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판 북미 인디언 시베리아 원주민의 삶
  • 강철주 편집위원 (kangc@sisapress.com)
  • 승인 2003.08.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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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레이드 지음 <샤먼의 코트>
‘수은은 납으로 변하고, 브랜디는 시럽처럼 걸쭉해지며, 살아 있는 나무는 폭발음을 내며 터져버린다. 도끼로 통나무를 내리찍으면 시퍼런 불꽃이 튄다. 숨을 내뱉는 순간 수정구슬처럼 얼어붙은 숨결은 소나기처럼 땅바닥에 떨어져내린다.’ 겨울철 평균 기온이 영하 30∼40℃인 아시아의 ‘원악지(遠惡地).’ 기껏 낭만적으로 윤색해도 실패한 혁명가들의 유형지. 얼어붙은 툰드라의 땅 시베리아에는 어떤 이들이 살았을까.

안나 레이드의 <샤먼의 코트>(윤철희 옮김, 미다스북스 펴냄)는 러시아판 북미 인디언으로 일컬어지는 시베리아 원주민들의 예와 지금을 다룬 책이다. 지구 전체 육지의 7분의 1에 해당하는 광막한 땅을 횡단한 저자는, 러시아의 슬라브족과, 그들의 용병이었던 코사크족에게 유린당했던 시베리아 원주민의 생생한 역사를 되살리고 있다. 전래 민담에서 옛 소련의 KGB 보고서에 이르는 방대한 참고 문헌, 승려와 샤먼, 순록 목자, 수용소 생존자와 공산당 기관원에 이르는 폭넓은 인터뷰가 그 역사의 복권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래선지 이 책은 얼핏 기행문처럼 읽히기도 한다. 실제로 저자는 시베리아를 횡단하면서 이 지역을 대표하는 아홉 민족- 타타르 한티 부랴트 투바 사하 아이누 니브히 우일타 추크치-의 현재와 과거에 특히 주목한다. 이들은 민족 별로 차이를 보이기는 하지만, 대체로 근친 상간이 허용되고 공동 소유를 인정하는 ‘소박한’ 원시 공동체적인 모습을 드러내는데, ‘유럽의 러시아’가 ‘아시아의 시베리아’를 침탈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스탈린 치하의 공산화 과정에서 그같은 공동체적 미덕은 철저하게 파괴되기에 이른다.

여기서 독자의 관심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러시아에 의해 시베리아가 어떻게 망가졌는가와, 망가지기 이전 시베리아의 본모습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전자 쪽이라면 담비 모피에 눈먼 러시아 상인·군인과, 그들이 퍼뜨린 매독과 천연두에 주목할 것이고, 후자 쪽이라면 시베리아 원주민 고유의 삶에 매료될 것이다.

예컨대 한티족의 언어를 보자. 그들의 언어는 80%가 동사이고, 소리와 관련된 단어들이 신기할 정도로 많다. ‘곰이 딸기 숲을 걸을 때 내는 소리’를 지칭하는 단어가 따로 있는가 하면, ‘오리가 물 위에 조용히 내려앉는 소리’에 해당하는 말 역시 따로 있다. 반면 추상 명사는 드물다. ‘풍부’라는 단어는 ‘산딸기가 많다’는 의미이고, ‘행복’은 ‘내 마음이 스스로 즐겁다’이다. 외래 문명에 해당하는 단어는 자연에서 표현을 빌려 왔다. ‘모자’를 ‘비를 맞지 않게 해주는 위쪽이 넓은 나무’라고 하는 식이다.

이처럼 저자가 되살려놓는 시베리아의 ‘과거’를 접하다보면 시베리아가 무슨 ‘약속의 땅’처럼 기회와 매혹의 대지인 것 같다. 그러나 시베리아는 헬레나 노르베리-호지가 <오래된 미래>에서 다룬 티베트처럼, 원주민끼리만 살았으면 가능했을, 잃어버린 낙원일지 모른다. 저자의 책에 등장하는 시베리아 원주민들은 마치 북미 인디언들이 그랬듯이, 고통과 살육의 쓰린 역사를 거쳐 가까스로 살아 남은 ‘식민지 백성’(백인과 인디언, 슬라브족과 시베리아 원주민의 관계는 상당히 유사하다)이라는 것이다.

책 제목 ‘샤먼의 코트’의 ‘코트’는 시베리아 샤먼이 의식을 집전할 때 입는 옷으로 온갖 장식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전체 무게가 20kg이 넘으며, 코트의 임자가 진짜 영험한 샤먼임을 보여주는 증표이다. 저자는 자신이 기술한 시베리아의 현재에 대해 ‘코트 위에 다른 옷을 걸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곤 덧붙인다. ‘실제로는 코트를 벗은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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