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장은 예를 갖춰 참수했다
  • 강철주 편집위원 (kangc@sisapress.com)
  • 승인 2004.03.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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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태 지음 <벽화여, 고구려를 말하라>
중국의 ‘동북 공정’으로 고구려사 왜곡 논란이 빚어지고 있는 가운데, 우리측의 대응은 고구려에 대한 한국사의 감정적 ‘연고권’을 주장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는 느낌이다. ‘어떤’ 역사였는가를 밝히는 일은 제쳐둔 채 ‘누구’의 역사였는지에만 집착하는 모양새다. 그러다 보니 고구려에 대한 일반인의 상식도 여전히 상식 이하 수준에 머물러 있는 형편이다. 흔히들 광개토왕비나 고구려 고분 벽화를 주워섬기지만, 그것들이 한국 고대사의 단순한 부속물임을 뛰어넘은 적은 드물었다. 문헌 자료보다 훨씬 더 진진한 ‘실물의 증언’에 제대로 귀를 기울이지 못해 왔다는 것이다.

전호태 교수(울산대)의 <벽화여, 고구려를 말하라>(사계절 펴냄)는 고구려 고분 벽화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 책이다. 서양미술사가가 모나리자의 미소에 얽힌 사연을 들추어내듯, 쌍영총·무용총 등 ‘이름만 알던’ 고구려 고분 벽화의 세계로 독자들을 이끈다. 벽화의 구체적인 한 장면 한 장면에 글 한 편씩을 할애함으로써, 고구려 사람의 생각과 생김새, 사회와 문화를 실감 나게 재현한다.

가령 저자는, 생활 풍속과 장식 무늬가 주를 이루는 통구 12호분 벽화를 보며 <적장 참수도> (99쪽 그림 참조)에 주목한다. 투구를 쓰고 비늘 갑옷을 입은 무사가 비슷한 복장을 한 다른 무사의 목을 베는 순간을 묘사한 것이다. 패자는 무릎을 꿇은 채 목을 늘어뜨렸으며, 승자는 왼손으로 패자의 투구 끝을 잡고, 오른손에 환두대도를 높이 치켜든 상태다. 그림의 구석구석으로 독자의 눈길을 안내한 저자는 이어서 백제 성왕의 최후를 전하는 <니혼쇼키(日本書紀)>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승자가 말에서 내린 뒤 패자가 된 장수 앞으로 나아와 절을 하며 말한다. 나는 어느 성의 군관 아무개요. 대왕의 목을 앞으로 내어놓으시오. 베어야겠소.’ 벽화 속의 패자가 성왕은 아니지만 고구려 귀족 전사의 일반적인 전투 양상을 보여준다.

무용총의 <수렵도>(98쪽 그림 참조)를 보면서는 온달 장군이 출세하는 계기가 되었던 ‘낙랑회렵(樂浪會獵: 매년 삼월삼짇날 낙랑 언덕에서 왕과 5부의 군사가 모두 참여하는 대규모 사냥대회)’ 이야기를 하며 고구려인에게 사냥이 갖는 의미를 밝히고 있다. 사냥은 군사 훈련이면서, 제사에 쓰일 희생 짐승을 잡는 제의 절차의 일부였다. <수렵도>에 사슴류가 많이 등장하는 것도 사슴·노루·고라니가 중요한 제의용 희생 짐승이었기 때문이다.
덕흥리 고분 벽화에는 무덤의 주인으로 보이는 인물에게 13군의 태수가 배례하는 장면이 있는데, 태수 13명의 얼굴이 판에 박은 것처럼 닮았다. <행렬도>로 유명한 안악 3호분 벽화의 등장 인물들도 마찬가지다(오른쪽 그림 참조). 저자는, 그들이 개성적 얼굴을 지닌 인간으로 표현되지 못한 이유를 권력의 문제로 보았다. 한 지역, 한 시대를 지배하던 권력자에 속한 자들을 권력자에게서 독립된 개인으로 표현하기는 어려웠다는 것이다.

그밖에도 저자는, 황도 28수의 별자리를 모두 그려 넣은 덕화리 2호분 <천문도>에서 당시 평양이 천하의 중심이었음을 읽어내는가 하면, 우주를 떠받치는 삼실총 벽화의 <역사도>에서는 5세기 중엽 동아시아 패권국으로서 고구려의 강건한 기상을 발견한다. 수산리 고분의 <교예도>에서는 서아시아에서 직통으로 전래된 서커스의 흔적을 찾아내며, 각저총 벽화에서는 유명한 씨름 그림 대신 나무 그림에 주목해 신과 사람을 잇는 ‘하늘의 사다리’를 부각한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 자주 나오는 평상에 앉은 인물상을 두고는 입식 생활과 온돌의 지역적 분포를 추측하고, 감신총 서왕모 그림에서는 불로불사의 선계를 꿈꾸던 고구려인의 염원을 본다.

<벽화여, 고구려를 말하라>는 이처럼 고분 벽화에 얹힌 1천5백년 세월의 더께를 걷어내고 오늘의 독자에게 ‘말을 건다.’ 저자는 이를 통해 5세기 들어 절정에 이른 ‘범고구려 문화’의 전개와 발전 과정을 밝히는 데 주력한다. 고분 벽화라는 장례 미술이 고구려 사회의 역사적 흐름과 어떤 관련을 맺는가를 살핀다는 점에서 이 책은 무덤 속에서 잠자던 고구려사의 편린들을 햇빛 아래 드러내고 꿰맞추는 작업이 된다. 그것이 과연 누구의 역사였는가를 밝히는 일은 다음 문제다. 예컨대, 저자는 덕흥리 고분의 주인공이 중국인이었는지 고구려인이었는지에 대해 확답을 내리지 않는다. 일부 독자에게는 그것이 불만이겠지만, 근대 국가의 정치적 이해 관계가 배제된 고구려사의 실상이 궁금하다면 맞춤한 대중용 역사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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