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는가, 푸른 옷의 청춘을…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2002.10.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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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사진 작가 이규철 개인전 ‘군인, 841의 휴가’/냉정한 렌즈로 병영 생활 포착
입대 1989년 1월26일. 제대 1991년 5월16일. 군대를 다녀온 여느 대한민국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이규철씨(36·다큐사진연구원 대표)는 이 두 개의 날짜를 또렷이 기억한다. 제대한 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람이 오래된 과거사를 기억하는 이유는 두 가지일 것이다. 잊고 싶지 않아서거나, 잊을 수 없어서거나. 아마도 후자에 속할 것으로 짐작되는 기억의 시간들을 이씨가 최근 복원해 냈다. 이씨는 오는 11월 8∼14일 서울 충무로 ‘스페이스 사진’에서 자신의 병영 생활을 담은 사진들을 가지고 생애 최초의 개인전(02-2269-2613)을 연다.



‘군대 사진이라면 뻔하지, 뭐’라고 지레 속단할 사람들에게 이씨의 작품은 충격으로 다가온다. 개개인의 머리 속에는 생생하게 남아 있을지 몰라도 시각적으로는 결코 반추할 수 없었던 기억들을, 이씨의 카메라 렌즈는 징그러울 만큼 냉정한 관찰력으로 되살려낸다.


내무반에 갓 도착해 바짝 긴장해 있는 신병의 부동 자세며, 그 신병에게 ‘원산 폭격’을 시키면서 손톱을 깎는 고참의 무료한 듯한 표정이며, 철조망 앞에 쭈그리고 앉아 고향에서 온 편지를 읽는 병사의 무장 해제된 뒷모습 앞에서 사람들은 너나없이 이런 감탄사를 내뱉고 만다. “도대체 군대에서 어떻게 이런 사진을 찍는단 말야?”



재미있는 것은 이씨가 사진병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가 배치된 중대에는 사진병이라는 보직 자체가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고참들이 그를 가만 놓아두지 않았다. 국문과 출신 사병에게 연애 편지 대필 명령이 떨어지듯 중앙대 사진학과를 다니다 입대한 그에게는 제대 기념 사진을 찍어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내무반·샤워장·변소. 아무 데서나 셔터를 눌러대도 그를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자 동료 부대원들은 그의 카메라를 아예 의식하지도 않았다. 덕분에 그는 병영에서 벌어지는 자연스러운 삶의 풍경들을 ‘낙서처럼 툭툭’ 필름 60여 롤에 담아낼 수 있었다. 이는 자신에게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입대한 그 날부터 제대할 날만 손꼽아 기다리던 그에게 훈련소 조교는 이런 악담을 던졌었다. “내 친구 중에 꼭 너 같은 애가 있었거든. 그런데 입대한 지 석 달 만에 자살했다.” 그런 그에게 사진은 군대 생활의 무료함과 무의미함을 달래줄 유일한 탈출구였다.



기념 사진 보는 듯한 ‘병영 24시’



그러나 군대를 벗어난 순간부터 그는 당시 찍은 사진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제대 직후 군대는 그저 하루빨리 잊어버리고 싶은 악몽의 장소일 따름이었다. 세월이 지난 뒤에는 먹고 사느라 바빠 군대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제대하고 꼭 10년째가 되던 지난해, 집에 놀러온 친구들에게 옛날 찍은 사진들을 보여주다가 그는 묘한 감회에 사로잡혔다. 오래된 흑백 필름 속에서 웃고 있는 젊은 병사들을 바라보는 순간 그 위에 스무살 적 자기 모습이 겹치면서 ‘아, 이것도 내가 살아온 시간의 한 단면이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간 것이었다.





더불어 돌아보게 된 것이 30대 중반을 막 넘기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처자 딸린 가장으로서 사회적으로도 웬만큼 자리를 잡아가는 나이. 그렇지만 젊은 날의 열정과 패기로부터는 어느새 아득히 멀어져 버린 자신을 돌아보며 그는 스무 살 무렵의 초심(初心)을 떠올렸다.



이번 전시회가 보통 사람에게 정서적인 감염력을 갖는 것은 이 때문이다. 상명하복의 위계 질서와 폭력으로 얼룩진 비인간적인 군대 문화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건만 이씨의 사진에서는 특별히 사회 고발적인 색채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영화 <친구> 식으로 ‘싸나이’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 사람들은 이씨의 사진을 보며 입학식·결혼식 사진을 보는 것 같은 감회에 젖는다.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직·간접으로 으레 한 번쯤은 거쳐야 하는 통과 의례의 현장. 그곳에 서 있는 앳된 병사의 모습에서 자신 또는 아들·오빠·연인의 옛 초상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가 직접 붙인 이번 전시회의 제목은 ‘군인, 841의 휴가’이다(8백41일은 그의 복무 일수다). 원하지도, 선택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피할 수도 없었던 젊은 날의 휴가. 다섯 살 난 아들만은 그 휴가를 자의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시대를 살아가기 바란다는 그는, 전시회를 앞두고 군대 생활과 관련된 에세이·슬라이드 쇼 따위를 연재하는 홈페이지(azaphoto.net)도 개설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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