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 발목 잡힌 연극 <선데이 서울>
  • 이영미 (연극 평론가) ()
  • 승인 2004.08.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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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형 연출 <선데이 서울>/영화적 발상 못 벗어난 무대 아쉬워
독특한 매력의 영화배우 배두나와 괴물 같은 연출가 박근형이 만나 <선데이 서울>이라는 연극을 한다는 포스터는 나를 꽤나 흥분시켰다. 배두나, 엄청 예쁜 ‘자뻑’(자기가 자기 모습 보고 반한다는) 여배우들 틈에서 가식 없는 연기로 군계일학처럼 돋보이는 주연급 여배우. 박근형, 노숙자나 다름없이 보이는 외모처럼 누추하고 구질구질하지만, 평론가들의 평범한 분석을 비켜가는 기발한 연극을 만들어내는 40대 초반의 잘 나가는 자작 연출가. 거기에 촌티가 팍팍 풍기는 B급 문화의 질감이 넘치는 제목 <선데이 서울>. 정말 기가 막힌 조합이었다.

게다가 한국 영화계의 ‘스타’ 박찬욱 감독까지 가세하고 있다는 게 아닌가. 그런데 사실 이 대목에서부터 나는 좀 불안했다. 박찬욱이 박근형을 제쳐놓고 연극 연출을 할 리는 없고, 그럼 희곡을 썼단 말인가? 그저 원안만 제공한 수준이거나 기획에 간여하는 정도였으면 좋겠는데. 박찬욱의 영화를 싫어해서가 아니다. 나는 그의 작품을 아주 재미있게 보았다. 문제는 그의 작품이 모두 영화였다는 점이다. 아마 나는 박찬욱이 아닌 어떤 영화감독이, 혹은 어떤 소설가가 희곡을 썼다고 해도 걱정했을 것이다. <선데이 서울>은 영화인 3명, 즉 박찬욱·이무영·윤태용이 함께 희곡을 썼다. 나의 걱정은 현실로 나타났다.

‘나의 걱정’이란, 한마디로 말해 영화적 발상을 벗어나지 못한 희곡으로 인해 연극이 재미없어지기 쉽다는 것이다. 인물과 사건이 있고 배우들이 사건을 재현해 보여준다는 점에서 비슷해 보이지만, 영화와 연극은 매우 다른 예술이다. 우선 영화는 배우와 관객 사이에 카메라가 개입되어 있다. 영화는 카메라의 예술이지만 연극은 배우의 예술이다. 연극에서는 배우가 움직이지 않으면 별다른 의미가 발생하지 않지만, 영화에서는 카메라만 움직여도 의미가 발생한다.

<선데이 서울>은 지나치게 장면이 자주 바뀐다. 잦은 암전을 사이에 두고, 각기 다른 시·공간 속의 인물들이 보였다가 사라진다. 영화나 소설에 익숙한 사람들이 연극 작업을 했을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결함이다. 소설과 영화에서는 시·공간의 변화가 자주 일어나며, 또 그것은 매우 쉽고 자유롭다. 이것이야말로 소설과 영화를 풀어가는 핵심적 방법이다.

그런데 연극은 다르다. 오로지 등장 인물들이 대립하며 사건을 끌고 가고, 또 그것을 통해 배우와 관객이 서로 교감하는 게 연극이다. 조명이 켜진 뒤, 배우들이 나와 충분히 싸우고 뒹굴고 웃고 까불고 하여 그 장면이 스스로 잦아드는 느낌이 있을 때에야 비로소 연극의 한 장면은 끝난다. 그래서 연극의 장면은 호흡이 길고, 그 하나만으로도 연극적 재미가 느껴진다.
영화인들이 희곡을 쓴 <선데이 서울>은 관객이 한 장면을 충분히 즐기기 전에 그 장면이 끝나버리고, 암전이 배치된다. 그래서 연극은 종종 카메라가 빠진 영화처럼 느껴진다. 이런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연출자는 7~8 군데에서 배우들이 수시로 등·퇴장할 수 있도록 무대 미술과 동선을 조정하여 장면 전환 시간을 줄이도록 했으나, 그래도 호흡 긴 연극 장면의 맛을 만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런 문제들이 영화인 박찬욱·이무영·윤태용의 역량 탓은 아니다. 소설가나 영화·방송 작가들이 연극 무대에 뛰어들 때 거의 예외 없이 걸려드는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소설과 영화, 방송 작품을 각색한 연극의 태반이 이 덫에 걸려 허우적댄다. 대학의 극작 전공 학생들은 4년 내내 오로지 이것을 교정하는 데에 힘을 소비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연극이나 소설을 쓰다가 영화로 가는 경우에도 장르 건너뛰기의 흔적이 발견된다. 이창동의 첫 영화 <초록 물고기>에 남아 있는 소설가의 흔적, 장 진의 첫 영화 <기막힌 사내들>에 남아 있는 연극인의 흔적을 보라. 그러나 영화감독이나 소설가가 연극으로 건너와 헤매는 긴 기간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 연극의 문법은 낯설다.

박근형 식으로 풀어가는 기발하고 징글징글한 B급 문화 질감의 작품에 배두나가 출연하여 박근형 식으로 조율된 연기를 보여주었다면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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