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아시아 영화 메카로 떠오르다
  • 부산·宋 俊 기자 ()
  • 승인 1997.11.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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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부산국제영화제 ‘대성공’…관객·작품 ‘수준급’ 운영은 ‘미흡’
잔치가 끝났다. 부산국제영화제(PIFF·10월10~18일)는 말 그대로 시네마 천국이었고 영화의 도가니였다. 33개국에서 공수되어 온 영화 백66편을 보러 전국에서 몰려든 관객이 20만명에 달했고, ‘PIFF 광장’(2백m 남짓한 극장가의 차 없는 거리)은 연일 인파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18일 밤 시상식(107쪽 표 참조)에 이어 폐막작 <반생연> 상영이 끝난 뒤에도 수영만 야외 상영장을 찾은 4천여 관객은 인근 포장마차에서 아쉬움을 달랬다.

25억원 가량을 투입해 화려하게 막을 올린 올해 부산국제영화제는 1회 행사의 성공이 거품인지 아닌지를 검증하는 마당이었다. 두 번째 잔치는 첫해의 성과를 압도할 정도로 대성공이었다.

제레미 아이언스·왕조위 같은 스타들과 웨인왕·압바스 키아로스타미 등 전성기의 감독을 포함해, 지난해의 두 배가 넘는 2백70여 저명 인사들이 초청에 응해 부산국제영화제의 위상을 높여주었다. 이 가운데는 칸 영화제 핵심 프로그래머 3인 막스 테시에·피에르 리시앙·장 미셸 오세이와 베를린 영화제 포럼 부문 창설자이자 집행위원인 울리히 그레고, 로테르담 영화제 집행위원장 사이먼 필드, 카를로비바리 영화제 프로그램 디렉터 에바 자오랄로바 등도 포함되어 있다.

유럽영화프로모션(EFP)의 제안은 영화제 관계자들을 행복한 고민에 빠뜨렸다. 내년부터 유럽 영화 12~15편을 집중 상영하는 별도 섹션을 추가해 달라는 제의였다. 이에 대해 영화제측은 “부산영화제의 얼굴은 아시아 영화다. 유럽 영화를 특화해 소개하기보다 ‘월드 시네마’ 부문에 유럽 작품을 더 많이 포함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라고 유보적 반응을 보였다.
유럽 영화인 “유럽 영화 섹션 신설해달라”

부산국제영화제측이 아시아 영화를 주조로 삼는 데는 깊은 뜻이 숨어 있다. 홍콩·도쿄·상해 영화제가 시나브로 신선함을 잃어가고 있는 틈에 ‘아시아 영화의 창’으로 발돋움하자는 구도가 그것이다. 게다가 상해 영화제가 10월24일부터 개막되고 도쿄 영화제가 11월1일로 개막 일정을 바꿈으로써, 부산국제영화제는 동아시아 영화제 릴레이의 출발 주자라는 이점을 거저 안게 되었다.

아시아 영화의 두드러진 약진도 영화제측으로서는 고무적인 현상이다. 관객의 반응도 이같은 의도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관객의 발길이 미국·유럽·중남미 계열의 수작을 모은 ‘월드 시네마’ 부문보다 ‘아시아 영화의 창’과 신인 등용문인 ‘새로운 물결’ 부문으로 몰린 것이다.

이번 영화제는 개막 첫날부터 매진 행진을 계속했다. 매일 상영되는 32~33편 가운데 16~18편이 완전 매진되었다. 개막작 <차이니스 박스> (웨인왕 감독)와 <하나비>(기타노 다케시) <체리 향기>(압바스 키아로스타미) <비밀의 화원>(야구치 시노부) 등 아시아 영화 태반이 매진 붐을 선도했다.

아시아 영화의 약진을 이끈 대표 주자는 이란과 일본이었다. 특히 이란 영화는 폭력과 섹스 표현을 지양하고 기교를 절제하는 탐미적 영상으로 눈길을 모았다. 삶과 사회를 관조하고 풍자하는 사유적 분위기도 이란 영화의 특징이다. 이같은 경향을 이끈 감독이 바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이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언어는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을 이란의 현실에 맞게 재해석했다는 평을 듣는다. 예컨대 영화의 플롯을 엔진으로 삼아 화면 구석구석에 감독의 문제 의식을 배치하는 방식이 그 하나인데,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주민들을 직접 영화에 출연시켜 자신들의 현실을 드러내게 하는 독특한 문법을 개발했다.
중국 5,6세대 ‘개점 휴업’ 홍콩도 ‘외화내빈’

반면 강세를 보여오던 중국어권 영화들은 기세가 한풀 꺾였다. 중국 영화는 <매복>(황지안신·양야주 공동 연출) 한 편이 출품되었을 뿐이다. 해외에 진출한 일부 5세대 감독말고는 5,6세대 감독 대부분이 손을 놓고 있는 것이 중국의 현실이다.

