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관이냐 실증이냐 ‘고종 시대 논쟁’ 재점화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4.09.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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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시대 성격 놓고 역사학계·경제학계 ‘입장 차’
고종은 근대적 계몽 군주였나, 아니면 무능한 역사의 패배자였나. 고종 시대에 대한 평가를 둘러싸고 역사학계와 경제사학계의 논쟁이 뜨겁다. 학계의 ‘과거사’ 논쟁이 주목되는 것은 이 논쟁이 일제 식민지 시대에 대한 평가와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한국의 근대화(자본주의)가 내재적으로 발전했나, 아니면 일제에 의해 이식·발전되었나에 따라서 이후 한국 사회의 해석 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다.

논쟁을 촉발한 것은 이태진 교수(서울대·한국사)의 <고종시대의 재조명>(태학사)과 고 김대준 교수(연세대)의 <고종시대의 국가재정 연구>(태학사) 등 두 권의 책. 후자는 원래 1974년에 발표된 논문인데, 이교수가 자신의 논지를 보완하기 위해 최근 장문의 발문을 붙여 ‘재발굴’한 책이다. 이에 대해 한국경제사 전공자 김재호 교수(전남대·경제학)가 <교수신문> 7월14일자에 비판적인 서평을 게재하면서 논쟁이 시작되었다.

쟁점은 다음 세 가지 정도. △고종은 탕평책을 통해 근대화를 꾀했던 군주였나 △대한제국은 재정 개혁과 입헌군주제를 비롯한 근대화 개혁을 실제로 추진했나 △일제의 식민 지배가 없었어도 대한제국의 내재적 발전은 가능했나. 이태진 교수는 “고종은 정조의 ‘민국 이념’을 계승한 근대적 계몽 군주로서 근대화 정책을 자주적으로 수행했지만 일본의 침략에 의해 좌절되었다”라고 주장했다.

반면 김재호 교수는 “왕정 극복의 의지도 없었던 고종의 업적을 과잉 평가했을 뿐만 아니라 고종 시대의 객관적 사실 인식에서도 오류가 많다”라고 반박했다. 논쟁은 김재호의 서평→이태진의 반론→김재호의 재반론에 이어 이태진의 재재반론까지 두 달 넘게 계속되고 있다.

한국 근대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역사학계와 경제학계, 엄밀하게 말하자면 강만길 교수를 필두로 한 진보 성향 한국사학자들과 이른바 ‘안병직 사단’이라고 불리는 일군의 경제사학자들이 벌이고 있는 오랜 논쟁 주제다. 한국사 전공자들은 구한말을 봉건 사회가 내재적 동력에 의해 해체되어 가던 시기라고 보는 반면, 경제사학자들은 각종 경제 추계를 통해 19세기는 침체기였다고 주장한다. 내재적 발전론(한국사)과 식민지 근대화론(경제사)의 대결로 불리는 양측의 시각은 일제 식민지 평가에서 극명하게 갈린다. 이들이 처음으로 정면 충돌한 논쟁 또한 식민지의 성격을 둘러싸고 벌어졌다.
7년 전, <창작과 비평>(1997년 여름호)에 도발적인 논문 한 편이 실렸다. 조석곤 교수(상지대·경제학)가 기고한 <수탈론과 근대화론을 넘어서>. ‘식민지 시대의 재인식’이라는 부제가 붙은 논문에서 조교수는 ‘일제 초기 토지 조사 사업 과정에서 불법적인 토지 약탈이 이루어졌고, 지가 조사를 통해 농민의 지세 부담이 가중되었다’는 역사학계의 식민지 수탈론 주장을 당시의 경제 통계를 이용해 조목조목 반박했다. 일제의 식민 지배는 오히려 성장과 개발을 촉진한 면이 있었고, 이것이 1960년대 경제 발전에 유형무형의 기반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정태헌 교수(고려대·한국사)가 ‘중요한 것은 식민지 시대라는 총체적 수탈 체제를 바라보는 역사 의식인데 근대화론자들은 ‘식민지적 근대’의 복합성을 의도적으로 도외시하고 있다’는 반박 논문을 <창작과 비평> 1997년 가을호에 기고하면서 양측의 논쟁이 격화했다.

