어 광고 카피 내지는 상품시(詩), 심지어는 ‘경전 주해’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맹공한다(72쪽 상자 기사 참조). 텍스트에 어떤 약점도 없다는 듯 작품 자체를 ‘무류(無謬)의 반열’에 올려놓고 여기에 해석을 다는 식으로, 평론가들이 작가의 들러리를 서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텍스트를 과잉 해석하거나 평문에 과도한 수사를 남발하는 방식으로 특정 작가나 작품을 띄운다. ‘(그녀의 언어들은) 시간의 동공 속으로 모래알처럼 바스러져 흘러내린다.’이런 장식적 수사는 작품에 대한 명료한 이해를 방해할 뿐더러 심하게는 비평 대상을 객관화하는 데 실패한 흔적을 드러낼 뿐이라는 것이 김명인씨의 지적이다.


물론 진심에서 우러난 호의적인 비평과 주례사 비평을 딱 잘라 구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정 작품에 대해 비평을 쓴다는 것 자체가 그 작품에 대한 호감을 전제하는 것 아니냐”라고 되묻는 문학평론가 이광호씨(서울예술대 교수)는, 마음에 들지 않는 작품에 대해서는 해설을 거절하는 것이 비평의 원칙이라고 말한다.


문제는 지연·학연·문연(文緣) 따위로 얽히고 설킨 문단 사회에서 이것이 쉽지만은 않다는 사실이다. 베스트셀러 작가로 유명한 ㅊ교수는 추천사 한 편(2백자 원고지 1장 안팎)당 100만 원이 넘는 비싼 원고료를 요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돈도 돈이지만 밀려드는 청탁을 쉽게 거절하기 위해서이다. 이번 책에서 주례사 비평을 한 당사자로 지목된 ㅇ씨는 작품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평소 절친했던 작가가 부탁을 해 오는 바람에 비평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고 고충을 토로한다.


문단의 온정주의뿐 아니라 시대 변화도 주례사 비평을 부추긴다. 리얼리즘이네 모더니즘이네 정치적 입장에 따라 격렬한 논쟁이 오갔던 1970∼1980년대와 달리 1990년대의 평단은 논쟁의 무풍지대에 놓여 있었다.


그렇지만 <주례사 비평>은 이런 비평을 만연하게 만든 궁극적인 원인을 문학 출판의 상업화에서 찾는다. 1990년대 들어 문단이 상업주의에 포섭되면서 거대 출판 자본이 출현하고, 이를 중심으로 스타 시스템(혹은 베스트셀러 시스템)이 정착되어 가는 과정에서 비평 또한 출판 자본에 예속되는 운명에 처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독자들이 문예지보다 신문 기사나 광고에 의존해 책을 고르게 된 흐름에서 평론가들이 보도 자료나 광고 문안 작성에 쓰일 말랑말랑한 비평을 양산하게 된 것은 어찌 보면 필연이었다.


그럼에도 9인의 평론가는 시대의 이름으로 이를 옹호하지는 않는다. 이들에 따르면, 평론가들이 주례사 비평을 남발한 것은 문학 권력이라는 반대급부를 얻기 위한 ‘자발적 부역’일 수도 있다. 김명인씨는 유력 평론가들이 자기가 속한 유파(에콜)가 키우는 작가의 작품, 또는 그 유파가 베스트셀러로 키우고 싶어하는 작품에 최상급 헌사를 바치는 대신 그 대가로 여러 상징 권력을 보장받아 왔다고 비판한다. <주례사 비평>은 이런 측면에서 문학 권력 논쟁의 문제의식을 계승하고 있다.


이에 대해 주류 평단은 아직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한 유력 문예지의 편집위원은 “책이 나온 지 얼마 안된 만큼 내용을 일단 검토한 뒤 대응 여부를 결정하겠다”라고 말했다. 단 박현욱씨의 소설 <동정 없는 세상>(문학동네)에 대해 ‘스스로 책임지지 못할 차원의 띄우기를 시도’했다고 비판받은 문학평론가 김형중씨는 책을 읽지 않은 것을 전제로 이들의 문제 제기 방식에 유감을 표시했다. 자신이 그간 발표한 본격 비평은 일절 배제한 채 자기네 논지 전개에 유리한 인터뷰 기사를 하나 골라, 이를 근거로 자신을 공격하는 방식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김씨에 따르면 문제가 된 인터뷰 기사는 박현욱씨의 문학동네 신인상 수상이 확정된 뒤 출판사측 청탁을 받아 작성한 것이다).


성찰적 논쟁 통해 ‘비평의 위기’ 벗어나야


텍스트를 자의적으로 선택한 혐의는 황종연씨나 정과리씨를 공격한 글에서도 일부 발견된다. 그렇지만 특정 평론가 개인을 비판하기보다 잘못된 비평의 해악을 들추려는 책의 집필 목적에 따라 ‘주례사 비평의 전형’을 찾다 보니 제한된 텍스트를 선택하게 되었다는 것이 편집진의 주장이다.
주례사 비평은 작가를 죽이고, 독자를 죽이고, 나아가 문학을 죽인다. 평론가가 ‘비판적 버텨 읽기’를 포기하는 순간 상찬에 우쭐해진 작가는 상투성의 함정에 빠져든다. 질이 떨어진 문학은 독자가 외면할 수밖에 없다. 문단 내부에서 이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비평의 위기’는 1990년대 후반부터 되풀이되어 온 단골 레퍼토리이다.


그런데도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언어를 지켜 온 개들이 외부를 향해 짖기 시작한 것은 이 때문이다. 권성우씨는 말한다. “(성찰적 논쟁의 과정이 없다면) 비평가들은 앞으로 우울한 ‘비평의 감옥’을 서성이게 될지 모른다. 그 감옥에 아무리 화려한 언어의 성찬이 존재하더라도, 그곳이 감옥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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