홍콩 영화는 외화내빈에 시달리는 형세다. 개·폐막 영화와 최대 화제작 <부에노스아이레스> 가 모두 홍콩(홍콩 출신) 감독의 작품이었지만, 홍콩 영화의 미래는 불확실하기만 하다. 흥행 수익이 감소 추세를 보이고, 95년부터 제작 편수도 급격히 줄고 있다. 홍콩 반환 이후 중국이라는 새 시장이 생겼지만 영화 제작·유통 시스템을 재편성해야 한다는 숙제가 새로운 부담으로 떠올랐다.

그나마 독립 영화 감독들이 악전고투하며 홍콩 작가 영화의 계보를 잇고 있다. 예컨대 프루트 챈 감독은 유효 기간이 지난 필름을 얻어다 스태프의 무료 봉사에 힘입어 <메이드 인 홍콩>을 완성했다. 배우도 거리에서 캐스팅한 완전 초보. 제작비는 6천만원 정도가 들었다.

대만의 경우는 더 심각하다. 대만의 영화 자본이 미국·홍콩 등으로 빠져나가 감독들의 고군분투가 불가피하다. 관객의 반응도 썰렁하다. 국제영화제 수상 작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다만 80년대 들어 후 샤오시엔·에드워드 영 같은 감독들이 주도한 ‘대만 뉴 웨이브’의 저력이 차이밍량 등에 의해 어렵사리 유지되는 형편이다.

관객이 냉랭하기는 일본도 마찬가지다.그같은 상황에서 독립 영화의 전통이 일본 영화의 르네상스를 견인했다는 사실은, 한국 영화 현실에 견주어 음미할 만하다. 한국 영화의 평균 제작비는 10억원, 결코 작은 액수가 아니다. 관객 반응은 인근 아시아 국가에 비하면 열광에 가까울 정도다. 그런데도 한국 영화의 걸음 속도는 지지부진하다.
“<명성, 그 6일의 기록> <레드 헌트> 같은 독립 영화는 감명 깊었으나 마땅히 초청할 부분이 없고, 장편 극영화 가운데는 마음에 다가오는 영화가 없었다”라는 칸 영화제 프로그래머 장 미셸 오세이의 말은 시사하는 바 크다.

상업 영화의 여건에 비하면 한국 독립 영화 현실은 참담하기 짝이 없다. 그나마 독립 영화가 영화계의 한구석을 차지하게 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부산국제영화제는 음지의 독립 영화를 양지로 불러냈다는 점에서 또 다른 의의를 갖는다. 역설적이게도 이 모처럼의 마당에서 지난 14일과 15일 독립 영화인 50~60명이 인권영화제와 퀴어영화제에 가해진 심의 압력에 항의해 PIFF 광장을 백m 행진하며 시위를 벌였다.

10월11∼13일 진행된 ‘PPP(PIFF Promotion Plan) 회의’는 이같은 문제의 해결을 꾀하는 부산국제영화제 회심의 기획이다. 이는 유망한 작품 지원·공동 제작·공동 배급 등 다국적 협력 시스템을 구축하는 ‘프리 마켓’의 준비 단계에 해당한다. PPP 회의의 모델인 로테르담 영화제의 ‘시네마트’는 세계의 신인 독립 영화 작가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의 장으로 유명하다. 올해 처음 열린 PPP 회의는 세계 각국의 사례와 ‘후버트발스 기금’ (영화 개발도상국의 제작 지원) 같은 공동 영화 기금 사례 등을 집중 토의하고 ‘영화 완성 보험’ 설립을 모색하기로 뜻을 모았다.

부산국제영화제가 규모와 실속 차원에서는 뿌리 내리기에 성공한 반면, 행사 운영에서는 적지 않은 문제가 드러났다. 관객 설문 조사에서 드러난 첫 번째 불만은 행사 정보가 신속히 전달되지 않았다는 것. 상영 영화가 변경되거나 이벤트가 열리는 사실을 제대로 알리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통역 문제도 심각했다. 국제 영화제는 3~4개국 언어로 동시 통역되는 기자 회견장이 필수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국내외 기자들이 5~6개 호텔에 임시 마련된 기자회견장을 전전해야 했고 동시 통역이 안되는 바람에 시간을 허비해야 했다.

운영이 지나치게 경직된 점도 지적받았다. 좁고 불편한 극장 시설, 일부 요식업소의 횡포도 영화제의 즐거움을 해치는 부분이었다. 극장가 일대에 문화·휴식 시설이 거의 없는 점도 방문객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이같은 문제들을 말끔하게 해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부산국제영화제는 아시아 영화의 대표적 창구로 발돋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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