이른바 ‘안병직 사단’은 안병직 교수(서울대 명예교수)와 이대근 교수(성균관대·경제학)가 중심이 되어 1987년 문을 연 낙성대경제연구실 소속 회원들을 일컫는 말이다. 최근 종군위안부 관련 발언으로 설화를 입은 이영훈 교수(서울대·경제학)가 소장이며, 김낙년(동국대·경제학) 이헌창(고려대·경제학) 장시원(방송대·경제학) 교수 등이 주요 멤버이다. 한국사학계와 논쟁을 벌인 조석곤·김재호 교수도 안교수의 제자이자 이 단체 회원이다.

안병직 교수는 원래 식민지반봉건사회론을 주장하던 진보 성향 학자에서 1990년대 초반부터 식민지 근대화론자로 바뀌었다. 1980년대 후반 김해군청 문서기록실에서 일제시대 토지신고서와 토지분쟁 자료가 무더기 발굴되었는데, 이를 분석해보니 수탈론 주장과는 다른 식민지의 근대적 모습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안교수가 1980년대 중반 일본 도쿄 대학 객원교수로 가 있을 때 만난 일본의 마르크스주의 사학자 나카무라 사토루(中村哲)의 중진자본주의론도 그에게 영향을 끼쳤다. 이후 안병직 사단은 한국의 근대화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며 내재적 발전론을 주장하던 역사학자들과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들의 논쟁은 언뜻 보면 사관 중심 사학과 실증 사학의 다툼으로도 보인다. 이번 논쟁의 당사자인 한국사 전공자 이태진 교수는 “통계라는 것은 객관성이 있지만 활용하는 사람에 따라 악용될 수도 있다. 숫자 외에 역사적 상황에 대한 이해를 좀더 폭넓게 해야 한다”라고 경제사학계를 비판했다. 그렇지만 일종의 ‘왕정 중심 사관’을 펼치는 이교수의 주장 또한 한국사학계 내부에서 보자면 소수파 혹은 비주류에 속한다.

내재적 발전론은 1970년대부터 진보 성향 역사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전개하던 주장이다. <조선후기 농업사 연구>(1970년)를 쓴 김용섭 교수(연세대 명예교수)와 민중사학을 주창한 강만길 교수(상지대 총장)가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고, 현재는 한국역사연구회(회장 이영호 인하대 교수) 소속 소장 학자들이 경제학계와의 논쟁을 주도하고 있다.

이들 ‘정통’ 내재적 발전론자들이 고종을 바라보는 관점은 이태진 교수와 달리 냉정하다. 한국역사연구회 회원인 왕현종 교수(연세대·한국사)는 “고종의 절대화만 강조하는 민족주의적 시각으로는 역사적 구조 변화의 동인과 주체를 다각도로 분석하기에 부적절하다”라고 이교수를 비판했다. 대신 이들은 개화파의 활동과 동학농민전쟁 등 민중의 저항에서 내재적 발전의 근거를 찾는다.

물론 역사학계는 경제사학계의 연구 태도에 대해 ‘잽’을 날리는 것까지 잊지는 않았다. 왕현종 교수는 “(경제사학자들이) 근대주의적 관점에서 일제 식민지 근대화를 긍정하려 하고 있지만, 근대화지상주의는 자민족 억압과 민중적 삶의 해체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라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김재호 교수는 “현대 한국 사회는 식민지의 조건(제도, 물적 자본) 위에서 출발했다는 관점을 인정해야만 우리 역사를 총체적으로 볼 수 있다”라고 응답했다. ‘근대화=문명화’라는 발상 대신 중립적인 의미에서 근대를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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